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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11: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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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754) 2015.12.14 |
평화를 추구하며 살라 (이사야 11장 6-16절)
< 메시아 왕국의 모습 >
이사야 7-10장에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에 관한 암울한
예언이 나온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11장에서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관한 말씀을 전한다. 메시야가 이 땅에 와서 메시야 왕국이 펼쳐지면 어떤
현상이 생기는가?
1.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
메시아 왕국이 도래하면 모든 피조물들이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6-8절). 그때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면서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이 된다. 상생과 공존은 주님의 꿈이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꿈이었다.
강자와 약자가 서로 어울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늘 그런 세상을 꿈꿔야 한다. 강자의 사명은 약자를 돌보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과 물질과 권세를 거룩한 꿈과 비전을 위해 사용하고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사용하려고 해야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힘이 있고 돈이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둡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 나름이다. 힘을 남용하지
않고 비교적 잘 사용하는 사람도 많다. 성도는 힘을 길러서 비교적 잘 사용함으로 힘 있는 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어주고 소외된 사람들을
품어줄 책임이 있다. 그러면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이 되겠는가?
왜 사람들이 극단주의에 빠지는가? 지나친 피해의식 때문이다.
극단주의자들의 맹목적인 증오와 폭력은 역사 및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극단주의로 치닫는 것은 말세의 징조 중 하나다.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극단주의가 끝나고 극적인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뤄질 평화를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자기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힘써 평화를 만들어가며 살아야 한다.
2. 바른 지식이 충만해진다
메시아가 오시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된다(9절). 참된 믿음은 참된 진리를 바탕으로 한다. 진리란 영원한 지식을 뜻한다. 무속신앙과
기복주의에는 진리가 없기에 지식을 경시하고 정성만 중시한다. 그러나 정성을 드리는 대상이 어떤 분인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
앞에서 정성을 드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다. 알고 믿는 것은 믿음이지만 모르고 믿는
것은 미신이다.
어느 날, 한 대학생이 “오직 성경!”을 도전받고 가진 책을 다 불태웠다. 그 책들이 불타는 장면을 보면서
진리의 수호자 같은 자부심을 느꼈다. 그때부터 성경만 파고들다가 결국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탈레반처럼 책들을 불태워버리면 인생까지 불태워버린
것이다. “오직 성경!”이란 말은 “성경만 읽으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만 읽다가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이단에 빠질 때도 얼마나 많은가?
극단주의는 영혼을 참된 지식에서 멀어지게 한다.
성경적인 믿음을 기초와 표준으로 삼아 더 많이 알려고 하라. 알고 가는 길은
쉽다. 알면 여유가 넘치고 두려움이 줄어든다. 믿을수록 성경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많아져야 한다. 바른 지식을 외면하면 원시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미신에 사로잡히기 쉽고 늘 혼돈과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바른 믿음을 가지려면 바른 지식이 충만해야 한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된다. 그 말은 성령 충만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식이 흔히 생각하는 ‘은사 충만’보다 오히려 ‘지식
충만’이란 뜻이다.
3. 남은 자가 회복된다
이새의 아들인 다윗의 후손으로 오게 될 메시아가 만민들로부터 높임 받는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면 열방이 주님께 돌아오고 주님의 몸 된 교회도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0절). 그때에는 전 세계로 흩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된다(11-12절). 실제로 1948년에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한지 약 2600년 만에, 그리고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지 약 1900년 만에 기적적으로 다시 세워졌다. ‘유대인들의 고토 회복’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암시이고 이제 ‘유대인들의
신앙 회복’만 이뤄지면 종말 역사는 더욱 급속히 전개될 것이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킬 ‘남은 자’를 찾고
있다. 남은 자가 누구인가? 영적인 의미에서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을 뜻한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십자가의 좁은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바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거룩한 바보들이 세상의 희망이고 그들을 통해 세상은 점차 변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요새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염려가 많다. 교인들이 많이 줄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자들이 있다.
숨겨진 좋은 성도들과 목회자들도 많다. 그들을 보면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모른다. 요새 월새기(월간 새벽기도)를 통해 교정기관에서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의 편지를 많이 받는다. 그처럼 여전히 변화의 역사를 멋지게 이뤄내고 새로운 세상의 비전을 키워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남은 자들이
회복되면 앞으로 더욱 멋진 일들이 많이 이뤄질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소수의 남은 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텍사스의 의로운 부자 3명이 의기투합해서 거룩한 말씀사역을 지원했기에 빌리 그래함이란 걸출한 복음전도자가 나올 수
있었다. 오랫동안 성경강해를 준비했던 한 목회자를 한 사람이 은밀하게 재정적으로 지원했기에 <월새기>가 발행되어 수많은 영혼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앞으로도 소수의 인물들에 의해 <월새기 영어판> 발행과 <네트영어>를 비롯한 수많은 일들이 이뤄질
것이다. 그런 인물들을 키워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4.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실 때 큰 길을 준비해서 승리의 개선장군처럼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15-16절). 그 말은 결국 성도는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거룩한 꿈과 비전을 향해 나갈 때 누구나 고통과 시련을 겪는다. 기다림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거룩한 꿈과 비전은 무의미한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들풀은 잠시 몸을 굽히지만 곧 몸을 일으킨다. 십자가의 길은
어리석고 더딘 길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 길이 승리하는 길이다.
세상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진다. 꽃은 피어난 후 곧
시든다. 젊음과 물질과 명예와 권세는 조만간 한 여름 밤의 꿈처럼 허망하게 사라진다. 돈이 좋긴 하지만 돈을 믿었다가 돈에게 배신당한 경험도
얼마나 많은가? 돈을 너무 의지하지 말라. 요새 많은 사람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향해 달리지만 그 꿈을 이뤄도 행복은 잠깐이고 또 다른 욕망이
생긴다.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을 소망으로 삼고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라. 현실이 힘들어도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예수님을 꼭 붙들고 살면서 세상이 잘 흔들지 못하는 사람이 되라. 예수님 안에 있으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 성도의 시련은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된다. 진실과 선은 무기력해 보이고 세상은 거짓과 악의와 추함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진실과 선이 승리한다.
꿈과 비전을 향해 나가면서 용기를 잃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 예수님의 말구유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가면 얼마든지 낙심을 이겨낼 수 있다. 힘과 용기를 내어 절망의 땅에 늘 희망의 씨를 뿌리는 희망 전도사들이 되라. 지금 주변에 마음이 무너져
절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안고 일으키기 위해 힘을 기르고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그 힘을 잘 활용함으로 세상이 살만한 세상임을
보여주는 인물이 되라.
< 평화를 추구하며 살라 >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초림하심으로
온전한 회복의 씨를 뿌리셨다.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온전한 회복의 역사가 이뤄진다. 그러나 지금도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면 놀라운
변화의 역사와 회복의 은총을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변화를 이루어 자기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때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고 평화의 기초석이 될 수 있다.
성공해서 잘 살아도 한 가지 삶이 빠지면 결국 실패한 인생이다. 그 한 가지
삶이란 바로 ‘평화를 낳는 삶’이다. 돈을 벌었으면 그 돈을 평화를 만들기 위해 쓰라. 배웠으면 배우지 못한 사람을 위해 그 배움을 활용하고
권력을 가졌으면 소외된 자를 돌보려고 그 권력을 사용하라. 남과 구별하면서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남을 살펴주면서 평화를 낳는 사람이
되라. 평화를 가져다준 사람만이 결국 역사에 우뚝 남는다. “승리하고 성공했느냐?”보다 “평화를 위해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비판과 판단을 힘써 절제해야 한다. 남의 못된 것이 보이면 얼른 자기 모습부터 살피고 그 못된 것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성찰부터 하라. “나는 저 사람이 싫어!”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저 사람 앞에 설 만큼의 인간인가?”란 질문부터 먼저 하라.
남을 뒤에서 쉽게 비난하면서 자기 영혼의 위기는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남에 대한 판단을 주의하고, 자기 체험으로 많은 사람을
보편적으로 매도하는 편견적인 사고는 더욱 버리라.
사람은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을 보는 눈만 밝을 때가 많다. 이런
서양 속담이 있다. “인간에게는 허물주머니가 두개 있는데 자기 것은 뒤에 있고 남의 것은 앞에 있어서 자기 것은 텅텅 비어 있고 남의 것에만
가득 채운다.” 행복한 성도는 ‘회개’를 잘하고 불행한 성도는 ‘판단’을 잘한다. 판단보다 회개를 잘하는 사람이 되라.
사실 이런
말은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다. 누구도 비판과 험담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 들으면 “나를 겨냥해 하는 말이구나!”라고
받아들이고 스스로 찔려서 기분이 저하될 수도 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라. 사실 비판과 험담에 관한 충고는 100명이면 거의 100명 모두에게
해당되는 충고다. 사람은 영원한 원고도 없고 영원한 피고도 없다. 그래서 부족한 인생끼리 서로 힘써 이해해주며 평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1993년, 미국 시카고에서 한 사람에 의해 유명한 B 성직자의 성적인 스캔들이 폭로되었다. 그 소문은 미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그 성직자의 삶 전체를 완전히 망쳤다. 나중에 그 폭로가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그 성직자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반면에 그 사람은 심한
에이즈로 외롭게 투병하고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의 투병 얘기를 듣고 그 성직자가 그를 만나 진심으로 그에게 축복기도를 해주었다. 그때 그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했고 그 성직자는 미움의 짐을 완전히 털어버릴 수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힘들어도 그 마음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자신을 얽어맨 수많은 짐들, 즉 미움의 짐, 절망의 짐, 근심의 짐, 두려움의 짐, 그리고 죄책감의 짐이 다 덜어질 것이다. 동시에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를 찾게 될 것이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도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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