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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앙, 길게 소리를 뽑으며 기차가 굴을 벗어나자 창 밖이 환해지면서 비릿한 바다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그 바람이 할머니의 무릎 위에 엎드려 졸고 있던 난희를 깨웠나 봅니다. 할머니의 손이 난희의 작은 어깨를 토닥거리고 있습니다. 난희는 그냥 잠을 자는 척 엎드려 있기로 했습니다. 강릉에서 삼척까지 동해 바닷가를 오르내리는 3등 열차 안입니다.
지금 난희는 할머니와 함께 묵호 작은 아버님 댁에 가는 길입니다. 거기에는 난희와 동갑내기인 춘호가 있습니다. 춘호는 난희와 같은 해에 났지만 생일이 10월이기 때문에 난희의 동생뻘이 됩니다. 난희의 생일은 5월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네 누나야”하고 말하면 춘호는 시큰둥한 얼굴로 “쬐그만 지지배가 까불어!”합니다. 그렇지만 난희는 춘호와 한번도 싸운적이 없습니다.
정동진을 떠난 기차가 내리막길을 달려 옥계에 도착하는 모양입니다. 난희는 눈을 떠 보지 않아도 얼추 알 수 있습니다. 난희는 춘호가 방학 숙제를 다 못했으면 도와 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춘호는 모래무지 잡는 데는 도사지만 공부는 젬병이거든요.
덜커덩거리며 기차가 옥계역을 떠납니다. 그때,
“할머니, 따님 댁에 가세요?”
깍듯한 서울 말씨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난희가 실눈을 뜨고 보니 등산복을 입은 청년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난희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던 할머니가 움찔 손을 멈추고는 “야-”하고 대답합니다.
“따님 댁에 가시면서 뭘 그리 많이 갖고 가세요?”
청년이 빙글빙글 웃으며 무릎 아래에 놓아둔 보따리를 가리킵니다.
“강냉이라요.”
“따님이 어디 사시는데요.”
“송정 사오.”
“따님은 농사를 하지 않으시나보죠? 강냉이를 이렇게 갖다 주시는 걸 보니 말이에요.”
“야.”
난희는 건성으로 하는 할머니의 대꾸를 들으면서 여전히 잠을 자는 척 엎드려 있습니다. 할머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송정에 살고 있는 것은 딸이 아니라 난희의 작은 아버지인 둘째 아들이거든요. 게다가 난희는 하나 있다는 고모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고모가 어떤 혹인 병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그래, 사위 되시는 분은 뭘 하세요?”
“군청에 다니지라요.”
할머니가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청년이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할머니에게 건네었습니다.
“할머니는 자녀를 몇이나 두셨어요?”
“아들 둘에 딸 둘이지라오. 사우 하나는 시방 미국에 가 있다오.”
“호오! 그래요? 미국에서 뭘 하시나요?”
“내사 잘 모르지만, 무슨 기술자랍니다. 가끔 펜지하고 돈도 오지라오.”
“할머니는 참 좋으시겠네요. 따님 덕에 미국 구경하시게 됐으니…두 아드님은 무엇을 하시지요?”
“하나는 중핵교 선생이고 또 하나는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지라.”
난희는 할머니의 거짓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못들은 척 눈을 감고 엎드려 있기로 합니다. 얼음 공장에서 배달부로 일하다가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고깃배를 타시는 작은 아버지의 새까만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드님들이 그만큼 출세하셨으면 이젠 좀 쉬세요. 할머니 손을 보니까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셨구만요.”
“다 팔자라요. 그러잖애두 서울 사는 아덜이 자꾸만 올라오라 합디다만서두…작년 갈에 비향기를 타고 서울 가봤더니….”
할머니의 이야기는 저절로 신이 납니다.
“…미국 딸아도 오락합디다만서두 가는 데는 3백만원이 비향기 값으루 나간다니 어디 쉽게 가겠능가만서두….”
빠앙, 기차가 길게 울면서 묵호역 안으로 들어서는 모양입니다.
“할머니는 참 행복하신 분이네요.”
청년이 말했습니다.
“글씨, 사람들이 그럽디다. 복이 있는 할매라구….”
마침내, 잠자는 척 엎드려 있는 난희의 목덜미에 할머니의 미지근한 눈물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난희는 목덜미가 근질거렸지만 꼼짝 않고 헐머니의 딱딱한 무릎에 엎드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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