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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학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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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 한인교회 |
2010년 11월 7일 주일 설교
김영봉 목사
“나의 무너진 성소”(My Temple Lain In Ruins)
학개서 1:1-11
1.
벌써 11월이 되었습니다. 상투적인 말이긴 하지만, 참 시간이 빠릅니다. 시간의 흐름이 나이에 따라 달리 느껴진다고 합니다. 10대에게는 10마일의 속도로 느껴지고, 60대에게는 60마일의 속도로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시간에 대해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울고 웃는 동안, 시간은 기어갔습니다.
청소년이 되어 꿈을 꾸고 그 꿈에 대해 말할 때, 시간은 걸어갔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었을 때, 시간은 뛰어갔습니다.
나이가 들자, 시간은 날아갔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결국 저는 알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진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고 불평은 잘 하지만, 그 시간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데 있어서 ‘때’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때를 안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금이 어떤 계절이며 몇 년 몇 월 몇 일인지, 몇 시인지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처럼 Daylight Saving Time이 해제되는 날이면, 시간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달력과 시계는 일상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물건이 됩니다.
둘째, “떄를 안다”는 말은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를 알고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 시점에 자신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같은 때를 아는 것은 시계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상황을 보고 판단할 줄 아는 지혜와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2.
오늘 우리는 교회력에 따라서 구약성경의 학개서 1장을 읽었습니다. ‘학개’는 예언자의 이름입니다. 학개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뜻은 ‘축제’(festival)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지키는 축제일에 그 예언자가 태어났던 것 같습니다. 학개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70년이 넘는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귀환한 후에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잠시, 역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시 유대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당시에 유대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바벨론에서 태어난 2세 혹은 3세였습니다. 처음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바벨론 땅에서 조국을 그리며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타국 땅에서 하나씩 죽어갔고, 조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자손들에게 넘겨 주어야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부모 세대의 간절한 소원을 마음에 품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고레스 왕이 포로로 살던 모든 민족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민족 재건의 가슴 벅찬 꿈을 안고 조국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벅찬 감동을 안고 조국 땅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비정한 현실을 마주합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현실은 그들의 감격을 한 순간에 증발시켰습니다. 조상들에게 들어 알았던 솔로몬 성전은 불에 탄 벽만 남아 있었고 성전 뜰에는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오랫 동안 경작하지 않은 땅은 거칠고 황량해져 있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선 아쉬운 대로 거처를 마련해 놓고, 생활의 터전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토지를 분배하고,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척박한 토지를 길들여야 했습니다. 당장, 딸린 식구들의 끼니가 문제였습니다. 위대한 조국 건설을 꿈 꾸었지만, 당장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했습니다. 폐허가 된 성전도 눈에 밟혔지만, 먼저 먹고 살 대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다른 일에 마음을 쓸 여가가 없었습니다.
조상들이 가르쳐 준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배 드릴 시간이 있으면 땅 한 뙈기라도 더 경작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바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앗지만, 자식들 먹일 음식도 부족한 판에 그것은 사치처럼 보였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좀 더 나아지면 모르되, 지금은 예배의 때가 아니요, 십일조를 드릴 때도 아니고, 성전을 재건할 때도 아니다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습니다. 당장 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당장 오늘 밤에 이슬을 맞지 않고 잘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성전을 생각하고 예배를 생각하고 십일조를 생각했다면, 너무도 가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탓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하나님이라도 눈 감아주고 싶을만큼 딱했습니다.
3.
땀 흘려 일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던 땅이 고분고분해져 갑니다. 처음에는 입에 풀 칠을 하기에도 부족했지만, 이제는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지었던 헛간 같은 집을 허물고 이제는 든든한 주택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만족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수입을 얻어야 했고, 더 큰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만족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된 후에나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개라는 예언자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제 앞가름 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학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유다 백성의 잘못을 다음과 같은 말로 고발하십니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때가 되지 않았다. 주님의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2절)
유다 백성의 죄는 ‘때’를 모르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더 큰 집을 장만하기 위해 일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고 조국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더 많이 일하고 자신을 위해 더 많이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성전을 지을 때가 올 것이고,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며, 십일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아니, 때가 벌써 지났는데, 유다 백성들이 탐욕에 빠져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다 못하여 학개 예언자를 불러내어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4절)
그러면서 하나님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5-6절)
너희가 많이 거두기를 바랐으나 얼마 거두지 못했고,
너희가 집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내가 그것을 흩어 버렸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나의 집은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하늘은 이슬을 그치고, 땅은 소출을 그쳤다. (9-10절)
무슨 말씀입니까? 유다 백성들은 더 많이 벌기 위해 예배 드릴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이 예배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땀 흘려 일해도 얻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돈을 많이 벌어 놓고 나서 성전을 짓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폐허로 방치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도 폐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쁘다고 하여 예배를 소홀히 하면, 삶은 더욱 복잡해지고 바빠집니다. 사정이 어렵다고 하여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지 않으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지고 쪼들리게 됩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같은 엄연한 진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학개 예언자를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고난과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다 각기 제 사는 일에 바쁜 나머지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범하고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폐허로 방치하고 하나님의 몫을 가로챘기 때문에 고난의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직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제 집 짓는 일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대궐같은 집에 살면서도 행복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안식일을 지킬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안식일마져 일하다 보니, 그 일에 열매가 부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십일조를 드릴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모든 수입을 자기 먹고 사는 일에 사용하다 보니, 먹어도 배부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때’ 탓을 하지 말고, 당장 일손을 멈추고 성전을 재건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때’를 핑게 삼지 말고, 당장 안식일에 일손을 멈추고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니 이제는 더 이상 ‘때’를 기다리지 말고, 적은 수입에서조차 십일조를 구별해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쓰고 남은 공간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공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일하다가 남는 시간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시간을 구별하여 바치라는 것입니다. 쓰다가 남는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수입에서 하나님의 몫을 떼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삶의 우선 순위에서 가장 앞에 모셨다는 사실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구별해 바친 그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축복의 원천이 됩니다. 너무 바빠서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을 없애 버리고, 너무 쓸 것이 많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없애거나 줄여 버린다면, 그것이 결국은 삶을 옭아매게 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시간을 없애 버리면 질식할 정도로 많은 일에 짓눌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공간을 없애버리면, 이 땅은 사막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 떼어 바치지 않으면 땀 흘려 얻은 수입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표현대로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6절)처럼 됩니다.
지난 주일 저녁, 대학에 가 있는 아이와 통화를 하는데, 아이가 많이 지쳐 있는 음성이었습니다. 시험과 레포트에 밀려 죽을 지경이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예배는 다녀 왔니?”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이가 머뭇 머뭇 대답합니다. “아…니…요. 죄송해요. 예배에 대해 생각도 못하고 지냈어요.” 저는 아이에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그랬구나. 얼마나 바빴으면 그랬겠니? 그런데 바쁘고 정신이 없을수록 시간을 떼내어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해. 그렇게 상황에 밀려다니면 계속, 평생 밀려 다니게 된다. 그럴 수록, 일을 중단하고 머물러 거룩한 시간을 만들어야 해. 그렇게 되면 네가 밀려 다니지 않고 네 삶을 운전할 수 있을거야. 바쁠수록 예배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아차, 내가 또 설교를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후회했습니다. 다행히, 아이가 “그건 그렇죠”라고 답을 합니다. 저는 아이가 그 진실을 꼭 기억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바쁠수록 예배는 더욱 절실해집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너무나도 바쁘기 때문에 하루에 2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보통 “나는 너무나 바빠서 기도할 시간을 찾지 못했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존 웨슬리 목사님은 거꾸로 말합니다. 바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쪼개어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바쁘면 바쁠수록 정신을 놓기 쉽고 실수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 동안 기도해야만 바쁜 일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떼어 바치는 시간이 나의 모든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어 줍니다.
5.
십일조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십일조 헌금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때로, 십일조를 드리면 몇 곱절의 보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고, 한 번 테스트 해 보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것은 십일조 헌금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은 더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한 투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받은 은혜와 축복에 대한 나의 고백이요 헌신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제일 우선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행동입니다. 적어도 그 정도는 떼어 바쳐야만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마 6:21). 돈은 우리 시대에 가장 큰 보물입니다. 그 보물에 우리 마음이 묶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떼어낼 수 있느냐는 자신의 믿음의 정도를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정도의 돈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됩니다. 최소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리라는 말은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정도는 떼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일조 헌금은 우리를 물질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는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쓰다가 남는 것을 드리려 하면 절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입에서 가장 먼저 십일조 헌금을 성별해 바치고, 내 손에 남겨진 것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십일조를 영적 훈련으로 사용하다 보면, 점점 불필요한 소비가 줄어들게 됩니다. 욕심대로 쓰며 살던 습관에서 벗어나, 꼭 필요한 것을 위해 책임있게 돈을 사용하게 됩니다.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는 항상 부족했던 돈이 십일조의 영적 훈련을 하고 나서 여유가 생깁니다. 부족하더라도 그 물질적인 부족을 채우고도 남을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만들어집니다.
십일조를 율법처럼 지켜 가지고는 이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훈련입니다. 우리를 물질주의로부터 보호해 주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영적인 무기입니다. 또한 십일조는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치를 바로 잡아 줍니다.
십일조에 대해, 유다 백성들처럼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게지에, 아이들 학비에, 여행비에, 생활비에 쓸 일이 너무 많아서 아직은 십일조를 시작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경제적인 쪼들림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십일조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6절을 말씀을 읽고 또 읽어 보았습니다.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6절)
이 말씀의 원뜻은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아서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실 것이 신통치 않아서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입는 옷도 변변하지 않아서 두 겹 세 겹으로 걸쳐 입어도 여전히 춥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제게는 또 다른 뜻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즉, 그들의 영적 상태가 공허하여 산해진미를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최고의 음료를 먹어도 만족하지 못하며, 모피 털옷을 입어도 추위를 느낀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있습니다. 록 그룹 U2의 리더인 보노(Bono)가 경험했던 ‘내 마음에 뚤린 구멍’(Hole in My Heart)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실해지면 그 공간이 비어버립니다. 그 공간이 비어 있으면, 아무리 먹어도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공간이 비어 있으면,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공간이 비어 있으면, 아무리 옷을 끼어 입어도 속에서 한기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그 공간이 하나님으로 인해 채워져 있으면, 육신적인 허기를 느끼더라도 마음은 만족할 수 있고, 육신의 목은 말라도 내적 갈증은 채워져 있게 됩니다.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워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든든히 서 있으면 내면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존재론적 고통은 느끼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6.
하나님을 내 존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마음으로 인정할뿐 아니라,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가 행동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내 시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떼어 하나님께 바치는 행동, 내 공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동, 내 마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행동, 그리고 내 수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떼어 바치는 행동—이같은 행동을 통해 내 마음의 고백은 견고해지고, 하나님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존재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 모든 삶을 다스리게 되고, 그럴 때 참된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다 백성들처럼 내게는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지금이 그 때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바쁜 때일수록, 힘겨울 때일수록, 이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 공간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 시간을 할애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큰 물질을 구별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중요한 존재로 모셔 들이고 인정해야만 그분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십니다. 그분을 우리 삶의 가장자리에 세워 두면 그분은 우리를 위해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학개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십시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각자의 소행을 살펴 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 내가 그 성전을 가깝게 여기고
거기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겠다.
나 주가 말한다. (7-8절)
그렇습니다. 더 이상 때를 탓하지 말고, 상황을 탓하지 말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읍시다. 저와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 성소를 만드십시다. 시간의 성소, 마음의 성소, 공간의 성소, 그리고 물질의 성소를 만드십시다. 그 성소를 크게 만드십시다. 하나님께 큰 자리를 내어 드립시다. 그렇게 큰 성소를 만들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 내실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말도 아니고, 학개 예언자의 말도 아닙니다. 8절 마지막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주가 말한다”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니 믿어도 됩니다. 아니, 믿어야 합니다. 믿고 실천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행하시는 주님,
바쁘다는 핑게로 시간의 성소를 허물고
어렵다는 핑게로 물질의 성소를 허물고
아직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불쌍한 저희들입니다.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주님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성소를 다시 세우게 하소서.
예배와 기도로써 시간의 성소를 세우고
십일조와 감사의 예물로써 물질의 성소를 세우며,
섬김과 돌봄으로써 공간의 성소를 세우게 하소서.
주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환히 비추도록
큰 성소를 마련하게 하소서.
지금, 바로 시작하도록 저희를 흔드소서.
아멘.
<속회 자료> 2010년11월 7일 설교
“나의 무너진 성소”(My Temple Lain in Ruins)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356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학개서 1:1-11을 읽습니다. 유다 백성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나에게 있어서 다시 세워야 할 성소는 무엇입니까? (예: 주일 예배, 매일 기도 시간, 십일조, 교회를 위한 봉사, 등등)
3) “바쁠수록 더욱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십시오.
4) 십일조를 율법이 아니라 영적 훈련으로 실천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십일조 훈련이 주는 영적 체험이 있으면 나누어 주십시오.
5. 중보기도
1) 2010년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2) 무너진 성소를 재건할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348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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