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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욘1: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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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4절-10절.
4절-10절: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이 요나서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택한 백성들에 대한 목적성과 소원성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요나는 불택자의 모형계시가 아니고 택자이면서도 타락한 인간의 주관성과 자율성을 그대로 드러내놓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이 구원역사를 만능의 능력으로 강권적으로 하실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절대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 대해 강권을 쓰지를 않으십니다. 딴 거(몸)는 다 칠 수가 있는데 이성의 자유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나뭇가지를 탁 부러뜨리듯이 그 자유성을 부러뜨리지 않는다 그 말이지요. 그 이유는 심판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바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모든 우주만물 자연계를 동원시키고 있는 겁니다. 요나가 자기가 타고 가는 이 배, 또는 요나 자기를 숨겨놓은 이 배, 또는 요나 자기가 의지해 놓은 이 배. 그러니까 이 배는 패역한 요나를 싣고 가는 하나의 집이요, 자기요, 또는 사업이요, 즉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전부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다 자기를 의지하고 의존하고, 말씀에다 자기를 맡기고, 말씀에다 자기를 담아야 했는데 그렇지 하지를 않고 자기를 배에 담았어. 말씀이 자기에게 가자고 하는 대로 가야 하는 이게 선지자요, 이렇게 가야 할 선지자가 자기를 그 배에다 실어버렸어.
배의 보호를 입었고, 배가 가는 대로 자기가 가고 있고, 배에다 자기를 깊이 숨겨 놓았으니 하나님께서는 1차적으로 배를 때려서 깨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요나를 직접 치지 않고 요나가 의지하고 있는 그 배를 파도를 가지고 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시기 질투가 굉장히 많지요? 사랑하면 시기 질투가 나오지요.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살아야 할 요나. 그렇지요? 그런데 지금 이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보호를 버리고 배의 보호를 입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배의 보호를 입으려고 하고요. 이것을 이제 표면적으로 보면 요나는 하나님을 자기를 해칠 분으로 보았기에 이 하나님을 피해서 배의 보호를 입고 배 밑층에 깊이 들어가서 ‘배야, 너는 나를 보호해다오. 나를 꼭꼭 숨겨다오’ 하는 식으로 돼 있다 그 말이요.
지금 이런 자세로 배에 탄 요나가 보이느냐? 보이지요? 그렇게 배에 탄 요나가 보여져야 합니다. 인간이 그것(배)의 보호를 입으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가 그 말이요.
또 이면적으로 보면 이 요나는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을 이탈한 겁니다. 또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은 이면적으로 보면 자기는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느라고 한 것이지만 또 한 편으로 보면 이것은 배에 납치된 겁니다. 그러니까 배에 포로가 됐다 그 말이요. 또한 ‘이게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거기에서 사망에게 포로가 됐다 그 말이요.
죄에게 사망에게 물질에게 세상에게 포로가 되어서 가고 있는 이 요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동원시키고 자연을 동원시키고 존재를 동원시키는데, 요나를 살리기 위해서 배를 깨려고 한다 그 말이지요.
지금이 20세기야 21세기야? 오늘날 21세기의 요나가 많지요? 사업에 폭 쌓여있는 거, 진리의 말씀에 쌓여있지 않고 세상 그 어떤 것에 폭 쌓여있는 거.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영이 중생된 성도입니다. 그렇지요? 중생한 자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물질에 잡히지 말고 진리와 영감에 사로잡혀야 한다. 물질에 잡히면 물질이 가자는 대로 가게 돼요. 또 환경에 잡힌다. 이거는 하나란 말이요.
성도는 비물질인 무형체의 말씀에 잡혀야 되는데 자기의 영이 진리와 영감에 잡히고 또 이성과 몸이 중생된 영이 가자고 하는 대로 가야 된다 그 말이지요. 즉 말씀이 가자고 하는 대로 움직인다 그 말이요. 사실인즉 요나에게도 말씀이 온 거지요. 지금으로 말한다면 진리와 영감이 왔단 말이요. 이 말씀에 계속적으로 순종해 나가면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생명 안에 있게 되고, 자원이 나오고 그래요.
성령은 또는 생명은 또는 말씀은 자기를 보호합니다. 나의 이성과 몸이 말씀 안에 담기면 말씀이 나를 보호하면서 니느웨로 갈 것입니다. 진리와 영감의 보호를 받고, 말씀을 타고 가고, 이성과 몸이 말씀의 보호를 받고. 말씀 안에 들어오면 이렇게 보호가 절대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아침에 교회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말씀대로 살면 말씀의 보호를 받고 만사형통한다. 이게 무슨 말이지요? 자칫 잘못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걸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고 사업도 잘 되고 하는 그 면으로 은근히 기울어진단 말이요.
눈에 나타난 가견적인 일을 놓고 ‘내가 신앙이 좋으냐, 안 좋으냐’ 또 그렇게 따진단 말이요. 그렇게 따지면 안 되지. 그렇게 되면 믿는 자가 세상일이 뭐든지 잘 돼 나가면 자기가 신앙이 좋은 것처럼 생각할 거란 말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 걸 믿음의 대가로 보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남을 또 그렇게 본단 말이요. 그렇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이 실지로는 신앙이 좋은데 그가 못 살고 어려운 일들이 자꾸 터지면 꼭 신앙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보게 된단 말이요. 그거 아주 잘못된 거지요.
세상에서 잘 믿어도 사건이 오기 마련이고 잘못 믿어도 사건이 오기 마련이고. 그러면 사건을 왜 주느냐?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자기를 진단케 하는 하나의 좋은 기회지요. 또 ‘신앙 면에 이겨나갈 수 있는가’ 하는 그 면에 또 기회가 되는 거고, 또 하나는 ‘내가 이것도 못 이기고 이 정도로 믿어서 되겠는가’ 하는 깨달음을 주거든요.
어쨌든 나에게 사건이 오는 것은 나를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리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예 보고 들어가. 하나님이 진짜 원수 쳐다보듯이 한다면 우리가 못 살아남아요. 살려놓을 필요도 없는 거고. 살려놓고 하나님이 뭐하려 신경을 쓰겠어. 사랑 때문이야.
‘말씀 안으로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성도로서 자기 주관에 의한 것이 되겠어요. 말씀 안으로 들어가면 진리와 영감의 보호를 받고 니느웨로 갈 수가 있습니다. 진리와 영감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면 어느 자기가 보호를 받는다는 말이요? 영이 주격이 되어있는, 신앙으로 바로 살고자 하는, 영적으로 생각하는,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그 면에 보호를 받아요. 말씀 안으로 들어가면 그 말이요. 안 들어가면 그 보호는 없어요. 안 들어가고 니느웨로 가서 일은 크게 했다고 할지라도 자기에게 일한 효력성이 없어요.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릿 시냇가로 가는 것은 아합 왕이 있는 데로 가는 것이거든요. ‘피해서 가나, 더 멀리 가나’ 그게 아니고 왕이 있는 데로 가라 그 말이지요. 그런데 자기가 말씀 안에 있으니까 그 말씀의 보호를 입은 겁니다. 하나님이 명령을 할 때에 말씀하고 진리하고, 또 자기가 진리와 영감을 붙잡고 가는 거하고 복합적으로 다 들어있는 거요.
또 ‘사르밧으로 가라’ 그럴 때에 말씀이 떨어진지가 한 달이 지난 후에 갔습니까? 즉시 갔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볼 때는 자기 혼자 간 걸로 보이지만 우리 성도가 신앙적으로 볼 때는 혼자 간 게 아니고 말씀과 같이 가는 거지요. 하나님과 같이 가는 거지요. 같이 가니 하나님의 보호를 입는 거 아닙니까? ‘가라’ 할 때에 가면 누가 책임을 지겠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책임을 지겠다는 게 들어있는 거지요.
요나가 니느웨로 갈 때에 먼저 할 일은 말씀 속에 자기를 담고 말씀 속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타고 ‘아멘’ 하고 이성과 몸을 움직여 나갈 때에 자기는 말씀의 보호를 입는 겁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자기의 피난처를 어디다 두었지요? 하나님. 그렇지요. ‘금우상에게 절하라’ 할 때에 자기의 피난처를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에게다, 말씀에다, 진리에다 자기의 피난처를 찾아야지요.
성경에 있는 모든 사건들이 정신적으로 보면 현 시대에서 다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 ‘금우상에 절하라’ 하는 거 없습니까? 있단 말이요. ‘절하라, 절하지 말라’ 하는 것은 ‘거기에 보호를 받지 말라, 보호를 받아라’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거지요.
절을 하지 않으니까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절을 하지 않는 그 사상이 미워서 풀무불 속에 집어넣었지요? 그러나 말씀을 붙잡고 절을 하지 않으니까 그 말씀이 자기를 보호해 줬습니다.
그 때에 그 말씀의 보호를 입은 그들에게, 말씀을 붙잡고 있는 그 때에 ‘기도하라’ 하는 이 명령이 필요합니까? 필요가 없어요. 기도는 왜 하지요? 말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거고, 말씀에 붙들리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말씀에 붙들려 있으면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말씀에 안 붙들린 채 불속에 들어가면서 ‘나를 보호해 주십시오’ 하고 들어간 사람이 있고, 평소에 말씀에 붙들려서 살면서 ‘날 보호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안 하고 불속에 들어간 사람이 있어요. 어느 신앙이 더 좋은 거요? 말씀에 붙들려서 들어간 사람은 말씀에 자체화가 되는 거지.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을 가만히 보면 꼭 금요일 날 철야기도를 안 하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말씀을 받으면서 말씀 속에 자기가 들어가고 말씀 속에 쌓여서 가야 할 요나인데 이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가지고 자기의 보호를 물질인 배에 두고 있고, 또 하나님을 피해서 배의 보호를 입고 배를 의지하고 배가 가는대로 가고 있어요. 이게 포로가 된 겁니다. 그렇지요?
예수 믿으면서 포로 된 사람이 많지요? 물질에 세상에 포로 된 사람이 참 많아요. 예수를 믿으면 이런 포로에서 벗어나야 하는 건데 속화된 기독교회에 가면 자꾸 얽매이게 하지요. 포로를 자꾸 만들어요. 사랑하면 끄집어내야지. 자유로 시켜야지 그 꼴을 어떻게 봐요. 그러니까 사랑치 않는다는 증거지.
중생한 기독자는 어떻게 살 것이냐? 기독자의 거처지, 의지하고 보호받는 곳, 갈 곳, 모든 위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겁니다. 말씀 속에 들어가서 말씀의 보호를 입고.
말씀 속에서는 말씀 밖에 있는 것을 갖다가 다 이용 활용 사용할 수가 있어요.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의 보호를 입고 사니까 블레셋이 공격을 하고 올라왔지요? 그러나 말씀 속에 있는 이 다윗에게 블레셋이 밥이 된 거지요. 그만큼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있는 겁니다.
투척하는 것도 신앙 면으로 말할 때에 평소에 인격화 자체화 시킨 거 아니요? 그런데 그건 아니고 평소에 세상 쪽으로 나가면서 여호와 하나님 이름으로 나가면 이기는 거요? 부르짖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요. 그런데 오늘날 그런 운동이 얼마나 많아요.
노래를 지은 사람이야 신앙적으로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 이겼네, 예수 이겼네’ 하는 그거 있지? 그러니까 예수이름으로 믿음으로 나가면 무조건 이긴다고 하는 어떤 미신적인 그런 거지.
성경에 홉니와 비느하스인가? 법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하고 나갔지만 법궤는 빼앗기고 살아남지 못했잖아. 그런 식이야. 이건 자기 주관성에 맞추어진 하나님이 되는 거지요. 오늘날 그런 기독교가 많이 보이지요?
우리 기독자가 ‘자기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느냐’ 하는 것을 심사할 필요가 있지요.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느냐? 나를 보호하고 있는 그 보호가 무엇이냐? 인간의 보호, 재물의 보호, 자기 재간의 보호,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요. 말씀의 보호가 아니면 그런 것에 보호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으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어떻게 사는 게 바로 사는 거요?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물질을 이용 활용하는 것인데 문제는 자기의 중심사상이, 자기의 인생관이 ‘물질 때문에’ 라는 것에 달려있으면 안 되겠지요.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기독자들이 일을 하는 것은 예수 잘 믿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러니까 예수 잘 믿기 위해서 돈 벌고.
수단이라는 것은 말씀을 받기 위해서 돈을 벌어서 차를 샀다고 하면 이건 수단이지. 그런데 차도 있고 시간도 많은데 그것 가지고 딴 데로 놀러가고 하면 그건 아니지요.
자기가 어디에 숨어 있느냐 하는 그걸 잘 심사해야 되겠어요. 그리고 숨어있다고 하는 그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다른 말로 하면 납치다. 왜 납치라고 보는 거지요? 그것이 가자는 대로 내가 끌려가는 거니까 납치지요. 자원이 되면 어떻게 되지? 진정한 의미에서 자원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자원이지요.
요나는 자원해서 갔지만 하지만 결과는 사망이고 심판이다. 따라서 자원이라고는 하지만 그 자원의 주격이 어느 주격의 자원이냐? 우리가 어느 주격으로 한 것이 진정한 자원인지? 그런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생명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 참 자원인데, 왜냐하면 그게 진정한 자유고, 하나님의 법까지 말리지 않는, 하나님도 좋아하는 허용하는 사랑하는 진정한 참 진짜 자원이니까요.
하나님의 법이 금하고 있는 자기의 자원은 사망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한 쪽에서 대립성을 갖고 있는 자원이기 때문에 그건 진정한 자원은 아니지. 인간 편에서 보면 자기 자유지만 자기의 자유라면 자기 마음대로 해야 하는 건데 자기 마음대로 안 되고 끌려가고 있지요. 끌려가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지요. 그렇지 않아요?
요나는 기독자요 성도요, 이 요나가 예를 들어서 샤시 문을 짜는 기술을 갖고 있다. 그런데 주일날 다시스에서 문을 짜달라는 주문이 왔다고 그랬을 때에 주일날 다시스로 내빼버렸단 말이요. 다시스로 가야 돈도 벌 수 있고 그래서 다시스로 갔어.
인간 자기편에서 보면 주일날 다시스로 간 게 자유인데 그러나 하나님이 볼 때는 그게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진정한 자유는 아니지요. 생명적인 자유는 아니지요.
인간이 자유라고 그러면 생명적인 자유가 돼야 되지 않아요? 끝까지 자기가 사는 자유. 그런데 자기가 자유라고 그러면서 쥐약이나 먹고 농약이나 마신다면 그게 자유일까? 자유가 아니지요. 그런 자유는 누군가가 막는 자가 또 있지. 예가 될 런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그 말이지요. 이건 납치다. 납치당했구나.
보이지 않는 배. 여러분들도 다 보이지 않는 배에 타고 있지? 내 몸이 어디에 담겨져 있느냐? 말씀을 타고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와서 깨버린다고 하는 점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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