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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7: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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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7.5.6 춘천 성암감리교회 |
풍족한 가난으로 사는 존재, 어린이
사7:21-22
오늘 저는 어른과 어린이의 합성어로 [어른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미학자(양효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는 어른들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는 우치다 타치루가 ‘어른 없는 사회’에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린이는 누구냐? 아마 과거의 표현대로 ‘순수하다’, ‘착하다’ 뭐 이렇게 표현하면 요즘은 동의하기 조금 어려우실 겁니다. 그러면 미학자의 표현으로 어린이는 뭐냐? 미숙한 게 아니라 예민하고, 어른들의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이다.
어른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규범에 갇혀 사는 외국인이라는 겁니다. 상호간에 슬프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오늘 다시 한 표현을 미학이 아닌 신학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어른이란 많이 가지고도 가난하게 사는 존재고, 어린이는 가난하면서도 풍족하게 사는 존재다. 어떻습니까?
성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온 국토가 르신(아람 왕)의 말발굽에 난도질당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뿐입니다.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사7:2). 장인(스가랴 왕)의 나라 이스라엘은 연이은 쿠데타로 갈가리 찢겨진 채 다마스커스의 국왕 르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나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르신이 주도하는, 아시리아의 침공에 대항하는 동맹에 베가는 적극 참여했습니다. 한데 사위의 나라이자 봉신국이던 유다국이 이 동맹에 참여할 것을 거부하자 베가를 비롯한 동맹국들이 사방에서 유다국을 향해 진군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베가의 군대에 유다국 왕자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 그리고 총리대신 엘가나가 죽임 당했고, 수만 명의 백성이 끌려갔습니다.(역하28:7~8) 동맹에 참여한 나라들은 여기저기서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학살했으며, 여자들을 강간하고,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게다가 궁 안에서는 동맹 참여파에 의한 궁중 쿠데타 시도까지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사방에서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안에서는 국론이 갈라질 대로 갈라졌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서 유다 국왕 아하스는 극단의 선택을 합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왕자를 제물로 바쳐 불에 태운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저 모든 침략자들이 정복을 눈앞에 두고 철군하였습니다.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다. 야훼께서 돌보아주셨다. 왕자님의 죽음을 보고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사력을 다해 성을 방어하던 병사들도 소리칩니다. 만조백관이 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왕도 눈물을 닦으며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그들에게 이 구원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극력 반대했던 예언자 이사야는 죽은 아들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서 구원의 징조를 이야기합니다. “젊은 여자가 아이를 잉태할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사7:14)
이사야의 구원 해석이 왕과 만조백관, 그리고 백성과 다른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이는 이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우유와 꿀’을 먹고 자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7,15) 묘한 뉘앙스의 말이죠. 왕궁 아이의 음식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광야 족속들의 음식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말의 ‘초근목피’하는 처절한 민중의 음식도 아닙니다. 가난한 광야 백성들이 먹는 평범한 식사입니다. 요컨대 그 식사는 ‘풍족한 가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8~25절의 말도 재앙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와 온 국토가 유린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붙잡혀 간다는 것입니다. 한데 그 재앙 한 가운데에, 21~22절의 말, 모두가 몰락한 상황에서 맞는 ‘소박한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한 농부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밖에 기르지 못해도 사람들은 넉넉하게 버터와 꿀을 먹으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풍족한 가난, 그것은 일종의 이미 주어진, 하지만 ‘아직은 유보된 구원’과 같은 것입니다. 적의 군대가 물러갔어도 아직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될 것입니다. 구원은 유보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구원은 도래했습니다. 풍족한 가난으로 말입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겠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며, ‘새로운 전쟁’, 마음의 전쟁 체험이기도 할 겁니다. 해서 전쟁이 끝나기를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애절하게 기도했듯이 여전히 간구하며 견뎌내야 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전후’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전후’, 유보된 구원의 시간에 대해 묘한 구원을 선사하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풍족한 가난]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죽음의 낙인’이 찍혔던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은 “말 한 디에 죽음 하나”라는 참혹한 시어를 썼습니다. 열정을 다해 세계를 숙고하며 인생을 논했던, 가치와 이념과 진리에 대해 깊은 통찰을 얻고자 사력을 다해 살아왔던 이들이 독일 장교가 호명하는 숫자 하나에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수용소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죠.
유다국에 쳐들어온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하루 만에 유대병사 12만 명을 학살하고, 20만 명의 백성을 끌고 갔다는 재앙 묘사(역하28:7~8)가 떠오릅니다. 얼마 후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이스라엘 국의 유민이 대거 남하하여 인구가 급증하였을 때도 유대국의 총 인구가 12만 명 정도에 불과했으니 위의 수치는 터무니없는 과장임에 분명하지만, 이 구절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가 유다국 전 주민에게 죽을 만큼 혹독한 고통을 선사하였다는 얘기에 다름 아닙니다. 즉 말 하나에 죽음 하나, 아니 말 하나에 수십만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재앙 이후를 ‘우유와 꿀’을 먹는 삶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말했듯이 그것은 ‘풍족한 가난’의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가 온통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의 미래는 희망 보다는 불안의 요소가 더 많습니다. 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청년들은 낭인들이 되어 떠돌고 있습니다. 기후 재앙과 전염병의 습격은 인간의 문명을 늘 깔보고 경계를 넘어섭니다. 이런 세계 불안에 대해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어떤 삶을 개인들은 살아야 하나요? 고기 대신 곡물을 기꺼이 먹고, 조금 먹고, 천천히 먹고, 절약하며 먹는 섭생의 태도 즉 가난하지만 풍족하게 사는 어린아이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삶이 곧 재앙인 시대를 현명하게 사는 ‘풍족한 가난’을 향유하는 지혜일 것입니다. 유보된 구원을 ‘일상의 임마누엘’로 실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일상을 넘어, 그러한 지혜를 우리사회가 공유하고 전 지구 시민이 공유하여, 동물과 식물과 돌과 나무와 새, ......, 모든 하느님의 피조물과 공존하고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지구적 임마누엘’의 실현을 향해 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풍요한대도 욕망으로 가난하게 사는 어른의 삶을 버릴 때입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사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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