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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계시를 따른 신앙이 진짜입니다.

요나 궁극이............... 조회 수 728 추천 수 0 2014.08.15 10: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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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10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1절-10절.

 

1절-10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에녹은 자녀를 낳으면서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을 했는데 그것은 인격적 무형적 동행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초절이 아니고, 극기 극복이 아니고 초월이다. 고로 에녹은 극복이 아니고 초월적 신앙으로 산 겁니다.

 

‘좀 더 참아라. 좀 더 참아라. 참자, 참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런 마음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있을 수는 있으나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거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떤 거냐? 초월이다. 하나님을 바로 믿다가 열심히 믿다가 보니 모든 것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다 지나가 버리는 것.

 

그리고 초월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쓰리고 아픈 십자가의 고난을 갖다가 기독교인들이 육신의 아픔에다 자꾸 고조시키는데,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아프신 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참았다고 하는 거지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속에 들어있는 십자가를 지시는 그 목적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에 삼키지를 않았습니다. 고통에게 삼키지를 않았고 오히려 성도를 사랑하는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때 하나님의 자녀가 해방이 되는 순간인데,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그 면에 즉, 사랑하는 그 면에 당신의 전 인격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참자’ 그게 아니고 사랑으로 그 아픈 것을 모두 집어 삼켜버렸단 말이요.

 

그러니까 제 3자가 볼 때는 아픈 사건이고 고통이지만 예수님 본인에게 있어서는 언제 당신 손발에 못을 박는지, 언제 쓰라리는 건지, 언제 아픈 건지 그것을 느끼지를 못한다 그 말이지요.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육신의 아픔을 느끼지를 못해요. 감각성이 죽었다는 게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는 그 애성이 당신의 고통을 삼켜버렸다 그 말이요.

 

우리도 일을 하다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한 일에 정신을 쓰다보면 언제 손가락을 베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런 때가 있어요. 그런 거와 같다 그 말이지요.

 

만약의 경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 쓰라림에 아픔에 정복이 되었고 감염이 되었고 삼켜졌다면 그렇게 되면 성도를 사랑하는 면에, 성도를 생각하는 그 면에 순간적으로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때는 예수님은 중보의 사역이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고난에서 하나님 앞에 만족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즉 우리의 구원사역은 실패가 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그 때는 성도가 죄에서 해방의 순간이요,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그 애성이 극치의 순간입니다. 또한 당신의 기쁨 역시도 최고의 극치의 순간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에게 삼켜졌다면 이것은 당신께서 쓴 잔을 마시게 되는 것이므로 그 십자가의 사건에서 패배를 하는 것입니다. 쓴 잔을 마시는 것은 승리가 아니고 패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신 것은 바로 이 패배의 쓴 잔을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 패배의 잔을 옮겨달라는 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인데, 이 기도는 역시 하나님의 뜻에 목적에 맞는 기도요, 하나님 당신 역시 그렇게 해주고 싶어 하시니 예수님의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적중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애정성이 빈약했다면 십자가의 고통에 삼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나를 극치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나를 위해 십자가를 능히 지셨고, 또한 십자가의 고통을 초월한 겁니다. 사랑으로 초월했다 그 말이요.

 

이마에 가시가 박히는 고통과 손목과 발에 못이 박히는 그 아픔에 당신의 마음이 쏠려가지고 ‘고통스럽지만 내가 이 십자가를 져야 만이 성도를 죄에서 해방시킬 수가 있다. 그러니 참자’ 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졌다면 이건 이미 고통에게 정복을 당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의 아픔보다도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진함이 월등하기 때문에 그 애성이 십자가의 고통을 집어 삼킨 겁니다.

 

이제 이렇게 모든 고통을 초월하게 되면 그 사람은 기도가 달라져요.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 도취가 되는 사람은 기도가 달라져요.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편으로 말씀을 하시는데 그 첫째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리, 보이스로 오는 말씀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오시는 말씀을 말합니다. 1장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한 것은 인격적으로 임했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임하심은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고, 그리고 한 번 들려져서 그 때만 해당되는 소리가 아니고 그 당대뿐만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영원히 그 말씀이 자기 속에 머무는 겁니다. 이게 인격적으로 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다가 나중에는 천사를 통해서 말씀을 하시고, 또 처음에는 천사가 말을 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그런 말씀도 있는 겁니다. 참 희한하지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대개는 이 방편을 통해서 많이 말씀을 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을 하실 때에 이 방편을 많이 사용을 했습니다. 또 사자가 말을 하면서 ‘나 여호와가 가라사대’ 라고 한 말도 역시 그런 방편이 되겠습니다.

 

네 번째는 동물들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성경에 그런 경우들이 있지요?

 

다섯 번째는 마귀나 사단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욥기에서나 또 예수님께서 금식기도 하신 후에 마귀가 나타나서 한 말이 있지요.

 

그 외에 여러 곳에 각이한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천사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나, 인간을 통해서 하신 말씀 등은 언어로 통해서 말씀을 했고, 그리고 성경에는 언어로 표현된 것을 기록한 것도 있지만 언어나 서한이 아닌 사건 또는 활동으로 하신 말씀도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보면 사람들이 이건 잘 몰라요.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 활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이걸 잘 몰라요.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의 에를 든다면 아버지가 ‘이리 오너라’ 그랬는데 아들은 온다 간다 언어로 표현을 하지를 않고 딴 데로 가버립니다 그러면 이거는 무슨 뜻이지요? ‘오기 싫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안 듣겠습니다’ 하는 걸 활동으로 말을 한 거지요.

 

그리고 사건으로 하는 말씀이 있지요? 우리 인간의 세계에도 그런 게 있거든요. 사람이 한강물에 빠져 죽는다든지 하는 이건 하나의 사건이지요? 그러니까 사건으로 하는 말도 있다. 그런 게 많이 기록이 돼 있다 그 말이요.

 

이처럼 어떤 사건, 또 인간의 활동성, 동물들의 활동성 등 여러 가지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성경에 기록된 이 전부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것을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하느냐? 그것은 어떤 활동이던 사건이던 언어이던 전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계시하신 계시목적의 활동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기록이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 66권 전체를 문서계시라 또는 성문계시라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에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해 놓은 것을 역사계시라고 말하고, 그리고 인간의 생활이나 활동이 기록된 것은 형용계시라, 형식계시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니엘서 7장에 사자나 염소 등등이 나타나고 있지요? 이런 것은 상징계시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이처럼 여러 계시들이 많은데, 이 여러 계시 안에는 영적 계시가 들어있음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문서계시는 성문계시인데 이 성문계시 안에는 또 불문계시가 있음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성문계시, 문자적으로 된 그 속에 불문계시가 있다.

 

그래서 성문계시를 읽고 듣고 또 그대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성문계시를 순종하고, 나아가서는 불문계시도 순종을 해야 됩니다.

 

또 이 모든 계시에는 그보다 차원 높은 은밀계시가 있음을 또 알아야 합니다. 이 은밀계시를 모르고는 자기의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또 은밀계시 위에는 신의 의지계시가 있는 겁니다. 이 의지계시는 자기가 은밀계시를 깨달아 자원적인 순종을 해 나갈 때에 하나님의 타의가 자기의 자의가 되어지는 것이니, 이때에 이 하나님의 의지계시를 알게 되는데 이 계시가 최고의 계시입니다. 이렇게 되어진 것을 하나님의 의사단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과의 의사단일은 하나님의 의지계시에서 되어지는 것이지요.

 

의사단일이란 존재적으로는 인간이 개체로 있으면서, 또한  실력적으로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의사는 하나님과의 단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단일의사가 돼야 된다 그 말이요.

 

믿는다고 하지만 의지계시에 도달하지 못하여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이 되지 못한 것이 큰 불행이요, 자기에게 영원히 불행이니 단일이 되지 못한 그 면에서는 천국과 자기와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방편으로 임했는지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요. 그저 영감으로 마음의 느낌으로 임한 건지, 아니면 요나의 귀에 무슨 음성으로 임했는지? 어떤 방편으로 임했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첫 번째는 인간은 인격자입니다. 인격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자유가 있고 평가성이 있고 느낌성이 있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물론 느끼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지요. 청각적으로 느끼고, 시각적으로 느끼고, 시감적으로 느끼고, 영각성으로 느끼고.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게 다 있지요? 금수에게는 그런 게 없습니다. 고로 우리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다. 인격자다.

 

두 번째는 우리 인간은 영원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선을 넘어가서도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내 앞에는 사선이 있는데 인간 자기가 이 사선 너머의 영원을 무시하고 살 수도 있고 긍정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저 사선 너머의 영원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없어지느냐? 또한 그 세계의 영원성을 긍정한다고 해서 있는 것이냐? 그런 건 아니지요. 인간 자기가 무시하거나 긍정에 의해서 되는 게 아니고 사선 저 너머는 영원한 세계가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선 저 너머, 죽음 저 너머에 영원성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그거는 가봐야 알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현재 경험적으로 실제가 아니고 다만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지요.

 

사선 저 너머에 분명히 영원이 있는데 만일 내가 영원을 무시하고 살았다 할 때 죽은 후에 그 세계에 가 보니 영원의 세계가 있다고 그랬을 때는 얼마나 후회막급이겠느냐 그 말이요. 또 아닌 말로 실제적으로는 영원계가 없는데 내가 영원게가 있다고 믿고 살았다고 한 번 생각을 해 볼 때 그 때 가서 영원계가 없다고 했을 때 나에게 무슨 손해가 있느냐 그 말이요.

 

그리고 죽음 저 너머 상태는 무감각 상태가 아니고 감각상태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서 감각상태로 사는 자가 누구냐 하면 이 땅에서 영각성으로 산 자입니다. 영각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은 자일수록 그 나라에서 감각이 예민하고 민감한 겁니다. 만일의 경우 믿는 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안 하게 되면 그 세계에서 활동적으로도 둔감해지고 느낌적으로도 둔감해지는 겁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에 대해서.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있는데 이 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을 어떻게 두어야 하느냐? 또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동물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럴 때에 그 권위성을 어떻게 두어야 하느냐? 또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사도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들이 있는데 또 그 때의 권위성을 어떻게 두느냐?

 

시간적으로 어떻게 하신 말씀이든지, 순서적으로 어떻게 하신 말씀이든지, 공간적으로는 어디에서 말씀하신 것이든지, 또는 성전에나 강변에서나 허허벌판에서나 어떻게 말씀을 하셨던지, 방편적으로 어떻게 말씀을 하셨던지, 누구를 통해서 무엇을 통해서 말씀을 했든지 그 말씀의 발설자가 하나님이시라면 그 권위성은 동등한 겁니다.

 

그런데 보통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은 권위성을 더 두고, 뭘 통해서 말을 하면 권위성이 그만큼 삭감이 되는 것으로 알지요?

 

우리 인간들은 그런 걸 많이 볼 수가 있을 겁니다. 어른이 직접 말을 하면 권위성이 더 있고, 어른이 아이로 통해서 말을 하면 권위성이 조금 덜한 것 같지? 그래서 아이가 어른의 심부름을 가서 말을 할 때는 빈정거리기도 하고 그렇게 되는데 어른이 직접 갔을 때는 빈정거리거나 그런 게 없는 거거든.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권위성을 두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짐승을 통해서 말씀을 하실 때에 내가 그 말씀에 순종을 안 하면 나는 뭣보다 못하지? 그럴 경우 무엇보다 못하다고 보게 되지요? 짐승보다 못하다 그렇게 되지.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과 전도사님이 설교하는 것과 교인들이 말씀의 권위성을 어디에 더 두지요? 목사님. 그게 문제란 말이요. 목사님이 말할 때는 뭔가가 권위성이 더 있는 것 같고, 전도사가 말씀을 선포할 때는 권위성이 별로 없는 것 같고. 그래서 교회에서 교역자를 초청할 때 초청하는 분이 전하는 말씀 속의 하나님의 말씀성을 보지를 않고 ‘우리교회는 목사가 와야 된다’ 하지요. 그 뭐요? 그 뭐하는 짓들이요? 아무리 목사라도 말씀이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면 그 뭐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통해서 말씀을 하셨던지 간 그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인격성이 들어있다는 거. 그러므로 우리 기독자는 말씀 속에서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찾아서 그 말씀과 동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 기독자가 말씀과 동행을 해야 하느냐? 그 이유는 그 인격성과 동행을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성품을 입느니만큼 활용적인 천국이 많아지고 자기의 천국이 커지는 겁니다. 중생된 영 자체의 실력이 더 장성되고, 육체가 신령체로 부활했을 때 부활한 그 영체가 더욱 민첩해지고 민활해지고 아주 광명해지는 겁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옛날에 성문계시가 완성되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신 것이 있고, 선지 사도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도 있고, 짐승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도 있고, 사단 마귀로 통해서 하신 말씀도 있고, 어느 한 개인의 생활 활동을 통해서 하신 말씀도 있고, 뿐만 아니라 큰 사건을 들어서 사건적으로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입혀주실 구원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 활동 크고 작은 사건 속에 하나님의 인격성이 들어있어서 그 말씀에서 깨달아져서 하나님의 의지계시까지 도달하게 되면 하나님의 단일성의 성품으로 나갈 수 있고, 내가 하나님의 의지계시적인 그 단일 성품에 하나로 되어서 이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성화구원이 잘 이루어져 간다고 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현재 우리가 생활하는 이 속에서, 모든 사사건건 생활 활동 속에서 자연계시로도 깨닫고, 일반계시로도 깨닫고, 말씀에서 깨닫고, 생활 활동에서 써먹고, 이렇게 영적인 면에 성장성이 있게 도와주시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그 생활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짧디짧은 한 세상을 걸어갈 수 있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오늘날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믿는 사람들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보면 성문계시에서 순종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지계시로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좇아서 만들어지면서 살고자 하는 자는 참 드문 줄 압니다.

 

아버지여,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했는데 그 믿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버지여, 저희들은 깨닫고 좋은 사건이던 나쁜 사건이던 어떤 일에서든지 어떤 환경 처소에서든지 늘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어 가는, 우리의 구원목적을 잘 이루어 가는 복된 당신의 자녀의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 중에 육적인 병자가 있거니와 영적인 면에서 성장을 못해서 어린 상태로 있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고 믿음이 너무나도 연약하여 없다시피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 속에 큰 믿음을 허락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실진대 사역적 믿음으로 나갈 수 있는 그 길도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룰구원을 충분하게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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