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저만치 돌아앉은 집의 담장이 보입니다. 흙담 위에 꽃샘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습니다. 고샅길을 돌아들며 정월이가 소리칩니다.
˝할머니이.˝
그런데 이상합니다. 집안에서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어서 오니라. 추운데 애썼다.˝
하며 반길 할머니입니다.
정월이는 마루에 책가방을 내려놓다가 할머니가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을 듣습니다.
물레야 빙빙 돌아라.워리렁 웽웽 돌아라.
흥얼거리는 소리는 고방에서 들려옵니다.
이이웃집 도련니임은 밤이스을 맞는다.
정월이가 샐쭉 웃으며 살금살금 다가갑니다. 구멍난 창호지문 사이로 고방안을 엿봅니다.
벽에는 씨앗자루가 매달려있습니다. 크고 작은 짚독들도 옹기종기 놓여있습니다. 그 곁에 배틀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월이는 할머니가 놀라게 왁,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칫합니다. 할머니가 빈 물레를 돌리고 있었거든요.
할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습니다. 오른 손으로 꼭지머리를 돌리며, 왼손 엄지와 검지를 비벼 실톳을 자아내는 시늉을 합니다.
정월이가 고방으로 들어섭니다.
˝할머니, 나랑 놀아.˝
˝오야, 내 새깽이 인자 오냐.˝
할머니가 몸을 돌려 정월이를 어루 다독입니다.
˝할머니 여기서 뭐 해?˝
˝정월아, 이것이 뭐신 줄 알것냐?˝
˝베틀이요.˝
˝할매는 너보다 더 쪼깐할 적부터 길쌈을 배웠당게. 울 어매헌티 눈물 콧물 쏙 빠지게 지청구 들어감시로....˝
할머니는 치마단을 뒤집어 눈가를 훔칩니다.
´아버지도 너무해.´
할머니가 저러시는 건 아버지가 베틀을 치워버렸기 때문이거든요.
할머니는 무명을 잘 짜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코흘리개 적부터 배운 길쌈을 칠십이 넘도록 짜오셨다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할머니는 관절염으로 고생을 합니다. 할머니의 무릎은 침 자국으로 성한 데가 없습니다. 밤마다 할머니의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길쌈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말리셔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고 침 맞으러 가신 날입니다. 아버지는 칠복이 아저씨 손을 빌려 베틀을 고방으로 옮겨버렸습니다.
할머니의 노여움은 대단하였습니다.
˝고것이 어떤 베틀인디 골방에 내쳤다냐. 칠대조 할머니 적부터 대물림 한 것을 너도 들어 알 것이다. 유복자인 너를 업고 천둥벌거숭이가 되었을 적의 그 베틀이 밥 묵여 준 것도 잊어뿌렸단 말이냐.˝
˝아, 안단 말이요. 그랑께 어머이 편히 모실라고 치워 뿐 것 아니요. 인자는 지발 손주 재롱이나 보고 편히 사시요잉.˝
아버지가 덩달아 목소리를 높이더니, 휭하니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할머니는 길쌈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하고 싶어도 꾹꾹 눌러 참는 눈치였습니다. 빈 손이 허전하실 적마다 마실을 다니곤 하였습니다.
숫골 친구네서 놀다 오던 정월이는, 대문 앞에서 한약방 김 의원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지.´
정월이가 안마당으로 뛰어들어갑니다. 마침 부엌에서 나오는 어머니와 마주 칩니다.
˝어디 갔다 오니, 할머니가 편찮으신데.˝
˝할머니가 왜?˝
정월이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합니다.
˝할머니가 처마리밭에 쓰러져 계신 것을 인수 삼촌이 업어 왔다. 밭에는 왜 가셨는지 모르겠다. 수수비를 들고......˝
어머니의 말을 듣다 말고, 정월이는 안방으로 뛰어듭니다.
˝할머니!˝
아버지가 돌아보고 입술에 손가락을 댑니다. 정월이는 아버지 곁에 쪼그리고 앉습니다. 할머니는 신음소리조차 끙끙 눌러 참는 것 같습니다. 감은 눈 밑의 주름살이 거무스름하고, 볼 아래 입매도 홀쭉합니다.
아버지 또한 이윽히 굽어보다가는, 머리를 숙이고 복 뒤를 비빌 뿐입니다.
˝약 잡수세요.˝
어머니가 약사발을 들고 다가앉습니다. 할머니는 눈도 뜨지 않습니다.
˝할머니, 약....˝
정월이가 울먹울먹 말을 잇지 못합니다. 그 대신 할머니의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할머니가 왜 밭에 가셨는지 정월이는 알 것 같습니다. 우수가 지나면 할머니는 남보다 먼저 ´풍년빌기´를 하였으니까요. 작년 이맘때 정월이는 할머니를 따라 처마리밭에 갔습니다. 할머니는 수수몽당비를 밭 귀퉁이에 꽂았습니다. 목화 씨앗도 조금 묻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비비며 굽신굽신 절을 하였습니다.
˝할머니, 왜 그래?˝
˝미영(목화) 농사 잘 되게 해 줍시요 빌었제.˝
할머니가 밭두렁을 꼭꼭 밟으며 말하였습니다.
˝밭두렁은 왜 밟아요?˝
˝쥐구멍도 막고, 물난리에 밭두렁 무너지지 말라고 그러제.˝
할머니는 집으로 오는 길에 엄나무 가지도 꺾어 왔습니다. 엄나무 가지에 목화송이를 꿰었습니다. 그리고는 집 담장에다 주르륵 꽂아 두었습니다.
´보나마다 밭두렁을 밟다가 넘어지셨을 거야.´
할머니는 아버지가 부둥켜안아 일으키자, 마지못해 약사발을 입에 대셨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입니다. 할머니는 조금씩 기운을 차렸습니다.
˝물 좀 다구.˝
할머니가 물을 찾습니다. 정월이가 자기끼 물을 가져다 드립니다. 물 한 대접을 다 마신 할머니가, 팔꿈치를 세워 몸을 일으켰습니다.
˝이젠 안 아파요?˝
˝벌써 핵교 갔다 왔냐.˝
할머니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묻습니다.
˝봄 방학 했어요. 할머니가 왜 처마리 밭에 갔는지 난 알아요.˝
˝...............˝
˝할머니는 길쌈하는 게 그렇게도 좋아요? 엄마는 고생스러워서 싫다는데......˝
할머니는 정월이를 빤히 쳐다봅니다.
˝우리 정월이가 시집갈 때꺼렁 살랑가 모르것다. 너 시집 보낼 솜이랑 무명은 해 놓은 죽어얄 텐디.......˝
˝할머니, 나 시집 안 가. 할머니랑 살 거야.˝
정월이가 다가앉아 할머니 팔짱을 낍니다.
˝거시기, 고리짝 쪼께 열어 봐라. 보퉁이에 싼 것 안 있냐.˝
정월이가 보따리를 꺼냅니다. 그리고 매듭을 풉니다.
˝우와, 이게 다 뭐예요?˝
˝이것이 너그 할아버지 의관이여. 할매가 새각시 적의 밤을 새와서 지어 드린 것이여.˝
그러고는 잠잠히 옷을 쓰다듬어 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생각에 목이 메는가 봅니다.
˝이건 또 뭐예요?˝
정월이가 얼른 다른 옷을 펼칩니다.
˝할매가 저 세상 갈 적의 갈아입을 옷이여.˝
˝왜 옷을 갈아입고 가요?˝
˝보고 잡은 사람덜 만나러 가는디 곱게 입고 가야 안 쓰겄냐.˝
˝이거는요?˝
˝시집을 적의 친정 어매가 지어 준 민저고리여. 우리 어매 솜씨는 참말로 곱당께.˝
정월이는 외증조할머니의 솜씨라는 무명저고리를 찬찬히 뜯어봅니다. 씨와 날이 촘촘하니 곱습니다. 그것을 올곧게 짜느라 얼마나 많은 공력을 들였습니다. 정월이가 할머니의 마디 굵은 손가락을 만져 봅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보퉁이 것을 차곡차곡 잘 챙겨서 여밉니다.
비닐 막사 안은 봄이 한창입니다. 비닐 문짝에는 물방울이 땡글땡글 매달려 있습니다. 아버지는 딸기 포기를 뒤적이며 북을 돋워 줍니다. 초록 잎새 사이로 빨간 딸기가 싱그럽습니다.
˝아버지.˝
˝오냐.˝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만 하십니다.
˝있잖아요.˝
˝뭘.˝
˝저기, 베틀 말이에요. 그거 할머니 방으로 옮기면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호미질을 하다 말고 돌아봅니다.
˝할머니가요, 일을 안 하시니까요. 기운이 없어 보여요. 심심해 하시구요.˝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치운 것 아니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할머니 시
중이나 들어 드려라.˝
아버지는 허리를 펴고 땀을 닦습니다.
˝계시는가.˝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마을 이장님이 들어옵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버지가 흙 묻은 손을 털고 악수를 청합니다.
˝내일 서울서 사람들이 온다고 면에서 기별이 왔네. 자네 자당 어른 길쌈하
시는 걸 사진 찍는다네.˝
˝사진을 찍어요? 아이구 지금 편찮으신데....˝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입니다. 별로 달가운 얼굴이 아닙니다.
서울 손님들은 점심나절에 도착했습니다. 예닐곱 명의 아저씨들이 묵직한 가방을 들고 봉고차에서 내립니다. 집안으로 들어온 아저씨들이 사진 찍는 기구들을 펼쳐 놓습니다. 아저씨 한 분은 할머니에게 마이크를 대고 이것저것 묻습니다.
˝길쌈은 몇 년이나 하셨어요?˝
˝그렁께 60년 너머 짰는갑소.˝
˝전수받을 사람은 있습니까?˝
˝시방 젊은 사람덜이 짤라고 허간디요. 우리 며느리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른당께요. 참 힘든 일이요.˝
할머니가 잉앗대를 툭 건드려 보입니다. 대낮인데도 불을 환히 밝혀 놓고,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영화를 찍는가 보다고 기웃기웃 구경을 합니다.
˝이제부턴 목화가 무명으로 짜여지기까지 거치는 과정을 설명하시는 겁니다.
자, 시작합시다.˝
아저씨가 마이크를 내려놓고 물러앉습니다.
˝그랑께, 음력 4월에 미영씨를 뿌리거던. 고것이 땅맛을 알고 클 거 아녀. 그러면 서너 차례 김을 매는디, 오뉴월 땡볕에 헐 짓이 아니네. 오죽허면 이런노래가 생겼것소.
밭으로오 가며느은 바래기 원수
논으로 가며느은 가레 원수
집으로 가며느은 씨누 원수......˝
˝얼쑤, 그래서요.˝
아저씨가 할머니의 밭매기 노래에 흥을 돋우고, 구경꾼들이 와그르 웃음을 터트립니다.
˝8,9월에 하루살이 꽃이 피는디. 미영꽃을 보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 쌌는지 몰러. 어린 것 젖 물리고 밭고랑에 앉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소. ´저것이 눈물 꽃이지.´ 싶은게 꼭 내 신세 같더란 말이지. 아, 안 그럴 것이요. 아들 하나 달랑 씨받아 갖고 청상 과부 되얐승께 얼매나 서러웠것소..... 꽃이 지며는 다래가 냊잖어, 그것을 따 먹고 우물우물 함시로 눈물도 설움도 꿀떡 삼켰소
잉. 다래가 익으믄 톡톡 불거지는디, 이내 한숨을 다 뱉아 놓은 듯이 속이 씨원합디다.˝
정월이는 문설주 뒤에 서서, 할머니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정월이의 가슴이 뿌듯합니다. 정월이가 옆에 서 있는 아버지를 올려다봅니다. 아버지의 눈시울이 젖어 있습니다.
˝가실에 미영을 따다 말려 갔고 씨아질을 안 허요. 활로 툭툭 타서는 말고,
고치를 물레로 자아서 실톳을 맹근단 말이시. 날틀에 걸어서 실을 고른 댐에
베틀에 올려서 짜제. 하루 30자 짜기가 바쁘당께.˝
할머니는 언제 아팠냐는 듯 신바람이 납니다. 베틀의 앉을께에 올라앉은 할
머니가 부티를 허리에 찹니다. 북을 잡은 할머니의 손이 오락가락하면 철커
덕 철컥...... 씨실과 날실이 어우러집니다. 할머니 어깨에 절로 가락이 실립니
다. 할머니가 신명을 내어 베를 짭니다.
울커덩 텅텅 바디집 소리는
건너 울산도 다 울리네.
유갱기 잉앳대는 고동 한 쌍이 노리개요......
정월이는 자기도 모르게 할머니의 소리를 따라 흥얼거립니다.
옹금종금 비거리는 사칭끈에다 목을 매고,
이나리끈 저나리끈 육날이 멍컬이끄슬 궤신은
처자 발꼼치 다다러지노라.
오늘 할머니의 소리는 더 구성집니다. 밤이 이슥해서야 사진 찍는 일이 끝났
습니다. 서울 손님들이 돌아간 뒤, 정월이가 베틀에 앉아 봅니다. 무엇이 할
머니로 하여금 일손을 놓지 못하도록 할까요. 베틀에 걸린 무명필을 만져 봅
니다.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에 따스합니다.
˝아, 안 자고 뭣 헌다냐?˝
할머니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밝습니다.
˝할머니, 베 짜는 거 가르쳐 주세요.˝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놀란 것은 정월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모르게 불쑥 나온 소리니까요.
˝나도 할머니처럼 길쌈하려고요.˝
˝아이구 시상에나, 아이구 내 새깽이....˝
할머니가 덥석 정월이를 안습니다. 정월이도 좋아라 뺨을 부빕니다. 할머니
와 정월이의 정다운 그림자가 창호지문에 얼비칩니다. 오동나무에 내려앉은
달이 화안히 웃고 있습니다.(*)
˝할머니이.˝
그런데 이상합니다. 집안에서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어서 오니라. 추운데 애썼다.˝
하며 반길 할머니입니다.
정월이는 마루에 책가방을 내려놓다가 할머니가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을 듣습니다.
물레야 빙빙 돌아라.워리렁 웽웽 돌아라.
흥얼거리는 소리는 고방에서 들려옵니다.
이이웃집 도련니임은 밤이스을 맞는다.
정월이가 샐쭉 웃으며 살금살금 다가갑니다. 구멍난 창호지문 사이로 고방안을 엿봅니다.
벽에는 씨앗자루가 매달려있습니다. 크고 작은 짚독들도 옹기종기 놓여있습니다. 그 곁에 배틀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월이는 할머니가 놀라게 왁,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칫합니다. 할머니가 빈 물레를 돌리고 있었거든요.
할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습니다. 오른 손으로 꼭지머리를 돌리며, 왼손 엄지와 검지를 비벼 실톳을 자아내는 시늉을 합니다.
정월이가 고방으로 들어섭니다.
˝할머니, 나랑 놀아.˝
˝오야, 내 새깽이 인자 오냐.˝
할머니가 몸을 돌려 정월이를 어루 다독입니다.
˝할머니 여기서 뭐 해?˝
˝정월아, 이것이 뭐신 줄 알것냐?˝
˝베틀이요.˝
˝할매는 너보다 더 쪼깐할 적부터 길쌈을 배웠당게. 울 어매헌티 눈물 콧물 쏙 빠지게 지청구 들어감시로....˝
할머니는 치마단을 뒤집어 눈가를 훔칩니다.
´아버지도 너무해.´
할머니가 저러시는 건 아버지가 베틀을 치워버렸기 때문이거든요.
할머니는 무명을 잘 짜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코흘리개 적부터 배운 길쌈을 칠십이 넘도록 짜오셨다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할머니는 관절염으로 고생을 합니다. 할머니의 무릎은 침 자국으로 성한 데가 없습니다. 밤마다 할머니의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길쌈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말리셔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고 침 맞으러 가신 날입니다. 아버지는 칠복이 아저씨 손을 빌려 베틀을 고방으로 옮겨버렸습니다.
할머니의 노여움은 대단하였습니다.
˝고것이 어떤 베틀인디 골방에 내쳤다냐. 칠대조 할머니 적부터 대물림 한 것을 너도 들어 알 것이다. 유복자인 너를 업고 천둥벌거숭이가 되었을 적의 그 베틀이 밥 묵여 준 것도 잊어뿌렸단 말이냐.˝
˝아, 안단 말이요. 그랑께 어머이 편히 모실라고 치워 뿐 것 아니요. 인자는 지발 손주 재롱이나 보고 편히 사시요잉.˝
아버지가 덩달아 목소리를 높이더니, 휭하니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할머니는 길쌈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하고 싶어도 꾹꾹 눌러 참는 눈치였습니다. 빈 손이 허전하실 적마다 마실을 다니곤 하였습니다.
숫골 친구네서 놀다 오던 정월이는, 대문 앞에서 한약방 김 의원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지.´
정월이가 안마당으로 뛰어들어갑니다. 마침 부엌에서 나오는 어머니와 마주 칩니다.
˝어디 갔다 오니, 할머니가 편찮으신데.˝
˝할머니가 왜?˝
정월이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합니다.
˝할머니가 처마리밭에 쓰러져 계신 것을 인수 삼촌이 업어 왔다. 밭에는 왜 가셨는지 모르겠다. 수수비를 들고......˝
어머니의 말을 듣다 말고, 정월이는 안방으로 뛰어듭니다.
˝할머니!˝
아버지가 돌아보고 입술에 손가락을 댑니다. 정월이는 아버지 곁에 쪼그리고 앉습니다. 할머니는 신음소리조차 끙끙 눌러 참는 것 같습니다. 감은 눈 밑의 주름살이 거무스름하고, 볼 아래 입매도 홀쭉합니다.
아버지 또한 이윽히 굽어보다가는, 머리를 숙이고 복 뒤를 비빌 뿐입니다.
˝약 잡수세요.˝
어머니가 약사발을 들고 다가앉습니다. 할머니는 눈도 뜨지 않습니다.
˝할머니, 약....˝
정월이가 울먹울먹 말을 잇지 못합니다. 그 대신 할머니의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할머니가 왜 밭에 가셨는지 정월이는 알 것 같습니다. 우수가 지나면 할머니는 남보다 먼저 ´풍년빌기´를 하였으니까요. 작년 이맘때 정월이는 할머니를 따라 처마리밭에 갔습니다. 할머니는 수수몽당비를 밭 귀퉁이에 꽂았습니다. 목화 씨앗도 조금 묻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비비며 굽신굽신 절을 하였습니다.
˝할머니, 왜 그래?˝
˝미영(목화) 농사 잘 되게 해 줍시요 빌었제.˝
할머니가 밭두렁을 꼭꼭 밟으며 말하였습니다.
˝밭두렁은 왜 밟아요?˝
˝쥐구멍도 막고, 물난리에 밭두렁 무너지지 말라고 그러제.˝
할머니는 집으로 오는 길에 엄나무 가지도 꺾어 왔습니다. 엄나무 가지에 목화송이를 꿰었습니다. 그리고는 집 담장에다 주르륵 꽂아 두었습니다.
´보나마다 밭두렁을 밟다가 넘어지셨을 거야.´
할머니는 아버지가 부둥켜안아 일으키자, 마지못해 약사발을 입에 대셨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입니다. 할머니는 조금씩 기운을 차렸습니다.
˝물 좀 다구.˝
할머니가 물을 찾습니다. 정월이가 자기끼 물을 가져다 드립니다. 물 한 대접을 다 마신 할머니가, 팔꿈치를 세워 몸을 일으켰습니다.
˝이젠 안 아파요?˝
˝벌써 핵교 갔다 왔냐.˝
할머니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묻습니다.
˝봄 방학 했어요. 할머니가 왜 처마리 밭에 갔는지 난 알아요.˝
˝...............˝
˝할머니는 길쌈하는 게 그렇게도 좋아요? 엄마는 고생스러워서 싫다는데......˝
할머니는 정월이를 빤히 쳐다봅니다.
˝우리 정월이가 시집갈 때꺼렁 살랑가 모르것다. 너 시집 보낼 솜이랑 무명은 해 놓은 죽어얄 텐디.......˝
˝할머니, 나 시집 안 가. 할머니랑 살 거야.˝
정월이가 다가앉아 할머니 팔짱을 낍니다.
˝거시기, 고리짝 쪼께 열어 봐라. 보퉁이에 싼 것 안 있냐.˝
정월이가 보따리를 꺼냅니다. 그리고 매듭을 풉니다.
˝우와, 이게 다 뭐예요?˝
˝이것이 너그 할아버지 의관이여. 할매가 새각시 적의 밤을 새와서 지어 드린 것이여.˝
그러고는 잠잠히 옷을 쓰다듬어 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생각에 목이 메는가 봅니다.
˝이건 또 뭐예요?˝
정월이가 얼른 다른 옷을 펼칩니다.
˝할매가 저 세상 갈 적의 갈아입을 옷이여.˝
˝왜 옷을 갈아입고 가요?˝
˝보고 잡은 사람덜 만나러 가는디 곱게 입고 가야 안 쓰겄냐.˝
˝이거는요?˝
˝시집을 적의 친정 어매가 지어 준 민저고리여. 우리 어매 솜씨는 참말로 곱당께.˝
정월이는 외증조할머니의 솜씨라는 무명저고리를 찬찬히 뜯어봅니다. 씨와 날이 촘촘하니 곱습니다. 그것을 올곧게 짜느라 얼마나 많은 공력을 들였습니다. 정월이가 할머니의 마디 굵은 손가락을 만져 봅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보퉁이 것을 차곡차곡 잘 챙겨서 여밉니다.
비닐 막사 안은 봄이 한창입니다. 비닐 문짝에는 물방울이 땡글땡글 매달려 있습니다. 아버지는 딸기 포기를 뒤적이며 북을 돋워 줍니다. 초록 잎새 사이로 빨간 딸기가 싱그럽습니다.
˝아버지.˝
˝오냐.˝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만 하십니다.
˝있잖아요.˝
˝뭘.˝
˝저기, 베틀 말이에요. 그거 할머니 방으로 옮기면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호미질을 하다 말고 돌아봅니다.
˝할머니가요, 일을 안 하시니까요. 기운이 없어 보여요. 심심해 하시구요.˝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치운 것 아니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할머니 시
중이나 들어 드려라.˝
아버지는 허리를 펴고 땀을 닦습니다.
˝계시는가.˝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마을 이장님이 들어옵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버지가 흙 묻은 손을 털고 악수를 청합니다.
˝내일 서울서 사람들이 온다고 면에서 기별이 왔네. 자네 자당 어른 길쌈하
시는 걸 사진 찍는다네.˝
˝사진을 찍어요? 아이구 지금 편찮으신데....˝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입니다. 별로 달가운 얼굴이 아닙니다.
서울 손님들은 점심나절에 도착했습니다. 예닐곱 명의 아저씨들이 묵직한 가방을 들고 봉고차에서 내립니다. 집안으로 들어온 아저씨들이 사진 찍는 기구들을 펼쳐 놓습니다. 아저씨 한 분은 할머니에게 마이크를 대고 이것저것 묻습니다.
˝길쌈은 몇 년이나 하셨어요?˝
˝그렁께 60년 너머 짰는갑소.˝
˝전수받을 사람은 있습니까?˝
˝시방 젊은 사람덜이 짤라고 허간디요. 우리 며느리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른당께요. 참 힘든 일이요.˝
할머니가 잉앗대를 툭 건드려 보입니다. 대낮인데도 불을 환히 밝혀 놓고,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영화를 찍는가 보다고 기웃기웃 구경을 합니다.
˝이제부턴 목화가 무명으로 짜여지기까지 거치는 과정을 설명하시는 겁니다.
자, 시작합시다.˝
아저씨가 마이크를 내려놓고 물러앉습니다.
˝그랑께, 음력 4월에 미영씨를 뿌리거던. 고것이 땅맛을 알고 클 거 아녀. 그러면 서너 차례 김을 매는디, 오뉴월 땡볕에 헐 짓이 아니네. 오죽허면 이런노래가 생겼것소.
밭으로오 가며느은 바래기 원수
논으로 가며느은 가레 원수
집으로 가며느은 씨누 원수......˝
˝얼쑤, 그래서요.˝
아저씨가 할머니의 밭매기 노래에 흥을 돋우고, 구경꾼들이 와그르 웃음을 터트립니다.
˝8,9월에 하루살이 꽃이 피는디. 미영꽃을 보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 쌌는지 몰러. 어린 것 젖 물리고 밭고랑에 앉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소. ´저것이 눈물 꽃이지.´ 싶은게 꼭 내 신세 같더란 말이지. 아, 안 그럴 것이요. 아들 하나 달랑 씨받아 갖고 청상 과부 되얐승께 얼매나 서러웠것소..... 꽃이 지며는 다래가 냊잖어, 그것을 따 먹고 우물우물 함시로 눈물도 설움도 꿀떡 삼켰소
잉. 다래가 익으믄 톡톡 불거지는디, 이내 한숨을 다 뱉아 놓은 듯이 속이 씨원합디다.˝
정월이는 문설주 뒤에 서서, 할머니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정월이의 가슴이 뿌듯합니다. 정월이가 옆에 서 있는 아버지를 올려다봅니다. 아버지의 눈시울이 젖어 있습니다.
˝가실에 미영을 따다 말려 갔고 씨아질을 안 허요. 활로 툭툭 타서는 말고,
고치를 물레로 자아서 실톳을 맹근단 말이시. 날틀에 걸어서 실을 고른 댐에
베틀에 올려서 짜제. 하루 30자 짜기가 바쁘당께.˝
할머니는 언제 아팠냐는 듯 신바람이 납니다. 베틀의 앉을께에 올라앉은 할
머니가 부티를 허리에 찹니다. 북을 잡은 할머니의 손이 오락가락하면 철커
덕 철컥...... 씨실과 날실이 어우러집니다. 할머니 어깨에 절로 가락이 실립니
다. 할머니가 신명을 내어 베를 짭니다.
울커덩 텅텅 바디집 소리는
건너 울산도 다 울리네.
유갱기 잉앳대는 고동 한 쌍이 노리개요......
정월이는 자기도 모르게 할머니의 소리를 따라 흥얼거립니다.
옹금종금 비거리는 사칭끈에다 목을 매고,
이나리끈 저나리끈 육날이 멍컬이끄슬 궤신은
처자 발꼼치 다다러지노라.
오늘 할머니의 소리는 더 구성집니다. 밤이 이슥해서야 사진 찍는 일이 끝났
습니다. 서울 손님들이 돌아간 뒤, 정월이가 베틀에 앉아 봅니다. 무엇이 할
머니로 하여금 일손을 놓지 못하도록 할까요. 베틀에 걸린 무명필을 만져 봅
니다.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에 따스합니다.
˝아, 안 자고 뭣 헌다냐?˝
할머니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밝습니다.
˝할머니, 베 짜는 거 가르쳐 주세요.˝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놀란 것은 정월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모르게 불쑥 나온 소리니까요.
˝나도 할머니처럼 길쌈하려고요.˝
˝아이구 시상에나, 아이구 내 새깽이....˝
할머니가 덥석 정월이를 안습니다. 정월이도 좋아라 뺨을 부빕니다. 할머니
와 정월이의 정다운 그림자가 창호지문에 얼비칩니다. 오동나무에 내려앉은
달이 화안히 웃고 있습니다.(*)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