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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암7: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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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아모스 7장:1절-17절/작성자:주께하듯하라!
찬송가 337장(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절부터 9절까지로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모스에게 보여주신 3가지 환상에 관한 내용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10절부터 17절까지로 아모스의 사역을 방해하는 한 인물의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3가지 환상 중 첫 번째는 메뚜기 떼 환상입니다. 본문 1절 후반절에서 본문 2절 전반절입니다.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메뚜기 떼 환상과 관련, 일부 학자들은 이 환상을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의 침략으로 인한 북이스라엘의 위기 상황으로 봅니다. 또 일련의 학자들은 이 환상을 문자 그대로 메뚜기 떼 재앙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떤 부분으로 해석하든 명백한 것은 하나님의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계획이 임박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알게 된 아모스의 행동입니다 본문 2절 후반절입니다.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북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 계획을 인지하게 된 아모스는 하나님께 심판 철회 요청을 드립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본문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아모스의 간절한 요청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즉각적인 심판을 유보해 주십니다.
3가지 환상 중 두 번째는 불 환상입니다. 본문 4절 후반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첫 번째 메뚜기 재앙과 마찬가지로 이 불 재앙은 외부세력의 북이스라엘 침략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가뭄 속 실제 일어나는 불과 관련된 재해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일하게 이 재앙은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 계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게 된 아모스의 행동과 하나님의 반응이 본문 5절과 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첫 번째 재앙 환상과 동일하게 아모스는 하나님께 북이스라엘을 용서해 달라는 탄원요청을 드리게 되고, 하나님은 아모스의 요청을 수락하사 심판을 늦춰주십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모스는 하나님께 심판계획을 철회하며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감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비록 남유다 사람이었던 자신이었지만 북이스라엘을 향한 애끓는 마음이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라를 향한 사랑, 민족을 향한 애꿇음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들이 죄악 된 길, 어그러진 길로 가고 있을 지라도 말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모세입니다. 거듭 하나님을 불신하며 불순종하는 죄악을 범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시고 모세를 중심으로 큰 나라를 이루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출 32:10).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그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청하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게 됩니다(출 32:14).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패역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야기하며 ‘동족을 위하는 일이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다’고 고백합니다(롬 9:3). 모세와 바울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아모스, 믿음 안에서 마땅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할 나라사랑과 민족애의 전형을 보여주는 신앙의 위인들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 기독교는 점차 개인주의화, 개교회주의화 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한국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인의 구원에 대한 부분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라와 민족을 걱정했습니다. 국가와 겨레를 향한 애절함이 신앙 안에 녹아 있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명중 과반수 이상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아울러 독립운동을 위한 중추역할을 했던 중심인물들 중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 신앙을 나라와 민족을 향한 마음으로 증폭시켜나간 것입니다.
오늘 아모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마음 속 깊이 새겨야할 첫 번째 신앙교훈은 그리스도인 우리는 나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가 두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 내 혈육인 이 민족이 영적으로 각성하여 다시금 하나님 앞에 바로 서 나갈 수 있도록 중보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의 환상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에게 세 번째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5절에서 7절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다림줄’은 건물이나 성벽을 쌓을 때에 건축물이 수직과 수평을 잘 이루는지를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다림줄을 들고 성벽 곁에 계신 모습은 성(城)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터전, 곧 그들을 삶을 헤아려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반듯하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어그러지고 치우진 삶으로 치닫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전례 없던 풍요를 누리던 북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은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들을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인 심판대신 기다려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아모스의 간절한 간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도 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탐닉 속에 우상숭배의 죄악은 더욱 심화되어 갔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좌시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결국 회개하지 않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 속에 구체화되고, 여로보암 2세를 통해 전성기를 구가했던 북이스라엘은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황폐와 파괴.. 하나님의 말씀처럼 북이스라엘은 결국 패망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야 맙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허물 많고 죄 덩어리인 인간을 기다리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성품을 직접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4절입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하나님은 정직하시고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성품을 가지고 계신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 참아주시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지만 죄악이 도를 넘게 되면 그냥 수수방관하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참아주실 때 속히 회개하며 죄악된 길로부터 돌이켜야합니다. 심판은 유보해주시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공의 행하심은 결코 철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되는 두 번째 신앙교훈은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려주실 때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으로 즉각 회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단락 10절부터 17절까지는 아모스의 사역을 방해하는 한 인물의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는 바로 벧엘의 대제사장인 아마샤였습니다. 아모스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때, 그는 정면으로 아모스를 공격했던 인물입니다. 아마샤는 아모스를 가리켜 말로만 ‘선견자’라고 할 뿐 유다 땅으로 도망가 거기에서 떡이나 먹으며 살라고 비아냥거립니다(12절).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며 그를 위협하기도 합니다(13절).
그런 그를 향한 아모스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본문 14절 후반절부터 16잘 전반절입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자신을 가리켜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라 칭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던 아모스였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행함에 있어서는 단호하며, 한 치의 주저함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라 하셨으니 말씀을 선포하는 것뿐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을 들으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 벧엘의 대제사장에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아모스는 무식했기 때문에 용감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해야 할 말을 했던 것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물론 한국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세상과 세상 사람들 앞에 주눅 들어 사는 것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우리 삶의 백그라운드(background: 배경)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믿는 만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그 하나님을 배경삼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헤쳐 나갈 이 한 날, 만나게 될 사람들, 딛고 살아야할 삶의 터전이 두려우십니까? 우리 삶의 백그라운가 되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의 부재로 인함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세상을 향한 우리 신앙의 담력은 강화되어져 갑니다.
사랑하는 가족여러분!
이 아침, 반목과 질시, 대립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의 회복과 치유, 더 나아가 영적각성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 주님 앞에서 돌이켜야할 내 삶의 영역은 없는지 성찰해보시는 시간되시기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세상과 환경,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내 삶에 잔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 삶의 백그라운드 되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의 부재임을 기억하시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를 통해 오늘부터라도 말씀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 신앙의 담력을 회복하시는 은총을 경험하시며,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시는 이 한 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 기도>
주님! 반목과 질시 속에 대립하며 분열되고 있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저희의 기도무릎을 통해 이 땅과 이 나라에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손길이 임하는 은총을 목도하게 하옵소서!
주님!
이 아침 저희 삶의 영역을 차분히 성찰하게 하사
주님께로 돌이키는 결단이 있게 하옵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열망 속에
신앙의 담력이 강화되는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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