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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52: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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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52009 |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성탄절, 2015년 12월25일
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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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나라 안팎으로 참 많은 일들이 올해에도 일어났습니다. 개인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행복하게 한해를 보낸 분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행복하게 살았다고 해도 그런 행복이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행복의 이면을 살펴보면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크고 작은 어려움 가운데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좀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좀더 다급하게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큰 재앙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일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보통 자기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은 것으로 일상에서 안심하면서 살아갑니다. 뉴스에 나오는 온갖 불행한 사건들이 자기를 피해갔다는 사실로 위로를 삼습니다. 그런 건 인지상정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불행과 재앙이 우리에게 닥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 당장 불치병에 걸릴 수도 있고, 엄청난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이혼할 수도 있고, 자연재해로 인한 재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시간만 흐르면 모두 이런 상태로 떨어집니다. 지금 저는 인생살이가 허무하니 비관적으로, 불안하게 초조한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지금 행복한 삶의 조건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거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 모두 근본적으로 위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이걸 눈여겨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위로도 필요 없고,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참된 믿음에 들어가기 힘듭니다.
이사야의 위로 신탁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핵심 메시지가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위로를 간구했을 거 같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두 가지 경우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자기들의 뜻대로 일이 잘 풀려서 하나님의 위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서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오늘 제1 독서로 읽은 본문의 상황은 두 번째 경우에 해당됩니다. 유대가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것이 괴멸되었습니다. 왕궁도 없고, 성전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사회 지도급 인사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유대의 모든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겁니다.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했습니다. 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이사야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서 ‘기뻐하며 노래하라.’고 외쳤습니다. 그 예루살렘 주민들이 처한 상황은 도저히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놓인 사람이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위로를 아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구속, 즉 도로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킵니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절망에서의 벗어남입니다. 시각장애인으로 살던 사람이 개안수술을 통해서 시력을 회복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특사를 받은 거와 비슷합니다. 이사야는 위로의 선지자라 불러도 될 만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줄기차게 전합니다. 그는 이미 앞 대목인 사 40:1,2절에서 이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거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사야의 이런 외침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뜬금없는 소리, 비현실적인 말이라고 배척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와 느낌이 없으면 아무런 감동도 없고, 감동이 없으면 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돼지 앞의 진주’입니다. 반면에 이사야의 이런 외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실제로 큰 위로를 받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사야의 이 예언이 살아남아서 구약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즘 우리의 경우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배의 기쁨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인지를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교회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큰 교회당, 많은 교인들, 차고 넘치는 헌금에서만 교회를 경험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의 목적이 됩니다. 이런 데만 몰두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사실이, 또는 예배 공동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것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다른 것을 부가적으로 더 채워 넣어보려고 노심초사합니다. 예수와 그의 운명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이 무엇인지를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예배 순서지 표지 사진은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한 부분만 찍은 겁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은 다른 아이들의 출생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를 임신하고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했다네.’(눅 1:46,47)라고 노래했습니다. 자궁 속의 태아, 또는 신생아는 겉으로 볼 때 무기력하기 그지없지만, 마리아의 영혼은 예수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고 기뻐하며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에게서 경험한 원초적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토대이며, 따라서 이런 경험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은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설명하겠습니다.
예수와 그의 운명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예수 출생에 이미 그 십자가 죽음이 은폐의 방식으로 들어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저는 아주 실질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모든 이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에 떨어졌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영혼의 고통은 더 심각했습니다. 그런 흔적이 구약의 욥에게 있습니다. 욥은 졸지에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었고, 몸도 죽게 될 정도로 병들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이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저 친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주제에 회개하지 않는 뻔뻔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는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욥이 당한 운명보다 더 처참한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을 가장 옳게 이해하고 믿었던 예수, 그의 운명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흑암으로 변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에 떨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도 그런 운명을 당하셨는데, 나라고 그런 운명이 피해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더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의 나락과 같은 운명을 통해서 인류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예수의 운명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부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저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저의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위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위로가 있어서 더 이상 다른 위로는 필요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이런 하나님의 궁극적인 위로 안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절대적이지만, 다른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해도 될까요? 저녁 식사를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두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인당 10만 원짜리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지만 상대와는 별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재래시장에서 파는 5천 원짜리 국밥 자리인데 상대가 함께 있기만 해도 기쁨이 넘치는 사람인 경우입니다. 어느 쪽이 행복할까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아무리 화려한 식사라고 해도 별로입니다. 꽉 막혀 있는 사람과 밥을 먹으면 소화도 잘 안 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존재의 기쁨을 가능하게 하는 상대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위로는 안식이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운명을 통해서 얻는 위로는 바로 제 영혼의 안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혼의 쉼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출생설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는 태어난 지 팔 일만에 다른 유대 남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결의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아기 예수를 안고 감격한 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공동번역, 눅 2:29-32). 시므온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제 평안히 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히 죽을 수 있다는 영적인 태도가 바로 궁극적인 안식입니다. 이것보다 우리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사이비 위로와 안식에 매달려서 삽니다. 힐링 캠프 식의 프로그램들이 난무합니다. 소위 젊은이들의 멘토라고 하는 분들도 이런 흐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식의 감상적이고 값싼 위로에 머뭅니다. 그런 것은 그나마 괜찮은 편입니다. 경쟁을 부추기고, 스펙을 쌓게 하고, 자본의 단맛에 취하게 하는 주장과 유혹도 많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이런 방식의 힐링 이벤트에 매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갈증을 느낀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목이 말라도 바닷물을 마실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이 제공하는 것을 막무가내로 따라가면 오히려 그 증상이 더 심해집니다.
저는 오늘 2015년 성탄절을 맞아 정말 여러분들이 위로와 안식을 경험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좀더 가까이 가라고, 그를 알아보라고, 그를 만나보라고, 그래서 그를 실제로 믿으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의 다른 위로에 목을 매지 않을 겁니다. 이건 나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 사실을 요한복음 기자는 7:37,38절에서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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