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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암8: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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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433) |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길
(아모스 8장 1-14절)
<성공이 다가 아닙니다 >
재작년에 방영된 <추적자>란 드라마는 재벌의 딸이 경찰의 딸을 교통사고로 치어죽이면서 벌어지는 돈과 권력의 속성을 잘 그린 드라마입니다. 그 드라마에서 재벌 서회장과 재벌가 사위인 강동윤은 돈의 힘을 제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마차가 먼 길 가다 보면 깔려 죽는 벌레도 있기 마련이라고 하면서 약자의 희생과 눈물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돈과 권력을 좇지만 경찰 백홍석의 폭로 기자회견으로 대통령 후보 강동윤의 몰락이 예견되자 재벌 서회장이 조롱합니다. “아이고! 결국 황소가 모기한테 물려죽겠네.” 그러면서 어렸을 때 얘기를 했습니다. 서 회장이 어렸을 때 명절 때마다 동네에서 소싸움을 했는데 거기서 자기보다 2배나 큰 소를 넙죽넙죽 몇 년을 내리 이긴 황소가 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던 모기한테 물려죽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사고나 사건이나 사람에 의해 권력자와 재벌이 무너지고 공든 탑이 무너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해야 하고 하찮은 사람의 상처와 눈물을 조롱하지 말고 돈과 권력을 위해 영혼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을 희생시키고 얻은 돈과 권력은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는 부메랑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겪은 군대폭력을 반면교사로 삼아 “나는 후임병사에게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군대폭력 근절에 앞장섭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자기가 겪은 군대폭력을 그대로 답습해 후임병사를 괴롭힙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서러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와 함께 해줍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가난이 한이 되어 돈과 권력을 집요하게 추구합니다. 어려움을 반면교사로 삼고 누군가를 도우면 행복을 얻지만 어려움에 한이 맺혀 성공을 추구하면 성공하기도 어렵고 성공해도 허무한 인생이 됩니다.
사람이 뭔가를 간절히 갖고 싶을 땐 진짜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에게 없으니까 가지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그것을 가지면 “내가 이걸 왜 이리 가지고 싶어 했나?” 하고 허탈해합니다.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주는 것’을 추구하는 삶과 ‘없어서 그저 가지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삶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를 가지면 가진 후에 회한이 없지만 후자를 가지면 가진 후에 회한이 많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에 대한 환상이 있지만 돈이 많은 사람은 돈에 대한 환상이 없습니다. 인생 승부는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서글픈 일 중의 하나는 인생은 성공 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 계속되는 인생에서 여전히 아픔과 상처와 문제는 복병처럼 수시로 달려듭니다. 성공이 다가 아닙니다.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성공해도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보람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남을 돕고 어려운 자의 배경이 되어주려고 성공하겠다는 가치관과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성공을 추구하되 남의 실패를 담보로 하는 성공은 가급적 최대한 피하십시오. 내 꿈을 이루는 것이 남의 꿈을 잃게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이룬 꿈이 어떻게 만족과 보람과 기쁨을 주겠습니까? 영혼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성취나 물질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외면하며 살면 성공해도 여전히 배고프고 외롭고 공허하게 됩니다.
강동윤의 아버지는 가난한 이발사였습니다. 이발소 사장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었지만 자기 아버지 앞에서는 늘 당당했습니다. 반대로 정상인인 자기 아버지는 장애인인 이발소 사장에게 무릎을 꿇고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장애라면 가난은 가장 큰 장애다. 나는 이 가난을 떨치고 부자가 되겠다.” 그런 왜곡된 가치관으로 돈과 권력을 집요하게 추구한 것입니다.
그 강동윤은 우리 사회가 낳은 괴물입니다. 사회가 없는 자를 너무 멸시하니까 가난이 한이 되어 그 멸시를 벗어나려고 독해진 수많은 강동윤이 생겨난 것입니다. 강동윤을 괴물로 만든 것은 ‘배려하고 섬기는 삶’보다 ‘경쟁해서 이기는 삶’이 성공이라고 여기는 현행 입시 시스템과 같은 수많은 잘못된 시스템과 가치관들입니다. 약자와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양심을 배반하는 것이고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부릅니다. 본문 말씀은 그 사실을 잘 교훈합니다.
< 착취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 >
본문에는 아모스가 본 넷째 환상인 ‘여름 과일 한 광주리 환상’이 나옵니다. ‘여름 과일 한 광주리’는 익은 과일을 수확해 가득 채운 광주리를 뜻하는데 그 환상은 이스라엘의 죄가 무르익어 이방인에게 사로잡힐 심판의 때가 임박했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그 환상을 보여주신 후 말씀했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2절).”
그 하나님의 심판으로 궁전의 즐거운 노래가 슬픈 노래로 변하고 곳곳에 수많은 시체가 널려있어서 사람들이 기막힌 심정으로 할 말을 잃고 그 시체들을 치울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3절). 왜 그런 비참한 패망이 예고됩니까? 부자들이 나눌 줄 모르고 오히려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를 삼켰기 때문입니다(4절).
그런 경제적인 착취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첫째, 그들은 예배를 소홀히 했습니다. 본문 5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당시에 매달 첫 날인 월삭 때는 전제와 번제와 소제를 드렸고(민 28:11-15) 율법의 명령은 아니지만 관습적으로 매매를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착취자들은 월삭과 안식일이 빨리 지나서 곡식과 밀을 팔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예배를 소홀히 하고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거짓 저울로 속였습니다. 본문 5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착취자들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고 부피를 재는 단위인 에바는 작게 하고 무게를 재는 단위인 세겔은 크게 한 거짓 저울로 속였습니다. 고대에 저울을 속이는 행위는 가장 흔한 사기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사회정의 회복운동을 할 때는 저울을 속이는 행위부터 먼저 바로잡았습니다.
셋째, 그들은 인권유린을 자행했습니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면서 싼 값에 사람을 노예로 삼았고 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찌꺼기 밀과 같은 음식을 팔면서 사람의 건강과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6절). 세상에서 가장 나쁜 행위 중의 하나는 먹는 것으로 장난쳐서 돈을 벌려는 행위입니다. 그런 착취행위를 하나님은 맹세코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7절). 결국 어떤 심판이 임합니까?
첫째, 지진과 화산폭발 등과 같은 자연재해가 임할 것입니다(8-9절). 극심한 자연재해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눈물이 원인이 되어 임할 때가 많습니다. 둘째,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머리를 밀어 대머리로 만들 정도로 극심한 고통과 슬픔이 주어질 것입니다(10절). 셋째,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에 처해서 사람들이 여기저기 말씀을 찾으러 다니지만 말씀을 얻지 못하고(12절), 믿음의 후대가 끊기고(13절),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헛된 우상에게 복을 빌고 헛된 맹세를 함으로 더욱 철저히 패망할 것입니다(14절).
<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길 >
지금 상황은 아모스 때의 시대상황과 유사합니다. 치열한 경쟁시대에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의 설 땅이 점차 없어지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문 앞에 이른 상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되돌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본문은 뚜렷하게 2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 힘없는 자를 살펴주십시오
일전에 한 가장이 집세 문제로 비관 끝에 연탄불을 피우고 가족 3명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자살은 인간적으로는 이해되는 측면이 있을지라도 자세히 보면 가장 용서될 수 없는 최악의 행위입니다. 자살은 인생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주인은 자기라는 절대교만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동반자살은 어린 자녀가 불행하게 살 것이 염려된다는 미명 하에 자녀 생명까지 마음대로 취하는 최악의 살인행위입니다.
“죽어버리자!”는 마음을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한 끝만 바꾸면 절대절망은 절대희망으로 바뀝니다. 결국 마음만 달리 먹으면 행복의 기회와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에 동반자살의 일차 책임은 그 가장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이차 책임은 있습니다. 즉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 희망의 씨앗을 뿌려줌으로 삶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님을 알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외면하면 언젠가 하나님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근검절약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외식을 덜하면 소시민 식당주인들은 절망합니다. 택시 한 번 덜 타면 가뜩이나 어려운 택시기사들은 우울한 마음으로 귀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유가 있으면 나누려는 마음을 가지고 적절하고 지혜로운 소비를 해야 합니다. 불황 때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불황 때가 되면 여유가 있는 사람은 4주에 한번 구두 닦는 것을 3주에 한번 닦아서 구두 닦는 분에게 희망을 나눠주고 5주에 한번 이발하는 것을 4주에 한번 이발해서 이발하는 분에게 희망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다만 여유가 있다고 사치하고 낭비하면 안 됩니다. 사치와 낭비는 가난한 사람들의 상처에 불을 붙이고 가난한 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의 눈물을 닦아줄 때 주어지는 ‘기쁨이 넘치는 삶’은 행복을 예고하지만 사치하고 과시하며 살 때 주어지는 ‘기분이 째지는 삶’은 불행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은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의 눈물을 의인의 눈물 병에 담아주셨다가 최상의 천국 보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시 56:8).
어려운 사람을 이해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돕는 일은 결국 자신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경쟁’의 가치관이 아닌 ‘공존’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십시오. 서로 긍휼히 여기며 돕는 삶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두신 목적이고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야 내가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최대한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랑의 전령자가 되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동물 세계에서는 힘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려운 사람을 돌보려는 측은지심과 힘이 없는 사람을 앞세우려는 사양지심을 가지고 약자를 돌보고 배려하고 도와야 합니다. 좋은 사회란 경쟁에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이 꿈을 품고 살도록 배려하는 사회입니다. 반면에 악한 사회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격자를 숭배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정치인들이 일본을 망국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약자나 패배자를 혐오하고 강자와 승리자를 선망합니다. 그래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를 위해 뛰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소리칩니다. 현대인의 우상은 출세입니다. 출세하려고 이웃의 고통과 신음을 외면하고 강하게 밀어붙이고 야박하게 행동하면 강자 독식의 사회가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을 그냥 두고 보시지 않고 무서운 진노를 내립니다. 그러므로 “힘없는 자를 멸시하면 무서운 진노가 임한다.”는 아모스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지 ‘남에게 주신 말씀’으로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바리새인만큼 사회적인 바리새인을 싫어하십니다.
사회적인 바리새인은 본문 말씀을 강자와 부자에게 들이대며 “자 봐라! 힘없는 자를 멸시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위협합니다. 물론 부자와 강자가 아모스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 말씀은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자신이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즉 본문 말씀은 자신이 힘이 없고 부자가 아니어도 마음의 강자나 마음의 부자로서 힘없는 자를 최대한 돌보라고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에 나서야 나눔과 섬김의 영성이 확산되면서 사회는 점차 변하게 됩니다.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지 않고 남에게 들이대는 말씀으로 삼는 이단 사회운동가처럼 되지 마십시오. 종교적인 이원론도 큰 문제지만 사회적인 이원론도 큰 문제입니다. 부자를 무조건 악하게 보는 사회적인 이원론은 진리와 정의의 음성을 가지고 사회문제를 질타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사회갈등을 키울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들이대기 전에 먼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을 통해 사회는 점차 좋은 방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2. 말씀대로 살려고 하십시오
아모스는 사회적 부정의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문 앞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을 말씀의 기갈로 여겼습니다. 결국 사회적인 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선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삶이 힘들고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마다 가장 먼저 찾아서 봐야 할 인생지도입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불안과 피곤이 떠나지 않지만 말씀에 마음의 닻을 내리면 늘 평안과 활력이 솟습니다.
기도도 말씀 안에서 기도할 때 능력 있는 기도가 됩니다. 지난 20세기에는 “기도는 응답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축복신학이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큰 의미에서 “기도는 응답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언이 영혼을 시험과 부작용과 허무주의에 빠뜨리는 잘못된 기복신앙이 되지 않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안에서 기도는 응답이다.”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적인 기도에 대한 개념이 왜곡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했습니다(요 15:7). 축복신학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룬다.”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상 더욱 중요한 말씀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조건절 말씀입니다. 즉 말씀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새벽기도회 때 말씀이 끝나고 5시 40분쯤에 슬쩍 와서 기도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 싫다! 기도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지금은 사무엘 시대처럼 말씀이 희귀해진 시대입니다. 현대의 물질주의 때문에 말씀이 희귀해진 측면도 있지만 현대의 축복신학과 번영신학도 말씀을 희귀하게 만드는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도 말씀을 희귀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을 여러 번 읽어도 말씀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삶으로 번역되어 나타나지 못한 말씀은 내면에 쌓이다가 ‘교만과 편견’의 독으로 바뀔 수 있기에 말씀의 성육신 과정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려고 하십시오. 특히 가난한 자의 신음소리에 귀를 잘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와 양심을 통해 말씀하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통해서도 말씀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말씀을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음소리에 주파수를 맞춰 자신을 힘써 조율하면 그때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으면 차를 세우고 지도를 봅니다. 그처럼 인생의 길이 잘 보이지 않으면 무엇보다 먼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어둠이 제일 문제입니다. 그 어둠은 말씀을 들을 때 힘을 잃습니다. 밝음은 배움 이전에 들음으로 생깁니다. 말씀과 만나면 삶 자체가 감사하고 비전 동지가 소중하게 여겨지고 범사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결국 말씀과 만나면 참 사람과 산 사람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그 말씀이 가난한 자의 신음소리로도 들린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마십시오.
< 말씀을 힘써 나눠주십시오 >
옛날에 어렸을 때 가짜 총으로 총싸움을 하면 입으로 “빵! 빵!” 했습니다. 어떤 분은 너무 빵을 먹고 싶어서 총소리 흉내도 “빵! 빵!”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만큼 빵 문제가 중요합니다. 빵은 총보다 강합니다. 소련이 엄청난 군사력을 가지고도 무너진 것은 결국 빵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빵 문제보다 더욱 큰 문제는 영적인 빵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빵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더욱 불행한 영적인 빵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은 아모스 때보다 더 말씀의 기갈이 심한 때입니다. 아모스 때는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말씀을 듣지 않는 기갈’이 문제입니다. 그런 시대 흐름을 역류해서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면 다시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되고 회복과 축복의 문도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문이 열리면 항상 그 문을 통해 이웃의 신음소리에 응답하는 나눔의 현장으로 조용히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그 축복이 진짜 축복이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거룩한 큰손의 꿈을 품고 최상의 나눔을 결단하십시오. 나눌 때는 은밀하게 물질도 잘 나눠야 하지만 소리 나지 않게 말씀도 잘 나눠주려고 하십시오. 축복은 대개 말씀과 함께 선물로 주어집니다. 결국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축복을 얻는 최상의 길이고 더 나아가서 누군가 말씀을 가까이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보람을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새 <월새기(월간 새벽기도)>를 발행하면서 얼마나 기쁨과 보람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주일학교 교사에게 친구가 유혹했습니다. “스티븐! 주일도 일하는 장사인데 이 장사를 하면 10년 내에 5만 불은 벌 수 있어.” 당시 5만 불은 엄청난 돈이었지만 스티븐이 대답했습니다. “고맙지만 나는 주일학교 봉사를 포기할 수 없네.” 결국 둘은 다른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10년 후 우연히 둘이 만났습니다. 그때 친구가 말했습니다. “스티븐! 내가 마침내 5만 불을 벌었네.” 그러자 당시에 큰 침례교회 주일학교 교장으로 있던 스티븐이 말했습니다. “잘했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말씀으로 키운 아이들이 약 5만 명은 될 거야.” 저축통 장에 모은 5만 불의 가치와 말씀으로 키운 5만 명의 가치가 어떻게 비교되겠습니까?
얼마 전에 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 이번에 저희 교회를 건축하는데 약 100억이 들었어요.” 그분에게는 어렵게 교회를 건축한 것이 아주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재정이라면 한국의 거의 모든 고등학생 이상의 학생들과 군인들에게 10년 동안 매달 무상으로 월새기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전자도 자랑스럽겠지만 저는 후자의 자랑을 선택할 것입니다.
요새 대학생의 크리스천 비율이 통계적으로는 3-4% 정도지만 실제로는 1%도 안 된다고 합니다. 교회 잘 다니는 청년이 천연기념물처럼 되어가는 현실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고 말씀을 떠나고 있습니다. 요즘 군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총기사건과 학대사건도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입니다. 이때 젊은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과 나눔과 배려를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월새기 글에는 사랑과 나눔과 배려의 사상이 짙게 깔려 있기에 학생과 군인에게 월새기가 많이 보급되면 큰 영혼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아직은 여력이 없어 월새기 보급을 교정기관부터 작게 시작했지만 앞으로 학생과 군인에게 월새기가 <사랑나눔 기증>을 통해 많이 보급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말씀을 통해 예민한 영적 청각을 얻어서 누군가의 신음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나눔의 삶을 결단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처럼 약자를 살피고 말씀을 나누는데 힘씀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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