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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암5:2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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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09098993 |
2010년 7월 1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아모스 5장 21절~24절
설교제목 : 삶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신문 칼럼 이야기>
며칠 전 읽은 신문칼럼이 기억에 남습니다. 먼저 그 칼럼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서양사에는 이중주의(dualism)라는 개념이 있다.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매슈 아널드가 정립한 것으로, 서양 역사를 지탱해 온 두 개의 정신적 기둥을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헤브라이즘에서는 ‘정의’의 가치가, 헬레니즘에서는 ‘자유로운 탐구’의 가치가 각각 구현됐다고 본다. 구약성서에서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친 사람들을 우리는 예언자라고 부른다.
종교에 관심 없는 사람도 구약의 예언자라고 하면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이름을 떠올린다. 실제로 이들은 헤브라이즘의 대표 예언자다. 하지만 그들보다 대선배 격인 아모스라는 사람이 기원전 760년께 활동하면서 히브리 종교의 윤리적 성격을 분명히 했고, 이 때문에 그는 ‘정의의 예언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2800년 전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상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느낌은 착잡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자에게 다니는 등 성도덕이 붕괴됐고, 상인들은 도량형을 속여 치부했다. 특히 재판관으로 대표되는 권력 가진 자들의 횡포가 막심해서, 뇌물을 받고 결백한 자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가난한 자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렸다. 요즘 식으로 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그 대가로 주지육림에 탐닉할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방탕과 사치에 빠졌던 그들도 종교 의식에 관한 한 비상한 열정으로 엄수했다는 점이다. 매일 아침마다 희생 제물을 바치는가 하면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쳤다. 종교적 형식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들은 종교를 외적 형식과 동일시했다. 각종 의식을 풍성하게 거행함으로써 신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이 제물·순례·찬송·십일조 등 형식과 의식만을 원할 뿐, 그 이외의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신은 도덕적 타락에는 무관심하며, 일상적 의식과 종교적 형식만 제때 실행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아모스는 당대의 주류 종교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신은 아무리 의식을 실행해도 감동하지 않는다. 아니, 감동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의식은 그 자체가 범죄 행위였다. 신은 순례자를 미워하고 절기를 경멸하며, 제물을 받지 않고 찬송도 듣지 않는다. 아모스는 심지어 신이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샅샅이 찾아내 모조리 살육하고 말 것이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는다. 종교 의식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말이다. 아모스가 지배계층에 요구한 것은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의식은 다 쓸데없으니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구약 종교를 지탱하는 두 집단은 제사장과 예언자였다. 제사장이 친(親)체제적이었다면 예언자는 체제 비판적이었다. 이 점은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다. 가톨릭이 제사장 종교에 가까운 편이었다면 종교 기득권에 항의했다는 뜻에서 ‘항의하는 자’ 즉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얻은 개신교는 예언자 종교에 가까웠다. 그런데 요즘은 정반대다. 가톨릭이 전향적·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반면 개신교는 보수적·폐쇄적 입장으로 후퇴하고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예언 정신의 실종에 있다.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세상에 나온 지 5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남한 사회의 부패에 절망한 소설의 주인공 이명준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기독교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실감한다.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 뭐니 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잖아요? 정치의 오물과 찌꺼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다 삼키고 다 실어가 버리거든요. 도시로 치면 서양의 정치사회는 하수도 시설이 잘돼 있단 말이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이 땅의 개신교는 정화기능을 하기보다는 한 줄기 탁류를 보태는 모양새다. 한때 역사 공부를 함께 하다가 지금은 서울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는 후배를 달포 전에 만났다. 지방 도시에서 부목사를 뽑는다기에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만나자마자 대뜸 ‘한국 교회에 시모니(성직매매)가 성행한다’고 장탄식을 했다. 부목사 임용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더라는 것이다. 일부 비리 사학에서나 하는 짓이 교회 안에서 저질러지고 있다는 말이다. 서양 역사에서 기독교는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U턴을 하곤 했다. 우리의 때는 언제일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정말 좋은 글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두 진지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과거 아모스 시대에 그러했듯이 오늘날 한국의 중대형 교회에는 ‘성대한 찬양과 거대한 번제물’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그럴듯하게 감동적인 찬양들이 매 주마다 연주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의미에서 매 주마다 수북이 쌓인 헌금이 제단마다 바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뿐입니다. 교회 담장 안에서 ‘거룩한 성회와 풍성한 번제물’이 넘쳐나고 있지만, 교회 밖을 나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섬긴다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아무런 ‘신앙의 실천’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 따로 신앙 따로의 고질병이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기독교 신앙은 뒤틀어져 있습니다. 왜곡(歪曲), 즉 비뚤어져서 휘어져 있습니다. 바르지 않습니다. 본질에서 이탈했습니다. 원래 뜻에서 벗어났습니다.
<악마의 신학?>
며칠전 은명교회(섬김이 이민재 목사) 주보를 보니까 ‘악마의 신학?’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더군요.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악마의 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악마의 신학은 신학이 아니고 ‘마술’입니다. 악마의 신학에서 ‘신앙’은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기분에 맞게 바꾸는 일종의 폭력이며,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이때 믿음은 최고의 효과를 내는 소원성취가 됩니다. ‘강한 신념과 의지’에서 오는 특별하고 신기한 통제입니다.
이런 훌륭한 ‘힘’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의지를 전복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에 끌어들입니다. 이런 놀랍고 역동적인 힘으로 하나님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개화된 주술사’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판이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원수들은 우리에게 항복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사업은 번창할 것이고, 우리는 태양 아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돈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마의 신학입니다.】
<성경의 핵심 그리고 해석>
아모서 예언자의 핵심적 메시지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들 목구멍에서 나오는 노래가 찬송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정신이 곧 찬송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또 우리가 봉투에 넣어서 제단에 바치는 돈이 헌금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실천이 곧 하느님을 향한 봉헌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신구약성경이 경전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생활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밑줄을 긋는 ‘생활경전’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삶이 곧 예배인 자, 즉 삶 자체가 고결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예배가 되는 삶,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아모스 예언자가 선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면서,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삶이 곧 예배’인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그 중대한 문제가 우리에게 남습니다. 그냥 순간순간 ‘삶이 곧 예배’인 인생을 살도록 결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에 그것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턱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신학’을 전파하는 교회 안팎의 유혹이 너무나도 강렬하고 매혹적이고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인간의 단호한 결단만으로는 그 거대한 장벽을 깨트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글쎄요. 저라고 해서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만, 다만 옛 현인들의 지혜를 해법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며칠 요즘 『논어의 그리스도교적 이해』(김승혜 지음, 영성생활)라는 책을 의미 있게 잘 읽었는데,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기도하는 사람만이 남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고 하느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 기도는 세속적 가치관이라는 껍질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심에서 나를 진정 자유롭게 해주는 기도는, 몇 시간 동안 무릎을 꿇는 기도형태만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매일매일의 일상사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가치규범을 가지고 만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예민성을 가져야 한다. “공자에게 있어서 기도란 하늘에 무엇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삶의 길 전체에서 천명(天命, 하늘의 명령)을 실천해 가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삶을 예배로’ 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는 단순히 몇 시간, 혹은 며칠, 몇 십일, 몇 백일 기도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삶의 하루하루를 하늘의 명령(天命)을 닦아가는 수행자(修行者)로 살아가는 차원입니다. 그런 영성의 수행자로 살아갈 때, 우리는 저 거대한 악마적 마술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성의 수행자만이 돈과 명예, 권력과 쾌락에 쩔어있는 세속의 장벽을 깨트리고, 하느님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 스스로, 즉 몸과 마음과 영혼과 정신이 수행적 삶을 통해서 그 스스로 ‘정의와 자유, 평화’의 샘물이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저 험악하고 더러운 세상을 향해서 ‘정의와 자유, 평화’를 강물처럼 흘려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샘물이 되어야만 우리는 마르지 않는 강물을 저 세상으로 흘려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삶’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삶’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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