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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사는 인생

요나 김필곤 목사............... 조회 수 3481 추천 수 0 2009.12.28 02: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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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4:1-11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세상에 뜨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느날 태조 왕건이라는 것이 텔레비전에 방영되더니 "영철"이가 뜹니다. 어느날 잊혀진 허준이 나오더니 매실 주스가 뜹니다. 갑자기 서태지가 뜨고, 해리포터가 뜨고, 핸드폰이 뜨고, 00 정치인이 뜨고, 00 목사 뜨고, 00 상품, 00 회사가 뜨고, 00 학습지가 뜨고, 노랑머리가 뜹니다. 이런 현상을 말콤 글래드웰이라는 사람은 티핑 포인트라고 합니다. 그의 책 "티핑 포인트"애서 티핑(균형을 깨뜨린다) 포인트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화되고 전염되는 극적인 순간을 말하는 말입니다. 오랫동안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던 현상들이 신비한 마법에라도 걸려든 것처럼, 아니면 홀연히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단 시작된 변화는 엄청난 힘을 얻으며 걷잡을 수 없는 현상으로 발전합니다. 기존의 균형 상태가 깨지면서 특정한 문화, 사회적인 현상이 하나의 거대한 회오리로 몰아치는 것입니다. 평형을 깨뜨리는 힘의 작용이 분명해지는 지점, 즉 평범한 저기압성 대기 불안정 상태가 캔사스 평원의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으로 변하는 폭발 지점을 '티핑 포인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말콤 글레드웰은 그의 책에서 티핑 포인트의 세 가지 규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법칙, 고착성 요소, 상황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티핑 포인트를 가져오게 하는 것 즉 어떤 것을 뜨게하는 것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힘에 의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말하는 80대 20의 원칙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작업의 80%는 대개 참여자의 20%가 수행하고 범죄자의 20%가 범죄의 80%를 저지르고 운전자의 20%가 사고의 80%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사람들이 "커넥터, 메이븐, 세일즈맨"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법칙으로 고착성을 말하는데 일단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감염된 상태가 계속되어 전염성은 더욱 확산되는 것처럼 사람은 이단 일정한 생각이 마음 속에 자리 잡으면 그 생각에 머물러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인을 뽑을 때 어떤 고착성이 자리 잡고 있으면 학력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자기 지역과 관계된 사람을 뽑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억 속에 고정된 생각은 머리 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고 그것에 의해 행동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상황의 힘을 말합니다. 가장 사소한 상황을 건드림으로써 티핑
포인트는 점화될 수 있는데 그는 그 상황을 만드는 사람은 150명 이하의 군중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화번호의 숫자가 일곱 자리인 것은 인간의 수용한계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에 의하면 인간의 최대 집단의 크기는 150이라는 것입니다. 군사 입안자들은 수년에 걸쳐 기능적인 전투 단위가 기본적으로 200명보다 더 큰 규모일 수 없다는 대략의 법칙에 도달했고 후터 신도들은 집단 거주자가 150명에 육박하면 어김없이 두 개로 나눠서 새로운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한 집단에서 전체 집단으로 갑자기 전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한 120명의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저는 신앙인의 티핑 포인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생의 기쁨이 없는 자들이 희락을 가지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를 깨닫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인생은 뜨게 됩니다.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삶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니까 다윗이 뜹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니까 바울이 뜹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니까 모세가 뜹니다. 우리는 은혜받은 인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은혜받은 인생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은혜로 죽음에서 살아났으니 은혜로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전하기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수도 니느웨는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722년에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입니다. 아주 죄악된 도시였습니다. 나훔서 3:1에 보면 "사람을 죽인 피로 얼룩진 니느훼 도성은 멸망하고야 만다! 도성 전체가 온갖 거짓으로 가득찼고 폭력과 불법이 온통 들어차 있다. 사람을 끌어다 죽이는 일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있다.(현대인의 성경)" 살인과 불법으로 얼룩진 니느훼성,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고 원수의 나라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를 통하여 기적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폭풍 가운데 바다에 던져 졌는데 살아난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된 것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공로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품을 보고 우리의 어떤 조건을 보고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이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를 택하여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일평생 동안 이 은혜에 감격하여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그러니 감옥에서도 그 은혜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하는 에베소서 1장을 보십시오. 인사말을 마친 후 찬송하리로라고 외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령한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것 만큼 불행은 없습니다.
영국에 목사님이면서 찬송가 작가인 존 뉴튼이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는 그 405장 그것을 작사한 분입니다. 그 분의 글에 아주 유명한 말 한마디가 있답니다. 내가 만일에 천국에 가게되면 틀림없이 깜짝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나는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에 와 있으리라고 했는데 와 보니까 없어요. 꼭 올 수 있다고 생각한 분이 천국에 없더랍니다. 또 한가지는 저런 사람은 천국과는 관계없다. 영영 구제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천국에 와 있더래요. 또 한가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내 자신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대요. 이렇게 세 가지를 놀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불신자였습니다. 난봉꾼이었습니다. 노예 무역상이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 주시고 새사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날의 모든 죄로부터 용서받고 천국 백성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적이고 가슴 퍽찬 일이겠습니까?
은혜로 산 사람들은 이제 은혜로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를 살려 놓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3장 1절 요나에게 가서 다시 외치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 성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요나는 신이 났을 줄 모릅니다. 40일 지나면 원수의 나라가 망하겠지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분노가 생긴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 자신도 살리는 사람으로 쓰임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살고 다른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살아나자 요나는 죽음에서 살려준 은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다고 말합니다(2). 하나님이 은혜로운 줄 압니다. 그러나 죽여달라고 합니다(3,8). 왜 그렇습니까? 원수의 나라 니느웨가 하나님께서 유황불을 내려 다 태울 줄 알았는데 회개하고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는데 완전히 자신의 말대로 되지 않아 자존심이 상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10-11절 읽어 보겠습니다. 요나의 눈에는 원수같이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요나는 그들이 망하길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살릴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요나는 싫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아낀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그 은혜로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남편을 살리고, 아내를 살리고, 자식을 살리고 부모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죽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2. 은혜로 용서함을 받았으니 은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 배신자입니다. 도망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받아 주십니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죄에서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원수의 나라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산에 올라가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기를 보고 있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처럼 다 불타 버리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나는 용서받도 다른 사람은 용서받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땅이 그 댓가를 받아야 속이 후련한 것입니다.
사람이 참 용서하기 힘이 듭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한 12,3년 전 일 같습니다. 한 자매가 암에 걸렸습니다. 30대 초반의 부인이었습니다. 병원에 찾아 다니다 못 고친다고 하니까 교회에 왔습니다. 복수가 차고 거의 인생 끝이 다가 온 것같았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했습니다. 복수가 가라 앉고 점점 좋아졌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도 힘이 났고 저도 힘이 났습니다. 그 일이 있기 1년 전에 한 집사님께서 위암에 걸렸는데 금식기도하며 온 교회 식구들이 합심 기도하여 낳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인들과 함께 심방을 갔습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 보니 어머니와 병이 든 딸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복수가 찬 상태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집을 살 때 어머니와 함께 돈을 함께 내어 샀는데 그 집을 팔아 서로 돈을 나누어 얼마를 가져가느냐는 문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딸은 어머니가 준 돈 일부의 이자를 쳐서 주겠다는 것이고 어머니는 집값이 올랐으니 오른 것 만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죽을 줄 모르는 사람이 그 재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피댓를 세우고 죽도록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죽도로 싸우더니 그 다음 주에 돌아가셨습니다. 때가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 다 놓고 가는 것입니다. 재물 조금 손해 보면 용서하지 못합니다. 자존심 조금만 상처를 당하면 용서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자신을 무시했다고 예배드리는데도 그 집사님 뒤에 앉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뒷꼭지 보시 싫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 상한다고 예배드리다 말고 읽어나 가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 자존심 대단한 것 아닙니다. 머리 실핏줄 하나 터져 보세요. 사람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생각도 없어져 버립니다. 요나가 하나님도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고국에 있을 때에,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를 멸망시킬테니 가서전 하라고 하지 않으셨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했는데 망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가짜 예언자가 되었고 자기를 강제로 니느웨에 오게하여 큰 망신만 당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해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십니다. 모든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못을 박히면서 그 모든 수모와 모욕을 감당하였습니다. 침 뱃고 욕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은혜는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 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고마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는 것입니다. 의무가 아닙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이 몸받칩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막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 18:22)"
인간들은 말합니다.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 번 세 번 용서합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끝없이 용서하라고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의롭게 하는 사람도 없고 용서 받지 못할 정도로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용서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요 우리가 그 크신 은혜로 모든 죄에서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3. 은혜로 사명을 받았으니 은혜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명을 거슬렸습니다. 인간같으면 다시 사명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사명을 줍니다. 3장 1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은혜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 줍니다. 인간같으면 이정도 되면 그래 죽어라라고 말하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요나에게 사명을 줍니다. 설득합니다. 박넝쿨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우리에게 주신 인생 길지 않습니다. 은혜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난 주에 몇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주대관이란 대만 소년의 "내게는 아직 한쪽 다리가 있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소아 암에 걸린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대만 법무성에 근무하는 공무원이고 어머니는 변호사입니다. 대관이는 여섯 번의 인공 수정 끝에 얻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머리가 영리한 아이였습니다. 다섯 살 되던 해 당시 삼백수와 천자문 삼자경을 줄줄 읽어내려 갈 정도였습니다. 악성 종양이었습니다. 화학 요법을 받았습니다. 그는 구토를 느끼고 머리카락이 빠졌습니다. 화학 요법도 대관이의 암세포에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암세포와 싸우며 아홉 살 생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아홉 살 생일"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지금까지/ 난 누구와도 싸워 본 일이 없어요/ 싸울 일이 없었거든요/ 앞으로/ 난 암 악마와 싸울 거예요/ 싸워서 내 몸의 건강도 찾고/ 싸워서 내 살아갈 권리도 찾을 거예요/ 왜냐하면 난 아직 아홉 살이니까요/ 왜냐하면 난 아흔 아홉 살까지 살 거니까요" 대관이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암은 그의 몸을 점령해갔습니다. 결국 대관이는 다리를 잘라야 했습니다. 암과 싸우던 대관이가 최후로 선택한 수단은 아픈 다리를 한 칼에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다리를 자르기 전 "다리를 자르다"에서 그는 "암 악마는 인류의 적/ 내 오른 쪽 다리를 점령했어요/ 화학 치료 공격도 소용없고/ 방사선 치료도 꼼짝 못해요/...... 의사 선생님은 과학에 나를 맡기고/ 나는 하나님께 내 삶을 맡겨요" 그리고 수술을 한 후 "내게는 아직 한 쪽 다리가 있다" 시에 "베토벤은 두 귀가 다 멀었고/ 두 눈이 다 먼 사람도 있어/ 그래도 나는 한 쪽 다리가 있잖아/ 난 지구 위에 우뚝 설 거야/ 헬렌 켈러는 두 눈이 멀었고 / 두 다리를 다 못 쓰는 사람도 있어/ 그래도 나는 한 쪽 다리가 있잖아/ 난 아름 다운 세상을 다 다닐 거야/"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는 울면 안되라는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가족들 앞에서/ 울지 않아/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누나들 앞에서/ 울 수 없어/ 암 악마 앞에서/ 울 필요없어/ 내가 엉엉엉 울면/ 암 악마는 하하하 웃을 거야/" 그는 10년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유언을 썼습니다. "아빠, 엄마, 동생아. 내가 죽으면 내가 온 힘을 다해 암과 싸웠다는 것을 암에 걸린 다른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전해 주고, 그들에게 용기와 강한 의지를 갖고 암이라는 악마와 맞서 싸워 달라고 전해 주세요." 대관이는 이 유언을 다 써 놓고 울었습니다. 입원한 후 부모님 앞에서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동생의 손을 잡고 "상관아, 이제부터는 아빠랑 엄마 말씀 잘 듣고 형아 몫까지 효도하는 거야." 말을 마치자 형제는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세상 영원히 사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주어진 사명은 분명합니다. 이 땅에서 각자 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직장과 사회, 가정을 위해 짧은 생을 불태우며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은혜로 사명 주었으니 은혜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때로는 훈련도 있습니다. 요나는 풍랑을 통한 사명자훈련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의 고난훈련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성 안에서의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박넝쿨 밑에서 사랑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런 훈련을 시키는 것은 사명을 능력있게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훈련은 힘들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통하여 사명을 감당할 선물을 주십니다.
뜨겁게 은혜로 사명을 감당한 사도 바울은 죽음 앞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1.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은혜로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은혜로 용서함을 받았으니 은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은혜로 사명을 받았으니 은혜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로 사는 인생/욘4:1-11/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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