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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노래 Ⅲ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1 추천 수 0 2018.10.09 22:5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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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50:4-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79426 

jys.jpg종의 노래 Ⅲ

사50:4-9, 창조절 셋째 주일, 2018년 9월16일

 

4.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교회력에 따른 오늘의 제 1독서에는 매우 특별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정확히 알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성경이 가리키는 가장 깊은 신앙의 경지를 맛보게 될 겁니다. 이 본문은 일명 ‘종의 노래’로 불립니다. 하나님의 종이 겪어야 할 운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사야에는 ‘종의 노래’로 불리는 대목이 세 군데입니다. 하나는 사 42:1-4절이고, 두 번째는 사 49:1-6절이며, 오늘 본문이 세 번째입니다. 이 노래들은 바벨론 포로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라는 사실만으로도 종의 노래는 몹시 어려운 시절을 살던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편 중에서 우리가 오늘 설교 본문으로 삼은 세 번째 말씀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보입니다. 길지 않은 구절이라서 오늘은 각각의 구절을 가능한 차례대로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 사람은 곤고한 사람을 말로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그의 주변에는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라는 걸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줄 수는 없어서 대신 말로라도 도와주어야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돕는 일이 바로 목사의 역할이고 교회의 역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일자리로 인해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집값의 폭등으로 상대적인 박탈감에 떨어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문제를 교회가 일일이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 가운데서 도울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와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말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는 겁입니다.


말로 위로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오지 못하면 말도 못합니다. 빈말은 위선이라는 게 곧 드러납니다. 진정성을 담아 위로의 말을 전하려면 우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종의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은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단순히 귀가 있다고 해서 말씀을 알아듣는 게 아닙니다.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잘 알아들으려면 학자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학자들의 태도로 삶을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것 없이 세상 상식과 자기 경험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귀가 열리지 않습니다.


5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 ” 이 사람은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열렸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열어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힘을 경험했습니다. 말씀의 빛이 그에게 왔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대충이 아니라 온전히 의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신탁 경험이 바로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붙들어서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는 확신입니다. 위대한 작곡가나 화가의 경험에 대해서 들어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술적인 경험을 밖에서 주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그게 존재의 빛입니다. 저도 설교를 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런 비슷한 경험을 종종 합니다. 제가 무엇을 궁리해서 짜내면 늘 거기서 거기의 생각밖에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 평소에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깨우침과 발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서 나온 게 아니라 밖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종의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의 경험이 바로 그런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내가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가지도 않겠다.’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6절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사람은 지금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등을 채찍이나 몽둥이로 때립니다. 그의 수염을 뽑고, 침을 뱉습니다. 요즘도 이슬람권의 어느 지역에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어떤 여자가 잘못했을 경우에 마을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회초리로 때립니다. 남자의 경우에는 훨씬 굵은 몽동이 찜질을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이런 방식으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고문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방식이 미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방식으로 대중들의 분노를 해소시키고 억제했다는 점에서는 나름으로 의미가 있긴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이 공개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더 큰 고통은 모욕감입니다. 종의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은 고대 유대 사회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실행되던 공개 모욕을 당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모욕을 모욕으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때리는 사람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하시오.’라는 심정으로 뺨을 맡겼고, 사람들이 침을 뱉어도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뻔뻔스러운 것일까요? 아니면 대담한 것일까요? 그가 무슨 힘으로 이런 상황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요? 구약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 떨어진 인물들이 제법 됩니다. 그중에 대표는 욥입니다. 동방의 의인으로 인정받던 욥은 졸지에 손가락질 받는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몸마저 악성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회개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끝까지 버팁니다. 당시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신앙관에 맞선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답은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저는 이 사람의 상황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신앙적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게 ‘나의 문제’로 와 닿지 않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모욕을 당하는 중입니다. 그런 모욕을 당할 정도로 잘못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억울하게 모욕을 당합니다. 근본적인 깊이에서 보면 현대 사회도 모욕을 받느냐, 모욕을 주느냐 하는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서울의 어느 지역에는 장애인 학교 설립으로 인해서 수년 동안 비인간적인 행태들이 반복되었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장애인 학교 설립으로 인해서 집값이 떨어지니까 반대하는 겁니다. 일종의 님비 현상입니다. 공해 시설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화장터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유곽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장애인 부모들은 무릎 꿇고 하소연했습니다. 모욕을 당한 겁니다. 요즘은 가난하면 모욕을 당합니다. 모욕당하더라도 자신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으면 되겠지만, 그게 어디 쉽습니까? 최선은 모욕과 혐오가 없는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함께 진보하는 겁니다. 이렇게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지금의 우리 자식이나 그 후손들이 언젠가 모욕당하는 신세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가장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가난하기에 자식들 교육을 못 시키거나 병 치료를 못 받거나 일정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는 일들은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7절에서 우리는 ‘종의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이 무슨 힘으로 모욕적인 상황을 버텨냈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비슷한 내용이 9절에도 나옵니다. 답은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돕는다.’입니다. 우리가 흔히 들었던 문장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막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런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더 강할 겁니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인생을 살면 충분하지 하나님의 도우심까지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자신의 인생은 술술 잘 풀린다고 주장하는 기존의 잘못된 기독교 신앙에 반발하는 겁니다. 미신적이고 광신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거지요. 무슨 뜻인지 알겠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은 요행수를 기다린다는 게 아닙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어려운 일들이 말끔하게 해결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돈 몇 푼 받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심부름센터 소장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는 표현 역시 실제로 모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게 될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종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분류되는 일련의 노래 중에서 마지막 노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모욕과 수치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무슨 일로 이런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지는 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당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신세입니다. 바벨론 제국이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해서 요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요구를 따르면 비록 포로생활이라고 하더라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벨론 제국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미운털이 박혔습니다. 그러다가 억울한 일로 바벨론 당국에 체포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모욕과 수치의 운명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그걸 벗어나는 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모욕과 수치스러운 상황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신을 돕는다고 그는 노래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돕는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있어서 그는 이 상황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사람에게는 모욕과 수치가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지금 제가 설교자로서 본문에 나오는 사람의 입장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 사람처럼 살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처지와 마음과 믿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저도 그런 신앙의 경지에 이르기 바랄 뿐입니다. 모욕과 수치마저 구원의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 말입니다. 가난과 고독마저 구원의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럴 때 존재의 용기, 신앙의 용기가 가능하겠지요. 지금 설교를 듣는 여러분도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더 선포합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서로 통하는 의미입니다. 이게 리얼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 공허하게 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리얼하게 느끼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삽니다. 조금 다른 관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의 삶입니다. 부모 없이 시설에서 사는 아이들과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의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의에 근거해서 자신과 다툴 자는 누구냐, 나의 대적인 누구냐, 나서 봐라, 하고 큰소리를 칩니다. 9(후)절에도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나?’라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만 보면 잘난척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진리의 법정에서 떳떳하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도 이 사람과 같은 심정으로 롬 8:31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자신의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믿음입니다. 마틴 루터는 1521년 3,4월에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 호출당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대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기에 저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또한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저에게 안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게 실제로는 더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는 멀리 느껴지고 사람으로부터의 의는 실질적인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주로 젊은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나타납니다. 아직 삶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기에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그 시절에는 그런 열정으로 당연히 살아야 합니다.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일에 몰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조금씩 변할 겁니다. 어떻게 변할까요? 궁극적인 운명 앞에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고독사를 끔찍한 불행으로 여겨서 사람들을 곁으로 끌어들이지만, 옆에 정다운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 고독사입니다. 나이가 들면 가능한대로 모든 것들로부터 미리 멀어지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의 시력도 나빠지고, 근력도 약해지고, 기억력도 떨어지는 겁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유일한 취미생활인 테니스를 언제까지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나를 의롭게, 즉 궁극적인 평화로운 삶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테니스 라켓을 손에서 놓을 준비를 늘 하고 있습니다.


‘종의 노래’는 지금 여기서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런 노래를 부른 이 사람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일종의 모욕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자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금부터 종의 노래를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생명 충만한 인생을 실제로 살아가려면 ‘종의 노래’가 가리키는 신앙의 깊이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종의 노래’를 실제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신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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