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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암7: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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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1.15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운동하는 신앙인이 되라
암7:10-17
지난 해 가을인가, 여러분들더러 부탁 아닌 부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좀 해 주세요.”라고 말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에 있는 장로 기도회에서 권장로님이 제게 말씀 하시기를, “설교 본문으로 구약을 좀 택해 주세요.”하시는 거였습니다. 뭐 그러자고는 말씀을 드렸지만, 연말과 연초가 있다 보니까 본문 설교보다는 ‘제목 설교’를 하게 되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주 가 될지는 모르지만, 구약을 본문으로 삼아 세상과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게 아모스서입니다.
아모스는 예언자이고, 아모스서는 이 아모스의 신탁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신 것처럼 아모스서는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설교에도 중요하게 등장하지 못합니다. 분량도 적을 뿐만 아니라 성서의 다른 곳에도 인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모스서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정말 별 볼 일 없는 책일까요? 어떨 거 같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오늘 설교의 향방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아모스서를 요긴하게 취급하지 않지만 신학적으로는 다른 그 어떤 책을 압도하는 중요한 성서중에 하나입니다. 아모스서가 성서의 다른 어떤 예언서와 다른 것은 ‘사회 비판이 그 어떤 예언자보다 날카롭고 격렬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아모스야 말로 지성인의 사회적인 책무와, 신앙인으로서의 역사적인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아모스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솔로몬 왕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후의 사람입니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왕국의 일개 목장 주인이었습니다. 이게 기원전 8세기경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예언자가 됩니다. 그가 예언 활동을 벌인 곳은 당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일대의 최강국으로 부상하던 북 왕국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그런데 북 왕국은 그 당시 고성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통치자는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이를테면 북 왕국은, 여로보암 왕은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 있던 이스라엘의 정치권을 향해 아모스는 쓴 소리를 내 뱉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의 외침을 간단히 말하면, 당시의 정치는 국민 대다수는 생각지 않고 무조건 성장주의 정책을 폄으로 정의를 팔아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경제를 부흥시켜서 나라를 잘 살게 하겠다’는 번영철학의 정치권을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국민은 더욱더 나빠진 사회 구조 속에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지만 이 예언은 서기전 7백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아모스서입니다.
그러면 아모스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쏟아 놓으면 세상의 사람들, 경제부흥의 맛을 보고 있거나 권력자들의 정책을 믿고 그대로 받아들이던 지식인들이거나 신앙인들은 아모스를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모스를 격렬하게 비난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똘똘 마음을 뭉쳐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보암을 중심으로 그가 하는 정치 경제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모스는 나라를 혼란케 하는 반역자, 국가를 뒤집어엎으려는 불순한 반동분자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종교 정치 기득권층이 의기투합해서 국가 모반 혐의, 체제 안보를 위협하는 자, 거짓 예언자라는 죄목을 씌워 감옥에 쳐 넣습니다. 그 대표적인 지식인이 아마지야라는 또 다른 예언자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찬기도회 같은데 나가는 이름난 목사 정도이죠. 그는 왕실에서 왕을 위해서만 예언을 하는 직업 예언자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정치권력에 아부하는 변질된 신앙지도자 노릇을 하던 자인 것입니다. 7:12를 이하를 보세요.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마지아의 신앙관은 ‘조국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호국 불교’ 또는 ‘호국 기독교’와 같은 호국신앙인 셈입니다.
그러면 아모스의 주장은 뭐였을까요? 여로보암의 이런 경제성장 일변도의 정책 때문에 대중의 빈곤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걸 보았던 것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재물을 위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질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율이 살아 있는데도, 종교는 그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그 방향성을 두지 않고 국가의 번영이라는 이데올로기로만 종교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서를 ‘복’이라는 욕망 이데올로기에 몰입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아모스서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인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모스 같은 신앙적인 지성인의 증언과고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나 목사가 늘 달콤한 말이나 늘어놓거나주고 받는 ‘값싼’복음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장17절의 아모스는 뭐라고 소리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라는 정치인에 의해서 잘 살게는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정의를 잃어버렸다는 게 아모스의 판단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을 그대로 정치권력과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쏟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모스서가 목회학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목회를 하는 이들이 성장주의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지만, 신학사에선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모스서를 읽는 뜻은 무엇일까요? 서기전 7세기의 책이 성서의 한 자리를 아직도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정치권력의 비판자가 되라는 것입니까? 요즘말로 치면 좌파나 종북주의자 또는 정부를 비난하는 야당이 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들, 아모스라는 한 사람의 생애와 신앙 방식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더 이상은 피동적인 수혜자로서의 신앙생활을 벗고 능동적인 해석자, 운동하는 신앙인, ‘변혁의 지성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힘을 교회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와 크리스챤들이 기복의 울타리를 박차고 뛰어나와 세상의 변혁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장주의나 번영주의의 이기주의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을 벗어던지고 세계를 해석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는 신앙인으로의 전개된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다음과 같은 축복의 삶, 축복의 존재들이 될 수 있습니다. 아모스를 통해서 듣는다면 9:11-15절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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