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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역성이 강한 요나를 부르신 이유.

요나 궁극이............... 조회 수 1073 추천 수 0 2014.06.28 12: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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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5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1절-5절.

 

1절-5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나무나 돌멩이처럼 짐승처럼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저희들을 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 스스로가 자기의 마음을 살필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과,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에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원하옵나니 저희들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어떤 때 가서 보면 짐승보다도 못한 마음이나 짐승보다도 더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물 중에 최고의 영장으로 만들어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는 하늘나라를 상속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다는 그 차원에서 볼 때에 저희들이 못된 마음을 가지고 죄를 짓고, 저희들의 마음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짐승만도 못하니 짐승 앞에 부끄럽고 만물 앞에 부끄럽고 인간 앞에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죄인인 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 저희들을 불러 주셨사온즉 저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될 줄 압니다.

 

우리의 속에 사람마다 제각기 똑똑하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 비해보면 너무나도 어리석고 추한 죄인이요 인간인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속의 잘못된 것을 낱낱이 고쳐주시고, 고치려고 그러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처럼 닮아가는 최고의 높은 인간으로, 고상한 인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즐거워 하실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이 시간에도 축복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마음에 큰 깨달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로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과 아주 가까운 마을 가드헤벨이라 하는 고을의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성경 열하14:25에 있습니다.

 

이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부름을 받았으니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받은 사람이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이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일반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아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선지자입니다.

 

이렇게 아주 특별 특수한 은총으로 하나님 앞에 등용이 됐지만 그는 목적이탈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의 일생을 영원히 원망스러운 일생으로 마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 요나의 성격을 볼 때에 요나의 성격이 아주 패역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인데도 이 요나의 성격이 아주 패역성이 강했다.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에게 은총을 베풀었지만 회개를 안 하면, 자기를 고치지 못하면, 심부름은 잘 했지만 자기 하나 바로 못 고치면 자기의 구원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닮는 면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 절단 나 버립니다. 심부름을 잘해놓고도 절단이 난다 그 말이요.

 

우리가 이런 걸 세상에서 생각해 보면 많이 찾을 수가 있어요. 예를 들면 도둑 밑에 있으면서 도둑에게 열심부리고 충성을 하고 몸 바치고 심부름을 잘 했지만 결국은 쇠고랑을 찬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자기 대장에게는 심부름을 잘 했지만, 일을 잘 했지만 자기 개인적인 면에 있어서는 완전히 절단 나 버렸다 그 말이요. 하나님 앞에도 마찬가지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의 말씀의 뜻을 잘 깨달아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방금 예에서도 찾아봤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또 이렇게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 시켜먹으려고 불렀겠습니까? 일 실컷 시켜먹고 내버리려고 불렀을까요, 아니면 일은 똑똑히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실 일을 한다고 하면 제 아무리 영리한 인간이라도 하나님만큼 할 수 있어요? 말이 안 되지. 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심부름을 시켜서 그 심부름을 한다고 할지라도 전부 다 그르치고 만다 그 말이요. 부모가 자기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똑똑하게 잘 합디까? 그런 것처럼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우리가 일은 잘 못한다 할지라도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 가지고 하나님 마음처럼 만들어지기를 원하시는 건지, 아니면 우리를 부른 것은 일 시켜먹으려는 그 목적으로 불렀는지? 어느 것으로 들립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 부려먹으려고 불렀다’ 하는 그게 하나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른 것은 ‘하나님 당신처럼 말씀을 가지고 만들어 주려고 우리를 불렀다’ 하는 게 있는데 어느 겁니까? 후자. 확실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적으로 봅시다. 그걸 그대로 끌고 들어와서 우리 교회적으로 봐요. 1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불렀구나’ 하는 이건 염두에 두면서 즉,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교회에 오게 했다 그 말이요. 이 원칙을 놓고 볼 때에 그렇다면 나를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려고 부르신 것인데, 목사라는 사람이 교인들보고 하는 말이 ‘일 충성봉사 열심히 해라’ 그랬단 말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하고 그 목사님의 말이 같아요, 달라요? 달라요. 확실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똑같은 말이 나가야 돼요. 그게 옳은 교회요. 거기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만들어지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이 되고 자라가게 된다. 이런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이요, 많이 깨닫는 사람이요, 많이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큼 사랑을 많이 받고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입장에서 앞에서 말한 것을 안 들은 상태에서 이 가난한 교회에 오셨다고 가정한다면 여러분들 생각이 어떻게 듭니까? ‘아이고, 이 교회는 개척교회니까 헌금 많이 내라고 그러겠구나. 돈 잡아 뜯겠구나’ 그런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사실 이런 교회가 많이 있어요. 없는 게 아니에요.

 

혹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교회에 왔는데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사성을 바로 배웠다면 여기 올 때 가졌던 그 생각을 회개를 해야 된다.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 돼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팔방미인 노릇하는 제가 기술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저도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이 하는 방법 다 써먹었던 사람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보니까 그게 아니다.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생각을 해봐요. 아닌 말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가지고 ‘충성봉사 해라’ 하신다면 충성봉사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지, 부자가 돼야지, 권력이 있어야지, 지식이 많아야지. 이렇다면 충성봉사 잘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하면 남이 알아주고, 안 믿는 사람도 돋보고 할 테지요. 예수님이 일 시키려고 그런 사람들만 불렀습니까? 아니지요. 일자무식한 어부들을 불렀지요.

 

이 성경에 보면 요나의 성격이 어떤 사람이라고 그랬지요? 온순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패역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성격이 어떻게 그렇게 패역한지!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요나에게 ‘그냥 하나님을 믿어라’ 그게 아니고 불러가지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삼은 거지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면 일반사람보다 차원이 높단 말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패역이 강한 이 요나를 부른 것은 일 시켜먹으려고 그런 거요, 심부름하는 방편을 통해서 요나를 바로 만들어 주려고 하는 뜻일까요? 어떤 뜻일까요? 후자. 확실하지요?

성경 어디를 봐도 그렇습니다. 성경에 결론적으로 말씀한 게 있지요? 모든 성경은 깨닫게 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단 말이요.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나 하나를 두고 아침에 해를 뜨게 하고 지게 하고, 달이 뜨게 하고 지게 하고, 모든 삼라만상 우주가 돌아가게 하고, 저 멀리서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바람을 불게 하고, 홍수가 나게 하는 겁니다. 누구 하나 바로 만들려고요? 나 하나 바로 만들려고. 우리가 그 무한한 사랑을 생각을 해 봐요.

 

하나님이 특별도모로 인간을 만들었어요. 짐승처럼 만들지 않았단 말이요. ‘우리의 모양과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자. 나처럼 만들자’ 하고 인간 나를 만들었습니다. ‘너를 나처럼 만든다’ 하는 것은 ‘너는 나를 닮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깐 동안의 세월이 지나면 내가 너를 천국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영원히 근심 걱정 고통이 없는 그곳, 기쁨만 있는 그곳, 행복만 있는 그곳에서 너와 나랑 같이 살게 하겠다’ 해서 나를 이 세상을 잠깐 거쳐 가게 하는 것이란 말이요. 이 세상을 거처 가는 동안 내가 만들어지는 거지요.

 

요나는 자기의 주관성이 강한 자입니다. 패역이라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자기의 주관대로 하겠다고 하는 것이 패역입니다. 여러분들 속에도 이게 들어있고, 여기 섰는 목사도 마찬가지요. 내 고집대로 하겠다고 하는 이게 누구든지 다 들어있을 거요. 그렇지요? 그러나 문제는 ‘내가 하겠다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하는 이걸 잘 분별하면 되겠지요.

 

하나님의 뜻인데도 그걸 안 하고 딴 것을 하는 이건 뭐지요? 패역.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를 않고 하나님은 ‘이 길로 가자’ 그러는데 자기는 저 길로 갔단 말이요. 그런데 저 길로 갔는데도 모든 일이 잘 되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이 올라가고 아주 잘 되었어.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축복을 준 겁니까, 그게 저주입니까? 앙화입니까?

 

여러분들, 하나님의 옳은 길로 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생활이 아주 궁핍하고 늘 바닥 생활을 하는 것 같아. 그러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겁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 모든 일이 다 잘 됩니까, 못 되는 것도 있습니까? 못 되는 사람도 있지요. 그렇지요.

 

성경에 보면 너무 예수를 잘 믿다보니 붙잡혀 가서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럼 이런 사람은 예수를 못 믿으니 그렇게 된 거요?

 

우리는 내가 그렇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가치적으로 따져볼 때 ‘이게 옳다’ 하는 이건 있어야 되겠지요? 사람이 양심을 속일 수 있나요? 그러면 가치적으로 한 번 판단을 해 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살다가 순교를 당했다. 나쁜 사람들이 잡아다가 불에 태우기도 하고, 산 사람을 그대로 놓고 톱을 가지고 켬을 당해서 죽은 사람도 있고 그래요.

 

‘내가 평생 동안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편안하게 살고 하는 그런 성공은 못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바로 살다가 이렇게 죽던 저렇게 죽던 어떻게 죽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만든 그 목적대로 바로 살다가 가겠다’ 하는 그게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에이, 적당히 믿어야지. 잘 믿으려고 하면 순교를 당할 거고, 안 믿으려고 하면 하나님 앞에 얻어터질 거고 하니까 그 중간쯤 적당하게 믿어야지. 하나님이 때리려고 그러면 얼른 교회에 나오고, 또 심심하면 하나님 앞에 배짱도 내대고 하며 그렇게 그렇게 살면서 이 길로 빠지고 저 길로 빠지고 해서 세상에서 손해 보지 않고 잘 살아야지’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살아봐야 잠깐인데 나는 예수 믿으니까 지옥은 못 가고 하늘나라로 갈 테니까 이 세상에서도 이익을 보고, 또 천국에 가서 살겠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앞의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뒤의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못 살더라도 그 마음에서 판단을 내리는 그게 있잖아요. 전자. 확실합니까?

 

앞의 사람처럼 산다고 해서 다 순교당하라는 법이 없고, 밥 빌어먹다 죽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이 세상 그 어떤 좋은 것을 다 갖다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꾀를 내가면서 뒤의 사람처럼 믿더라도 하나님께서 홀딱 걷어 가면 그건 끝난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 바로 못 사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에는 마음속에서 그게(앞의 경우) 있어야 된다 그 말이요. 그게 있어야 만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잡고 역사를 한다 그 말이요. 알겠습니까?

 

요나는 주관성이 강하고 패역이 강한 사람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여기에는 자기 주관성은 금물입니다. 알겠어요? 참되고 옳은 신앙은 자기의 주관을 꺾고 하나님의 객관을 즉,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든다 그 말이에요. 이게 신앙이 좋은 사람이다. 내 것은 아무리 좋더라도 다 내버리고, 예수 믿기 전에 아무리 좋았던 것이라도 다 내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아버려라 그 말이요. 이게 예수 믿는 겁니다. 알겠어요?

 

하나님의 마음이 좋겠어요, 내 마음이 좋겠어요? 하나님의 머리가 좋겠어요, 여러분들의 머리가 좋겠어요? 사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내가 똑똑하다고 이렇게 판단을 내리고 저렇게 판단을 내리고 했는데도 자기가 함정에 빠지고 자기가 손해 본 때도 많이 있습니까? 똑똑하다면 그게 없어야지. 인간은 별 수 없어요.

 

패역이 뭐냐? 자기 주관대로 하겠다는 것. 패역이 뭐냐?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걸어가는 이것이 무서운 패역이다. 알겠어요?

 

그런데 가만 보면 교회에 들어오면 하나님은 그걸 바꾸자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게 뭐요? 그냥 귀로만 듣고 ‘하나님 말씀이다’ 하고 판단하고 있으라는 뜻입니까, 하나님의 그 정신 사상 마음을 자기 속에 넣으라는 그 말입니까? 후자. 그런데 보통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면서 자기 것은 그대로 갖고 있어.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귀로 들은 것은 엄청나게 많아.

 

그래서 가만히 보면 성경 찬송을 들고 믿기는 예수를 믿는데 그 사람 속에는 뭐가 들어있지요? 예수 안 믿는 사람과 같은 생각 마음이 잔뜩 들어있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은 하나의 이름뿐이고 속은, 여러분들, 오징어 속에서 새까만 물이 나오나? 경상도 말로 그걸 복쟁이라고 그러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속이 새까매가지고 그대로 있어. 그게 패역이란 말이요.

 

딴 교회는 몰라도 우리교회는 패역이 강한 사람은 일을 못 시켜요. 하기야 나도 패역이 강한 사람인데, 패역이 강해놓으면 교회 일을 못 시켜요. 직분을 못 줘요. 속이 시커먼 그대로, 세상이 그대로 들어있는데 거기에 ‘전도사다, 장로다’ 이렇게 직분을 줘놓으면 그 자가 어떤 행세를 하겠지요? 아무 데나 가도 ‘나는 집산데, 나는 장론데’ 하며 본인 속으로 딴 사람을 꽉꽉 누르려고 그러지요. 목사도 그렇지. 이게 아주 패역성입니다. 이게 아주 천하 못된 것입니다.

 

요나는 패역성이 강하다. 그러니까 자기 주관성 때문에 누가 다 절단 나 버리지요?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서 자신이 망해버립니까, 딴 사람이 망해버립니까? 자신이 망해요. 알겠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닮아라. 네 속의 것을 다 내버려라’ 그러는 것은 나를 살려주려고 하는 말씀이요, 죽이려고 하는 말씀이요? 살리려고. 이게 기독교란 말이요. 기독교 외에 불교라든지 유교라든지 또 다른 종교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이런 게 없고 가서 그저 손발 들고 무릎 꿇고 빌고, 염라대왕에게 잘 보여야 목숨을 안 걷어가지? 그렇지 않아요? 삼신 할매에게 잘 보여야 아들을 주지 잘못 보이면 딸을 줄 거고. 그렇습니까? 그러니 잘 보이려니 뭘 잔뜩 해서 자꾸 바쳐야 돼요. 절을 수천 번 해야 되고.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만 보면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인데 사람이 몰라가지고 미련한 짓을 하고, 미련한 짓을 하다 보니 자기가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고 죽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어요. 특히 믿는 사람의 경우에 어떻게 보면 믿음인 것 같으나 속에는 패역이 강하게 들어있단 말이요.

 

여러분들, 이거 한 번 판단을 해 봐요. 말 속에 말이 있는데 그걸 판단을 잘 해야지요. ‘이 세상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다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고 다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하는 이 말만 들을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겁니까. 안 믿는 겁니까? 이 세상은 다 누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 말만 들을 때에 그 사람이 신앙이 있는 사람이요, 없는 사람이요? 믿음이 있는 사람이요, 없는 사람이요? 있는 사람이지요.

 

그 다음에 앞의 말을 한 후에 ‘다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 아버지, 그런 것 좀 나에게 주십시오’ 그랬단 말이요. ‘줘야 만이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그랬단 말이요. 그러면 이 뒷말이 믿음인 것 같아요, 자기 속에 뭐가 들어있는 말 같아요? 후자.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그냥 앞의 말만을 할 때는 그게 이상하게 들립니까, 좋게 들립니까? 이상하게 안 들리지요. 좋게 들리지요. 그런데 앞의 말을 한 후에 뒤의 말로 기도를 한다면 이건 믿음이 아니지요. 그런데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거의가 이런 식으로 기도하고 이런 식으로 가르치니 사람이 안 만들어진다 그 말이요. 사람이 안 만들어져.

 

그 속에 새까만 게 들어있고, 뿔이 돋아있고, 응어리가 들어있고, 암 같은 정신이 들어있고, 못된 그게 잔뜩 들어있으니 그 놈을 뽑아야 되고, 그걸 수술을 해야 되고, 그걸 뿔이라고 한다면 그걸 잘라야 되고 해야 돼요. 하나님 말씀은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을 쓱 보고 ‘아, 돈 있는 사람이구나’ 해서 살살해가지고 직분을 주어 코를 꿰어놓으려 하는 정신을 가졌다면 그 속이 뭐요? 새까만 거요. 웬만하면 즉각적인 판단이 나는 거란 말이요. 그런데 목사님이 등을 살살 토닥거려주면 무조건 ‘아, 사랑이 많다’ 해 버리지요. 문제는 목사님이 말씀을 가지고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가? ‘성경을 들고 말하니 하나님 말씀이구나’ 그렇게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시나?’ 하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껍데기 벗겨먹으려고 그럽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목사님의 입으로 통해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아이고, 하나님이 내 껍데기 벗겨먹으려고 그러는구나’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요, 목사 제 말이요? 목사 자기 말이지요. 마귀가 그 짓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루를 믿던 열흘을 믿던 사람이 방향이 바로 잡혀야 돼요. 수십 년을 믿어도 그 마음이 세상 쪽으로 틀어져 놓으니 이게 만들어져야지. 교회에서 분쟁만 일으키고. 하기야 이걸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목사님이 큰 잘못이야. 목사가 교인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따라합시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신약성경에 이 말씀이 있지요? 바리새인들 서기관 율법사 성경을 잘 아는 똑똑이들이 예수님보고 표적을 보여 달라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어찌하여 나에게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패역이 강해가지고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는 중이에요. 그 뒤에 보면 도망을 갈 때 처음에는 바다의 파도가 잔잔하지. 그러니까 ‘야, 일이 잘 되는구나’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뜻대로 안 해도, 주일날 까먹고 하나님 명령대로 안 해도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일이 잘 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 걸? 얼마 안 가서 바람이 불어서 야단법석이 나지요? 그러니까 배에 탄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배에 실은 물건을 다 내버리지요? 그 때 요나는 배 밑창에 가서 드러누워 있었어요. 제 딴에는 배 밖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보이니까 배 밑창에 가서 담요를 둘러쓰고 누워있는 거거든. 배 밑창은 하나님이 안 본다 그 말이지.

 

하나님이 그걸 모를까? 다 아시는 하나님이 바람을 보내서 파도를 일으켜 가지고 배를 두드려 깨는 거지요.

 

그럼 왜 배를 두드려 깨요? 밉단다고 깨는 거요, 요나를 살리려고 깨는 거요? 밉단다고 깨는 게 아니라 요나가 그 안에 폭 쌓여있거든. 그래서 이놈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 말이요.

 

여러분들의 사업이나 여러분들의 모든 생활이 그래요. 집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사업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날 죽이려고 그러는 거요, 날 살리려고 그러는 거요? 겉으로 볼 때는? 나를 망하게 하고 나를 꼭 죽이려고 하는 것 같지. 그러나 알고 보면 ‘돈 속에 폭 파묻혀 있는 나를 그대로 두면 안 되겠구나’ 해서 그걸 끄집어내려니까 두들겨 패는 거지요. 나를 직접 치는 대신 딴 걸 막 깨는 거지요. 껍데기를 깨야 병아리가 태어나듯이 껍데기를 깨는 거란 말이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돼요. 요나 같은 성질이 솔직한 말로 나나 여러분들 속에 다 들어있단 말이요.

 

성경은 하나의 사건이요 그 때의 역사인데, 이 역사를 들어서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활 속에서 그와 같은 역사를 하는 걸 볼 수가 있어요. 이게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안하면 뭔가 하늘로 날아갈 것 같지요? ‘이게 다인가’ 싶고,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줬다’ 하고.

 

이런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내가, 독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내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닮아지는 이것이 큰 복이요. 복 중의 복이요. 믿는 내가 그 복을 안 가지고 있고, 그 복이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아요. 하나님은 사랑을 주기는 주는데 제 그릇이 그만 그러니 딱 닫아놓고 못 받는다 그 말이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요나의 표적이 뭐지요? 패역이란 말이요.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성경박사들이에요. 이 박사들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은 요나의 패역밖에 없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성경박사들이라고 하지만 너희들 속에 요나처럼 그렇게 패역성이 강하다’ 하는 그 면을 사건을 일으켜서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이 불바다가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눈에 잘못 보이면 하나님은 인간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그런 역사를 일으켜 버립니다. 알겠어요?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방군인들을 보내요. ‘내가 이방군인들을 부르겠다. 불러서 너희들을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 해서 이방군인들이 올라와가지고, 이건 겉으로 볼 때는 전쟁이지요. 그러나 그 전쟁 속에서 되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보면 그 군대들을 하나님이 부른 거란 말이요.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세상과 짝짜꿍하고 있으니까, 마음이 전부 다 세상에 달라붙어 있으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러고 있단 말이요.

 

그래서 이방군인들이 와가지고 아이 밴 여자가 있으면 ‘이거는 몇 달이나 됐나’ 하고 칼로 여자의 배를 갈라서 아이를 끄집어내서 죽이고, 또 여러분들이 경험이 있을 거야. 시골 가면 개구리 잡아서 뱅뱅 돌리다가 땅바닥에 탁 내려치지요. 그러면 개구리가 쭉 뻗으면서 달달 떨면서 눈알이 튀어나오고 입에서 피가 나오며 죽어버리지요. 그 악한 군인들이 어린아이들의 두 발을 잡고 뱅뱅 돌려서 땅바닥에 내리쳐 버린단 말이요. 어떻게 그걸 차마 눈뜨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은 인정사정이 없어요. 왜? 악하게 살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죽여 버려요.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 자기에게도 복이고, 딴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아요. 그래서 죽이는 거예요. 이렇게 하시는 게 인간 보기에는 야속하지요.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 못할 그런 일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가만 보면, 물론 그게 다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거지요. 나쁜 짓을 그렇게 고약하게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사람은 끝이 좋지를 못 해.

 

사람은 이 세상만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 그게 짐승과는 다른 거야. 짐승은 이 세상만 있는 거지만 우리 인간은 죽음 후의 세계가 또 있단 말이요. 왜냐? 우리 인간 속에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냐? 그렇다면 나를 닮으면서 마음의 눈을 하늘에 두어라. 신령한 것에 두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자기는 자꾸 땅을 향해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까’ 하고 있으니 그런 너희들에게는 패역성이 강한 요나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그 마음이 땅 쪽으로 보고 있느냐, 하늘 쪽으로 보고 있느냐? 우리 인간은 어느 쪽으로 보고 있어야 옳은 겁니까? 하늘. 이 말이 일을 하지 말라는 그런 뜻은 아니에요. 일하는 방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하나의 방편이요. 먹고 살고 일하고 공부하고 장사하고 정치하는 이거는 방편이란 말이요. 사람이 깨달아지는 방편. 알겠어요? 그게 목적이 아니란 말이요. 그런데 목적을 그렇게 둬놓으면 그 사람의 시선은 늘 땅으로 가서 있어요. 믿는 사람의 시선은 늘 위로, 하늘로. 우리의 머리가 발바닥에 달려 있어요, 위에 달려 있어요? 위. 그러니 위의 것을 생각하라.

 

머리가 밑에 옆에 달린 것일수록 그만큼 둔하고, 머리가 위에 달린 것일수록 영리하고 똑똑하고 그래요. 짐승을 가만 봐 봐요.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게 뭐지요? 원숭이. 지렁이는 어디에서 살지요? 땅에서 사니까 뭘 먹지? 흙속의 영양분을 빨아 먹고 땅에서 살지. 그렇지요?

 

우리 믿는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고 해서 입에 밥이 들어가면 몇 그릇이 들어갑니까? 우리는 그 목적으로 살지 말아라. 그러니까 알고 보면 그런 게 다 성경을 깨닫게 해줘요. 또 이치를 깨닫게 해주고.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건 환경 속에 이치가 있는데, 성경을 모를 때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치를 깨닫게 해준단 말이요.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인간 속에는 영이 있다. 영혼이 있다. 이 살 뼈다귀 피부 골각은 물질이에요. 이거는 땅으로 가면 썩는 거예요. 하나님이 애당초 아담과 하와 인간을 만들 때 흙을 가지고 만들었으니까 흙으로 도로 돌아가요.

 

옛날에 아버지 돌아가신 후 한 십년쯤 지나서 이장을 하려고 무덤을 파봤어요. 파보니까 다 썩었는데 그게 아마 살인 것 같아. 흙이 노래가지고 상당히 부드러워요. 밀가루처럼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어요.

 

그걸 생각해 보면 몸 즉, 흙속에 온기 같은 게 있게 하고, 감각성이 있게 하고 한 걸 생각해 보면 어찌 그리 하나님을 인간을 신비스럽게 만들었는지? 그런데 그보다도 더 신비스러운 것은 이 흙속에다 영혼을 넣어가지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 이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그러나 있단 말이요.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그거는 영혼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 굉장히 신비로워요. 인간을 가만 놓고 생각을 하면 신비로워요.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기계조작을 해가지고 사람의 몸뚱이처럼 잘 만들어서 걸어가게 하고, 꼭 사람처럼 하게 할 수 있을 런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과학이 아무리 최고도로 발달이 된다고 해도 영혼은 만들 수가 없어. 또 인간 속의 그 생명체를 만들 수가 없어요. 못 만들어요. 불가능이에요. 이런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가만 보면 하나님이 다 하신 걸 알 수가 있어요. 인간이 못 해요. 굉장히 신비로워요.

 

얘기가 나왔으니 공해니 수질오염이니 무슨 오염이니 하는 이것도 성경을 깨닫게 해주는 거거든요. 인간 편에서 보면 인간이 오염된 물질을 많이 써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면 환경을 오염시킨 것은 누구지? 사람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인간이 오염을 시켰어.

 

환경을 오염을 시키니까 하나님이 죽어요, 인간 제가 죽어요? 인간 제가 죽지요. 인간은 똑똑하다고 그렇게 했는데 알고 보니까 제가 죽어.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 그대로의 것을, 하나님의 법칙을 어그러뜨려 놓으면 결국은 인간 제가 고통을 당하고 제가 죽어. 여러분들은 수질오염이니 공기오염이니 하는 것에서 그걸 봐야 됩니다.

 

이걸 이제 성경으로 깨달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오염이 되면, 설교가 오염이 되면, 목사님들이 오염이 되면 누구의 영이 죽어 들어가지요? 성도들의 영은 자라지를 못하고 죽어 들어가요. 빼빼 마르고 기형아가 돼버려요. 환경오염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걸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교회에 가더라도 오염된 말씀을 배우면 돼요? 안 돼요. 그러면 살아나지를 못해요. 믿음이 자라나지를 못하고 성경을 깨닫지를 못해요. 이렇게 되면 자기만 죽나? 자기와 연관된 모든 자자손손의 식구들이 깨우치지도 못하고 머리통은 전부 다 짐승처럼 돼서‘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맨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사람도 죽이고, 도덕성은 타락될 대로 다 돼버리고. 좋은 게 뭐냔 말이요.

 

얘기가 나왔으니 오늘날 세상이 얼마나 어수선하고 시끄럽습니까? 사람이 못 돼 놓으면 아무리 비단방석 이불을 깔아놔도 그거는 역시 불평이야. 그러니까 문제는 가시방석에 앉혀놓더라도 거기에서 패역성을 부리지 아니할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면 되는 거지요. 여러분들 가정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들 사는 자리도 마찬가지. 문제는 ‘내가 바른 사람이 못 될까? 하나님 닮은 사람으로 못 될까?’ 이걸 신경을 써야 돼요.

 

우리가 이걸 알아야 돼요. 마음이 고약하면 아무리 좋게 해줘도 불평불만이고,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야단법석이고, 맨날 남 잡고 싸우고, 늘 우거지상으로 있고, 편할 날이 없어.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으면 아무리 지옥 같은 환경이라도 그곳을 지옥처럼 만들어 놓을까요, 천당처럼 만들어 놓을까요? 천당. 그 얼마나 복 있는 사람이냐?

 

내가 아무 데 가서 앉아도 ‘아, 그 사람이 왔다 가니 내 마음이 이렇게 편하구나. 정말 그 사람이 오면 내가 깨달을 것이 많이 있구나. 그 사람이 오면 뭔가가 깨달아지고 내가 그렇게 바로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이게 있어야지 모이기만 하면 남 헐뜯고 남 흉보고 한다면 뭐 볼 게 있겠어요. 거기에는 마귀가 판을 치는 거지요. 못된 귀신들이 다 달라붙고.

 

믿는 우리는 나의 자율 즉,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는 나의 주관성을 버리고 내 속에 하나님의 객관 즉, 하나님의 법을 집어넣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여기에는 꼭 하나님의 명령이 있어야만 움직이지 말고 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사를 즉각적으로 바로 알아차려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움직여 나가야 한다. 이게 신앙인이지요.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요. 부모가 ‘왜 이거 안 했나, 저거 안 했나’ 하고 명령하기 전에 부모의 마음을 미리 알아서 자기가 부모의 마음에 쏙 들도록 척척 알아서 해놓으면 부모의 사랑을 받을까요, 몽둥이를 받을까요? 사랑. 믿는 이치도 마찬가지.

 

우리는 자원적 순종입니다. 복종이 되면 안 되겠지요? 복종은 그 속에 패역성이 들어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이걸 고치고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된다.

 

인간에게는 시초의 인간이 있어요. 아버지 그 다음에 할아버지, 또 그 다음에 할아버지 할아버지로 자꾸 올라가면 인간 하나가 딱 남게 돼요. 그러니까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만들었다 그 말이요. 그런데 그 때부터 여러분들이 성경을 봤겠지만 첫 사람 아담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 말이요. 그 이후로 모든 인간은 완전 전적으로 타락이 됐어요.

 

그 때부터 인간은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가치평가를 내리는 눈이 달라졌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는 것이 하나 있고, 이건 불변이요. 그런데 타락한 인간 편에서 볼 때에 ‘이것이 옳다’ 하는 것이 또 하나가 생겼어. 그러니까 주관이 둘이 생겼다 그 말이요. 거기에서부터 인간은 가치성 평가성 취미성 소원성 이게 전부 다 비뚤어져 버렸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 인간을 이 세상에 집어넣고 사건 환경 물질 존재 이런 걸 동원시켜서 나를 만든단 말이요. 나를 만드느라고 그렇게 하시는 건데 인간 자기는 타락이 됐기 때문에 그게 싫단 말이요. 그래서 하나님은 ‘너는 그게 행복이 아니고 나를 닮아라. 그래야 네가 행복해진다’ 이러시는데 타락된 나는 어찌하든지 세상 것을 잔뜩 가지고 살아야 이것이 자기 행복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 말이요. 말하자면 ‘돈이 많으면 나는 행복하다’ 자꾸 그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요.

 

‘돈을 많이 가져야 행복해진다’ 이런 생각을 누가 갖고 있지요? 인간이.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라고 해서 내가 그렇게 갖고 있는 거요, 인간 제가 그렇게 갖고 있는 거요? 내가.

 

여러분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죄다 물어봐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집니까?’ 그러면 그들이 뭐가 많이 있어야 행복해진다고 그러지요? 돈. 그렇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역시 ‘하나님 잘 믿어서 이 세상서 복을 많이 받으면 행복해진다’ 그렇게 되면 질적으로 볼 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아요, 달라요?

 

첫째, 안 믿는 사람이 생각하기를 ‘내가 세상에서 돈 보따리를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 누구에게 물어도 그 말을 하지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잘 들으세요. 예수 믿는 사람이 생각하기를 ‘예수를 안 믿고 부자 되는 것은 소용이 없고 내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잘 믿어가지고 하나님이 나에게 부자로 만들어 줘야 내가 행복하다’ 하는 그게 있어요.

 

그러면 예수 믿는 이 사람의 속이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속과 그 질이 같아요, 달라요? 같지요.

 

그 다음에 세 번째로는 이게 또 하나가 있어. ‘세상 것이 많고 적고 하는 이거는 하나님 아버지가 하실 일이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모든 일거리를 나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을 닮는 하나의 방편이다. 그러니 일거리를 주면 내가 할 거고,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나에게 행복이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일을 안 한다가 아니라 일은 일대로 열심히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은 일을 해도 그 마음중심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렇게 살다보니 부자가 되려고 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덤으로 부자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거지요. 아니면 욥과 같은 그런 일을 당할 수도 있고요.

 

자, 그러면 첫째 둘째 셋째 사람이 있는데, 첫째 사람과 둘째 사람의 속이 비슷해 보입니까, 다르게 보입니까? 비슷하지요. 비슷하다면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지요? 겉으로 볼 때 두 번째 사람은 믿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세상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그 면에 있어서는 첫째 사람과 같아요, 달라요? 확실히 같습니까? 같지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느니라.’ 속은 같습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사람을 봅시다. 첫째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은 그 속이 같은데, 이 세 번째 사람의 속도 이 사람들과 같습니까, 전혀 다릅니까? 확실히 다릅니까? 확실히 다르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볼 때 ‘요게 신앙이다’ 하고 착 단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첫째요, 둘째요, 셋째요? 셋째. 확실합니까? 그게 신앙이란 말이요. 그게 진짜 신앙이란 말이요.

 

둘째 사람을 우리가 분석을 해 봅시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잘 보이니까 물질축복을 많이 줬구나’ 했는데 하나님이 그걸 홀딱 걷어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둘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될까요? ‘잘 믿어도 소용이 없다’ 하는 이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다 뺏어가 버리니까 ‘잘 믿어도 소용이 없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 사람이 자기가 부자로 있을 때에는 자기 마음속에 ‘잘 믿어도 소용이 없다’ 하는 이 마음이 들어있다고 하는 것을 자기가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그 사람 속에는 속에 노상 그게 들어있었단 말이요. 들어있었지만 부자가 돼 있을 때는 그 마음이 자기 속에 들어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단 말이요. 그러나 자기의 물질을 걷어가니까 자기 속에 들어있었던 그것이 이제 드러나는 거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볼 때에도 ‘예수 잘 믿으니 부자가 됐구나’ 했고,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그래, 내가 예수를 잘 믿었더니 축복을 받았다’ 하고 생각을 한 거지요.

 

이런 사람을 교회에서 믿음 좋다고 올려주지요. 목사님도 올려주고, 자기도 스스로도 올려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고 ‘저것들이 잘 모르는구나’ 해서 하나님께서 다 걷어가 버렸습니다. 걷어가니까 그 사람의 믿음이 드러납니까? 속이 드러나느냐 그 말이요. ‘자, 봐라. 너희들은 저 사람이 믿음 좋다고 봤지?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복을 준 줄 알았지? 너희들이 저 사람을 다시 한 번 봐라’ 하고서 사건을 줘가지고 홀딱 다 뺏어가 버리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요, 나는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요’ 하고 드러나 버리지요.

 

자기 속에 들어있는 거는 평소에는 자기가 잘 몰라요.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그 못된 자기에게 자기가 속으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우리는 남에게 속는 것보다 못된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 굉장히 많아요. 손해 보는 게 많아요.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했다 했을 때 누가 미련한 사람이지? 사기꾼이요, 자기요? 자기지요. 그렇지요. 내가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했으니 사기꾼 저 놈이 나쁜 놈입니까, 아니면 내 속에 사기꾼이 들어앉아 있었습니까? 내 속에 사기꾼이 있었습니다. 단지 사기꾼이 나에게 와서 살살 거리니까 내 속에 들어있던 그 못된 사기성이 ‘그래 그래’ 하면서 장단을 맞춰 들어간 거지. 그러니까 못된 그 자기에게 자기가 손해를 봤어. 그러니까 못된 것이 들어있으면 결국은 자기는 망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내 속의 못된 자기와 참 자기를 깨닫게 해서 어느 자기를 버려야 될지, 어느 자기를 내가 가져야 될지를 분별하도록 가르쳐 주고 있어요. 이게 성경입니다. 이게 예수 믿는 이치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믿어야 돼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부자 된다’ 하니까 ‘아, 주십시오. 주십시오.’ 주긴 뭘 줘? 그렇게 가면 그 사람은 쓸모없어. 그런 사람은 쓸모가 없어요. 그 사람 폐인이야.

 

이런 교훈을 해서 고쳐주려고 하면 ‘저만 제일인가’ 하고 있으니 ‘그래, 네 마음대로 살아봐라. 네 결과가 어떻게 되나?’ 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결국은 얼마 못 가서 그 결과를 보게 돼요.

성경을 놓고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자기 속을 보고 남의 속도 보고. 남의 속을 볼 때에 ‘아이고, 저 놈 순 나쁜 놈이구나’ 그렇게만 보지 말고 내 속을 다시 쳐다보면서 ‘내 속에도 그것이 들어있구나’ 이래야 지혜롭지요. 이래야 깨닫는 사람이고. 남의 속만 쳐다보고 정죄만 해 나가면 천하 못된 사람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꾸 간섭을 해. 별 것이 와서 다 간섭을 해요.

 

질문: 십일조에 대하여.

 

우리가 이거는 알아야 돼요.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보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이 태어날 때 갖고 온 것이 있습니까? 십 원짜리 하나 들고 나왔어요? 벌거벗은 몸으로 왔지요. 그런데 나와서 보니까 하나님이 환경을 다 만들어 놓고, 어머니 젖을 다 준비해 놓고, 기저귀도 준비해 놓았지요.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는 부모로서 이런 거 저런 거 다 준비해서 할 도리를 다 한 거지만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 면으로 보면 하나님이 그 모든 걸 딱 준비해 놓은 거지요.

 

부모 없이 어떻게 아기를 태어나게 해요? 그건 안 돼요. 부모가 아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아기를 태어나게 하고, 시집장가 가는 것도, 또 하나님이 아이를 길러서 어른이 되어 시집장가 가게 해서 아기를 생산하게 하는 이게 다 하나님이 하게 하는 거요. 굉장히 신비로워요.

 

인간 편에서 보면 나이가 드니 결혼을 하는 거지만 우리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돼요. 딱 준비해 놓고 그 어린아이가 자라날 수 있도록 다 준비해 놨어요. 그러니까 그 아기는 부모가 만들어 놓은 거기서 입고 먹고 마시고 그러지요. 그런 것처럼 내가 어린아이로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놨단 말이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심지어 부모까지도 하나님의 것이지 자기가 갖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런 건 다 임시적으로 이용하도록 하나님이 준 거예요. ‘네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면에 이걸 사용을 해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형제를 다 준 것이니 이들과 연관을 지어가지고 부지런히 부모사랑도 깨닫고, 자식사랑도 깨닫고, 줄줄도 알고 받을 줄도 알고, 옳은 것을 주고 옳은 것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잘 닮아나가라는 것입니다.

 

또 시간이 되면 하나님이 부모를 데려가 버려요.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살아있을 때에 부지런히 하나님의 옳은 것을 자녀들에게 주고, 자녀들은 부모님 살아계실 때에 하나님의 옳은 것을 부지런히 받아야 된다. 이게 원칙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내라고 그랬어요. 왜 내라고 그랬느냐? 하나님께서 돈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돈을 가지고 사탕을 사 먹나? 십일조를 내라는 이유는 하나님은 뺏는 방식으로 순종을 하도록 해서 하나님의 것을 주게 돼 있어요.

 

어른이 어린아이 손에 든 사탕을 보고 ‘그 사탕 나 좀 줘라’ 한다면 어린아이가 볼 때는 꼭 어른이 그 사탕을 뺏으려는 것 같지. 그런데 어린아이가 그 사탕을 어른에게 다 줘버리면 어른의 마음이 그렇게 기쁩니까? 그러면 ‘앗다, 더 사먹어라’ 하면서 돈을 주고, 아이에게 사랑을 더 줄 수가 있지요. 쉽게 말하면 그런 아이에게는 다 주고 싶단 말이요. 십일조를 바치라는 건 그런 이치와 같아.

 

또 하나는 우리 대한민국 백성은 대한민국에 세금을 바치지요. 안 바치는 사람은 없지요? 그렇게 해서 국가가 돌아가고 군대를 키우고 하지요. 그러면 그 군대의 혜택을 내가 받고, 국가의 혜택을 내가 받고 그러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어요. 쉽게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국가의 세금처럼 십일조를 낸다 그 말이요.

 

그런데 문제는 이거예요. 목사가 말하기를 ‘십일조를 안 내면 복을 못 받는다’ 라고 합니다. 무슨 복?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그 복을 염두에 두면서 내라고 강조를 한단 말이요.

 

감사가 되고 깨달아지면 ‘내라, 내라’ 안 해도 내는 건 자동적이 아니요? 그런데 문제는 아까도 얘기했듯이 ‘내면 네가 복을 받는다. 부자가 된다. 몇 십 배로 차고 넘치도록 받는다’ 하는 이걸 갖다가 쌀복 돈복에 붙여서 얘기를 하면 이거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뜻과는 달라져 버린다. 뜻이 달라져 버려요.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그 뜻이 달라져 버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건 기본적이란 말이요. 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기본적인 은혜는 그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가고 있어요. 알겠어요? 천국을 소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고 간섭이 가는 이거는 기본적으로 돼 있어요.

 

이처럼 기본적인 면의 은혜를 받게 되고, 더 나가서 세상만사를 볼 때 ‘아, 이건 내가 자랄 수 있는 재료감이구나’ 하고 나가게 되면 자기가 더 큰 은혜를 받게 되지요.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십일조를 안 내서 그렇다’ 꼭 그렇게만 붙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믿음을 바로 깨닫게 해주려고 그와 같은 방법을 쓰는 면이 또 있을 수 있어요.

 

광주에 우리교회가 또 있어요. 그런데 그 전까지는 내가 강조를 안 해도 그곳에서 감사헌금 주일헌금 십일조가 있었어요. 수년 믿은 사람이니까 그거는 기본적이에요. 그런데 저번서부터 가만 보니 끊어졌어. 엊그제 광주에 내려가 보니까 그곳 가정이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이럴 경우 십일조를 안 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게 아니고 ‘왜 안 내게 되었느냐’ 하는 그 신앙 면에 심사가 들어가야 돼요. 그걸 알아야 돼요.

 

우리가 그런 거 있지요? 십일조를 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뭔가를 많이 주시겠지’ 하고 낸다면 이거는 무슨 마음이요? 복스러운 마음일까요, 속에 고약한 게 들어있어요? 욕심.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냈으면 그걸로 끝난 거예요. 하나님이 그걸 받아서 술을 받아먹던 과자를 사먹던 그건 내가 상관할 거는 아니에요. 하나님께 냈으면 그만이지 ‘냈으니 나에게 덤을 주겠지’ 그런 생각을 말아야 돼요

 

그런데 그런 행동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전부 껍데기고, 우리는 그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것을 봐야 돼요. 단순히 행동을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거냐? 행동을 안 한 이유가 있지 않느냐 그 말이요. 못 낸 이유가 있지 않느냐 그 말이요. 없어서 못 낸 거냐? 있어도 안 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요? 이유가 있지요. 그러니까 그 이유부터 고치자 그 말이요. 내는 것이 급한 게 아니고 이유부터 고치자 그 말이요.

 

안 낸 이유부터 파고 들어가면 속에 뭐가 들어앉아 있어요? 도둑놈이 들어앉아 있어. 그래서 십일조를 떼먹으면 도둑이라고 그런 거거든. 자기 속에 도둑이 들어앉아 있어.

 

또 사실 그래요. 여러분들이 앞으로 경험하겠지만 하나님의 십일조를 떼먹고 잘 되는 꼴은 없어요. 목적은 그런 건 아니지만 이건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면으로 슬슬 경험이 되는 거요. 우리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감사헌금은 못 내더라고 십일조만큼은 떼먹지 말고. 십일조는 못 내면서 감사헌금은 내는 건 안 돼요. 무슨 생일헌금이나 자잘한 그런 거는 못하더라도 십일조는 내요. 다른 거는 없으면 못 내는 거고, 원하는 대로 내는 거지 내라고 강조를 한다고 해서 내는 것도 안 되고.

 

보면 사기꾼 목사도 많은데, 내가 평소에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말씀의 정신을 알았다 했을 때, 예를 들면 아무개 집에 소가 열 마리가 있다 그랬을 때에 내가 그 분에게 ‘너 소 한 마리 하나님께 바쳐라’ 그런다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들리지요? ‘아이고, 목사님 속에 도둑놈이 들었구나’ 그럽니까? 그거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돼요.

 

물론 이 목사가 소 한 마리 해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아, 저 사람이 저렇게 살다가는 안 되겠다. 소를 하나님처럼 붙들고 있구나. 저렇게 있다가는 저거 다 달아겠구나’ 했을 때에 그 사람을 바로 깨우쳐 주려고 그러는 거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이 바로 깨우치면 그 사람은 살아요. 신앙심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런데 나의 그 마음을 모르면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에도 사기꾼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말처럼 들리겠지요.

 

그러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저를 따라다니면서 오래 믿은 사람이야 제 마음을 알 수 있겠지만, 그리고 혹 ‘소 한 마리 가져 오너라’ 해서 직접적으로 깨닫게 해 줄 일이 있을 런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저는 평소 전하는 말씀 속에 앞에 말한 그 이치가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제가 그런 강조를 하지 않는 거고 그래요. 말씀을 깨닫는 속에서 바로 돼야지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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