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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4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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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한수 목사 |
참고 : |
성경말씀: 이사야 40장 1절-11절
설교제목: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어떤 청년이 높은 산을 올라가기 위하여 등산을 시작합니다. 지저귀는 새들과 길가에 핀 꽃을 감상하다가 그만 절벽에서 발을 헛디디고 맙니다. ‘앗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떨어지는데 무엇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손을 뻗었습니다. 어느 순간 자기의 손에 무엇인가가 잡히는데 보니까 나무 뿌리였습니다. 그 나무뿌리를 잡고 절벽 중간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위를 향하여 소리를 지릅니다.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런데 위에서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이 청년은 다시 소리칩니다. ‘살려 주세요. 여기 사람이 매달렸어요.’ 한참을 그렇게 소리를 치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립니다. ‘살고 싶으면 그 손을 놔라.’ ‘뭐라구요. 위에 누구 있어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저 좀 구해 주세요.’ ‘살고 싶으면 그 손을 노라니까!’ ‘뭐라구요. 이 손을 놓으면 저는 떨어져 죽어요. 저 좀 구해 주세요.’ ‘야 이놈아! 살고 싶으면 그 손을 노라니까. 지금 놓지 않으면 넌 죽어! 빨리 그 손을 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 청년이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보니까 독사가 자기 손 쪽으로 혀를 낼름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 청년은 자기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아 나는 죽는구나!’ 그렇게 떨어지는데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붙잡으셨습니까? 무엇을 의지하고 사십니까? 여러분이 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의지하십니까? 누구를 믿으십니까?
오늘 봉독한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포로로 끌려가서 고생고생 했는데 70년 만에 이제 그 고생이 끝나서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70년 동안 고생을 하다보니까 건져 주시기나 하실지, 자기들을 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기는 70년이 다 되도록 포로에서 해방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하고 절망감에 빠져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포로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는 백성들, 희망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갖게 하실까요?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실까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절망하고 낙심한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어떻게 건져내시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 말씀은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로를 받을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너희’는 누구를 말할까요? ‘너희’는 4절에 나오는 골짜기들과 산들과 언덕들과 고르지 아니한 곳들과 험한 곳들을 말합니다. 4절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명령형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골짜기들아! 솟아올라라. 산들아! 언덕들아! 낮아져라. 고르지 아니한 곳들아! 평탄하게 되라! 험한 곳들아! 평지가 되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골짜기들과 산들과 언덕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골짜기들과 산들과 언덕들에게 명령하실 수 있으신 분은 누구뿐이실까요? 네,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명령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있는 자기의 백성들을 구출하신다는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방 땅으로 떠나보낸 지 70년 만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건져내실 생각만 해도 감격과 기쁨을 주체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70년간 절망에 빠져 있던 백성들이 이제 돌아올 것인데 사랑하는 백성들이 편안하게 올 수 있도록 길을 닦으라는 것입니다. 고생, 고생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행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봐, 구덩이에 걸려 넘어져서 손이라도 까질까봐, 높은 산에 가로 막혀서 절망이라도 할까봐, 언덕에 걸려 넘어져서 무릎에 피라도 날까봐 골짜기에게 명령하고, 산과 언덕에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편안하게 올 수 있도록 길을 닦으라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던 백성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치셨던 그 백성들이었지만,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을 지라도, 배신을 하고 떠났을지라도, 그런 백성들을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포기하시는 분도 아니시구요.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도록 길을 내어서 기쁘게 맞이해 주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앞에 여러분을 낙심케하는 골짜기가 있습니까? 너무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어서 여러분을 절망하게 합니까?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낙심케하는 골짜기가 아무리 깊어도 그 낙심의 골짜기를 하나님께서 메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무리 높은 절망의 벽이 가로막혀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 산을 무너뜨려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나오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두 팔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둘째로, 절망을 이기려면 영원하신 하나님 한분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막강한 나라인 바벨론에게 패했지만 이스라엘을 집어삼킨 그 바벨론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나요? 네, 7절에 보니까 바벨론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풀이요. 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낱 풀이요. 꽃인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입김을 한번 부시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은 한낱 풀이요, 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오늘날로 말하면 미국과 같은 나라입니다. 최강대국인 미국이 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죠. 그런데 최강대국이었던 바벨론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망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을 망하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8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말씀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70년 포로생활이 끝나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보다 강한 분으로 오셨고 친히 그 팔로 다스리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그 어떤 자보다 강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영원할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만 못합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하나님보다 좋으신 분이 없습니다.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보다 더 강한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조금 있다가 사라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상황이 바뀌면 시들어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상황 따라, 조건 따라 수시로 바뀌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들은 풀과 같습니다. 모든 물질도 한낱 꽃과 같습니다. 모든 명예도 곧 시드는 풀과 같습니다. 아무리 싱싱해 보여도 늙어 갑니다. 아무리 멋져 보이고 강해 보여도 곧 시들어 갑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믿으시겠습니까? 누구를 의지하시겠습니까?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금방 말라버릴 풀이요, 아무리 멋져 보일지라도 곧 시드는 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낱 풀과 같은 것, 금방 시드는 꽃과 같은 것을 끌어안고, 의지하고, 우리의 인생 전부를 거는 어리석은 우리는 아닌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행여 그런 것을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고 있다면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은 한낱 풀이요, 금방 시드는 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절망을 이기려면 영원하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절망을 이기려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보호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은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 말씀은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을 해방시켜서 데리고 오시는데 목자같이 백성들을 품에 안으셔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에 지쳐있는 백성들, 삶의 무게로 축 늘어진 백성들을 목자가 양을 안듯이 하나님 자신의 품속에 꼭 안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양을 품에 안으면 냄새가 날까요? 안 날까요? 이 표현은 다시는 헤어지기 싫으신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비록 더러운 냄새, 죄로 찌든 썩은 냄새는 날지라도 다시는 놓치기 싫어서 품에 꼭 안으시는 것입니다. 다시는 사랑하는 내 양을 이리에게 넘겨주지 않으시겠다는 확신에 찬 표현입니다. 다시는 고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상처가 났을지라도, 때가 묻었을지라도, 냄새가 날지라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꼭 안아 주셔서 다시는 놓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더러울지라도,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우리를 안아주시고 구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인인 우리를 왜 구원하시려는 것일까요?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와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이 제일 먼저 손꼽으시는 넘버원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핵심)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포로로 잡혔던 백성들을 평탄한 길로, 대로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골짜기와 산과 언덕들에게 명령하셔서 길을 닦아 주셔서 대로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비록 냄새가 나고 더러울지라도 품에 꼭 안으시고 돌아오시면서 너무너무 기뻐하신 하나님이신데, 이런 하나님이신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신 예수님은 어떤 길로 가게 하셨습니까? 사랑하는 백성들의 손이라도 까질까봐, 무릎이라도 깨질까봐 그렇게 길을 닦으신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이신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은 돌계단에 무릎이 깨지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혀서 철철 피를 흘리는 그 길로 가셨습니다. 평탄한 길도 아니고, 넒은 대로도 아닌 골고다 언덕길, 그 돌계단에 무릎이 깨지고, 손과 발에 피를 흘리시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가셨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길이 고통의 길, 아픔의 길, 눈물의 길, 피 흘리는 길이었지만 그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 골고다 언덕길은 마땅히 죄인인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손이 아무 거리낌 없이 죄악을 범했고, 우리 발이 주저함 없이 죄악의 길로 갔고, 우리 마음이 온통 죄로 가득한데, 그래서 마땅히 더러운 우리 손과 발에 못이 박혀야 하고, 온통 죄로 가득한 우리가 창에 찔려야 하는데 왜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이 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까?
왜요? 무엇 때문에 주님은 이런 고통의 길을 가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런 고통의 길, 아픔의 길로 가셨을까요? 네! 바로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차마 죄인인 우리 손에 못을 박으면 너무 아플까봐, 차마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면 너무 고통스러워 할까봐,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가 없으셨습니다. 차마, 차마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이 손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 고통스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께서 고통의 길, 피 흘리는 길을 가야, 이 고통의 이 길을 꼭 가야만 우리를 죄에서부터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건저내실 수만 있다면, 고통의 길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고통의 길, 눈물의 길, 피 흘리는 길로 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귀를 만드신 분이 어찌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눈을 만드신 분이 어찌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손을 만드신 분이 어찌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발을 만드신 분이 어찌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이 들지라도, 어려울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넉넉히 이길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금방 마르는 풀이나 금방 시드는 꽃과 같은 것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붙들고 나아갑시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지칠 때 힘주시고, 아플 때 치료하시고, 부족할 때 능력 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동행하시고, 늘 지켜 주실 줄 믿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해 주실 줄 믿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말씀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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