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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길

창작동화 이슬기............... 조회 수 1103 추천 수 0 2008.08.26 11:56:54
.........
  아카시아 꽃향기를 실은 바람이 뭉클 불어왔다가 불어왔다.
바람 속에는 꽃내음이 진하게 흘렀다.
아저씨는 어깨에 메었던 가방을 내려놓고 고갯마루에 잠시 앉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아랫마을을 보았다.
마을 한 가운에 있는 낯익은 집이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보였다.
아저씨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집을 떠난 지 몇 해 만이던가?
아저씨는 눈을 감았다.

˝전 싫어요. 이 힘들고 지긋지긋한 일이 싫어요. 이것 보세요. 옻이 올라 퉁퉁 부은 얼굴로 혀로 아교를 핥아가며 일 년 내내 죽도록 일을 해 봤자 남는 게 뭐 있죠?˝
아저씨는 들고 있던 조개 껍데기를 땅바닥에 내던졌다.
˝힘들고 지긋지긋한 일? 그래, 네 싫으면 그만 두어라.˝
할아버지는 작업장 옆에 있는 통나무에 털썩 주저앉으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수염이 파르르 떨었다.
화가 나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 그만 둘 거예요.˝
아저씨가 내던진 조개 껍데기가 깨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뒹굴었다.
그 옆에는 썰다 만 조개 껍데기, 실처럼 썰어 놓은 것, 둥글게 썰어 놓은 것, 쓸모가 없어서 버린 것 등이 무더기 무더기 놓여 있었다.
한 쪽에는 이제 막 작업을 끝낸 듯한 보석함이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보석함에는 절벽에 매달린 채 꽃을 피워낸 난초 꽃이 방긋이 웃고 있었다. 벽 쪽에는 화려한 무늬를 자개 장롱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업장 한 쪽 구석에서는 벌건 숯을 한아름 안은 숯 화로 위에 아교를 녹이는 냄비가 있었고 그 옆에는 톱, 망치, 송곳 따위의 연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 눔아,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모두 쉬운 일만 하겠다고 한다면 힘든 일은 누가 하누?˝
할아버지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허연 연기가 뭉클 흩어졌다.
˝힘든 일을 누가 하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예요? 전 이 일이 싫다구요. 왜 하필이면 이런 일에 매달려 아까운 청춘을 흘려 보내야 하느냐구요?˝
아저씨도 땅바닥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일? 네 눈에는 이 하찮은 일일지 몰라도 나는 우리의 전통을 이어나간다는 생각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전통, 누군가가 이어 가야할 우리 조상의 얼,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건 할아버지 생각이지요,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나요?˝
˝누구보고 알아달라고 이 짓 하는 거 아니다.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는 거다.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전부 너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우리 조상들 대대로 이어오던 얼과 문화, 전통은 어떻게 돼? 휴우!˝
할아버지 입에서 또 한 번의 담배 연기가 물씬 나와 흩어졌다.
˝누가 들으면 싸우는 줄 알겠어요. 왜 이렇게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안에서 할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며 나왔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싸우고 있는 거지. 우리 것을 제대로 모르는 눔한테 싸우고 있는 거라고. 아니 싸움보다 더 한 일일지 몰라. 저 아름다운 무늬, 저게 어디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줄 알아?˝
˝젊은 애들이 그런 걸 알기나 하우? 공연히 혼자서만 애를 끓이고 있는 게지.˝
˝참, 우리 조상들 대단했쟤. 그냥 두면 썩어 없어지고 말 조개 껍데기에서 색깔을 발견하고, 그걸 쪼개 무늬로 넣어, 저런 화려한 옷장을 만들고, 소반을 만들고, 함을 만들고.......˝
˝그래서 남는 게 뭐 있어요?˝
˝그래, 넌 모를 거다. 나도 너처럼 옻 올라가며, 혀로 아교를 핥아가며 처음 이 짓을 할 때엔 몰랐어. 하다가 하다가 보니 어느 새, 여기 까지 오게 되었고, 난 내가 만든 것마다 내 혼을 넣어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혼, 그렇지. 언젠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가고 나면, 내 혼들은 이 세상에 남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 거야. 그걸 어찌 돈으로 따질 수 있겠어, 이눔아. 옻? 우리 조상들이 발견해낸 빛깔 중에 이보다 더 좋은 빛깔도 없어.˝
할아버지는 땅바닥에 있던 망치를 집어들어 이미 못쓰게 버려진 조개 껍데기를 땅땅 내리쳤다. 망치 아래에서 조개 껍데기들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저씨는 그 길로 집을 나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고갯마루에 올라서면서 입술을 깨물며 맹세했다.
그리고, 10년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그 사이에 아저씨는 돈도 좀 벌었다.
집을 뛰쳐나간 후 처음에는 식당에서 심부름꾼을 했다. 그러다가 식당 주인이 되기까지 워낙에 할아버지에게 배운 부지런함으로 열심히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뭔가 마음속이 답답해지면서 가슴에 덩어리 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
그 덩어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커갔다.
아저씨는 그 덩어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아저씨는 흡사 봄날 들판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것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밥맛도 없었다.
밤에 잠도 잘 수 없었다.
병원에 가 보았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친구 만나러 갔다가 아주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우리 나라 옛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아니?˝
눈에 익은 물건이 보였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핀 난초 꽃무늬가 선명한 서류함.
아저씨의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에는 우리 조상들의 때묻은 옛 물건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젊은이들이 몇이서 둘러보다가 나가자 부부인 듯한 외국인이 들어섰다.
˝아, 예쁘다. 이 것 좀 봐요.˝
그들은 옛날 꽃무늬가 놓인 신발, 도자기, 작은 탁자, 목각 인형 같은 것을 둘러 보며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다가 진열대 위에 놓인 자개 서류함을 집어들었다.
˝예. 그건 우리 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만들어 왔던 나전 칠기라는 물건이지요. 우리 나라 남해안에서만 나는 색깔있는 전복 껍질을 하나 하나 잘게 오려 무늬를 넣은 거지요. 보십시오. 정말 화려하지요? 그리고, 이 무늬 보십시오.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는지.......이런 물건은 혼이 들어있지 않으면 작품의 가치가 없습니다. 만든 사람의 혼.˝
가게 주인이 설명을 했다.
아저씨는 주인의 설명을 들으면서 서류함 난초꽃 무늬 위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외국인 부부는 잠시 흥정을 하더니 서류함을 사들고 나갔다.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것을 가졌을 때처럼 너무나 흐뭇한 표정이었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손님은 뭘 찾으세요?˝
주인이 물었다.
˝아, 아녜요. 그냥.......˝
아저씨는 서둘러 가게에서 나왔다.
가슴에 뭉쳐진 덩어리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건 잊으려고 애를 쓸면 쓸수록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는 일이었다.
˝은근하면서도 소박한 우리의 멋을 감히 어느 나라, 누가 흉내를 내? 이게 어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일이더냐? 수 백년 사람들 손끝에서 손끝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 우리의 얼이야. 우리의 전통이야.˝
할아버지가 틈만 나면 강조하는 우리의 얼, 우리의 정신......
아저씨는 비로소 가슴에 뭉쳐졌던 덩어리가 서서히 녹아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가자.´
아저씨가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아니었다.

아카시아 꽃 향기를 맡으면서 고갯길을 내려갔다.
집은 상당히 허물어져 있었다.
작업장에는 반쯤 만들다가 만 장롱, 서류함, 소반, 삼층장들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채 힘없이 벽에 기대어 있었고, 부서진 조개 껍데기, 연장들이 녹이 슨 채로 이리 저리 뒹굴고 있었다.
아저씨는 허리를 굽혀 발 밑에 있는 조개 껍데기를 하나 주워 들었다.
뽀얗게 뒤집어 쓴 먼지를 손으로 닦아 내었다.
은은한 빛이 흘러 나왔다.
˝이게 누고?˝
등뒤에서 낯익은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응? 돌식이........돌식이 아니가?˝
˝예, 할머니.˝
아저씨는 구부정하게 서 있는 할머니 앞에 무너지듯이 꿇어앉았다.
˝진작에 오지, 진작에.......˝
할머니가 돌식이를 껴안으며 꺼이 꺼이 울었다.
˝네 떠나고 나서 아직껏 대문 한 번 닫지 않았어. 언젠가는 네가 돌아올 거라고.......˝
˝할아버지는요?˝
˝석 달 전에 세상 떠났어. ´저걸 누군가가 이어야 할 건데.....돌식이, 그 녀석 돌아올 거야. 돌아오면 내가 하던 일은 그 녀석에게 맡겨. 꼭이야. 그 녀석은 내가 하던 일을 해 낼 녀석이야.´ 마지막 남긴 말이라네.˝
아저씨는 땅바닥을 치면서 엉엉 울었다.
˝에이그, 이 세상, 눈감으면 모두 그만인 줄 알았는데, 요즘도 가끔 할아버지가 만든 물건을 찾아. 할아버지는 너 다섯 살 때 길에서 주워다 키웠지만 단 한 번도 남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지.˝
할머니가 울음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코를 팽 풀었다.
´할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그래요, 할아버지가 하시던 일, 제가 이을 게요. 제가 이을 게요.´
아저씨가 주먹으로 눈물을 쓰윽 닦았다.

뻐꾹!
뻑뻐꾹!
뻐꾸기가 울었다.
어쩌면 차마 못 떠나고 아직도 마을 근처에서 맴도는 할아버지의 넋으로 나타난지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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