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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에 멱감은 풀잎. 소는 그 풀을 먹고 배가 둥둥 부른다. 참으로 편하다. 소는 그래서 바보 같다.
소는 코가 꿰인 채 잠자코 끌려가 준다. 사람 대신 무거운 달구지에 짐을 실어다 준다.
소가 살이 찌면 사람들은 값을 얼마쯤 올려 매긴다. 그러나 소는 그림처럼 언제나 아름답다.
구정물 찌꺼기를 먹고 살아도 소는 하늘에 눈을 둔다. 소는 꿈속에서도 침묵을 지키고 마음으로만 얘기한다.
아이가 고삐를 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를 몰고 가면 소는 아이의 뜻대로 커다란 몸뚱이를 움직여 준다. 소는 아이가 귀엽다. 아침나절 풀이슬 오솔길처럼 사랑스럽다.
땅바닥에 그림자가 아른아른 따라간다. 아이의 조그만 그림자가 커다란 소 그림자 속에 폭 안긴다. 소가 아이를 안고 간다. 아버지가 밭갈이하려고 기다리는 밭까지 닿자 소는 안고 있는 아이를 내려놓는다. 아이는 시냇가로 뛰어간다. 소의 등에 멍에가 메워진다.
아이의 아버지는 쟁기를 잡고 회초리로 소의 엉덩이를 후려친다. 소는 이랑을 세면서 봇줄이 팽팽하도록 쟁기를 끈다. 팥고물 같은 흙이 가리마처럼 갈려지면서 밭은 보드라워진다.
푸른 하늘로 구름이 지나간다. 소의 눈이 그 구름을 따라가고 소는 어느덧 구름이 된다.
산등성이 소나무 이파리를 스치며 흘러간다. 초가집 마을을 내려다본다. 실버들 가지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곱다. 거기 아늑하게 안겨 소는 문득 행복해진다.
주인이 소의 엉덩이를 때리며 일으켜 세운다. 소는 깜빡 꿈에서 깨어난다. 주인을 따라 집으로 가보니 조그만 외양간엔 아침에 눠둔 똥덩어리가 거죽이 까맣게 말라 있다. 쉬파리가 붕붕 날고 있다. 소는 길고 다부룩한 꼬리로 파리를 쫓는다. 구수한 쇠죽이 구유에 그득히 담긴다. 소는 순하게 쭈그리고 죽을 먹는다.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콧구멍에서 말간 콧물이 지르르 나온다. 기다란 혀 끝으로 그걸 핥는다.
솔방울, 나무껍질 같은 먹을 수 없는 찌꺼기가 구유 한쪽에 조심스레 남고 죽은 말끔히 먹히운다. 소는 숨을 길게 뿜어내며 보릿짚 바닥에 눕는다.
골목길에 풍경 소리가 난다. 이웃집 친구가 거름을 싣고 지나가며 ˝음매애˝ 길게 소리쳐 운다. 그 울음소리가 귀보다 가슴에 먼저 와닿는다. 바르르 떨릴 만큼 가슴 안이 서늘해진다. 소는 저도 모르게 꼭 같이 ˝음매에˝ 소리쳐 운다.
닭장 밑에서 늘어지게 잠들었던 복슬강아지가 깨어나 두 귀를 쫑긋 일으켜 세우고 아직 덜 깬 잠꼬대 같은 비틀걸음으로 아장아장 걷는다. 외양간 문지방 밑에 와서 킁킁 냄새를 맡아보고 소 곁으로 다가간다. 소의 눈이 순하게 맞아 준다. 강아지는 콧잔등에 주름살을 지워 주둥이를 싸악 벌려 하품을 하고 앞다리를 꽉 버티었다가 깡총 뛰어올라 소의 목덜미를 발톱으로 긁는다. 소는 곁눈으로 강아지를 보고 가만히 웃는다.
소는 이런 때, 제 몸뚱이가 강아지만큼 작아지고 싶다.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뿔대가리를 끄덕끄덕 꼬드겨봤다. 너무 커서 열없다. 복슬강아지는 몇 번 깡충깡충 뛰어올라 보다가 그만 싫증이 났다. 콧구멍을 킁킁 발름거리며 돌아선다. 꼬리를 가락지처럼 말아 가지고 아장아장 가버린다. 소는 제 몸집이 큰 것이 괜히 부담이 된다.
칠월 어느 장날 소는 장터로 끌려갔다. 그동안 소는 세 번째 주인이 바뀐 것이다.
맨 처음 주인은 홀로 사는 아주머니였다. 열 살짜리 아들과 단 두 식구였다. 배냇소로 끌려와 스물넉 달 동안 거기서 살았다. 작은주인은 알뜰하고 사랑스러웠고 친구처럼 소를 귀여워했다. 어머니도 부지런히 구정물 찌꺼기를 모아 푸근하게 쇠죽을 쑤어 주었다.
소는 그 홀어머니 댁에서 평생 함께 살고 싶었다. 그러나 소의 운명이란 그렇게 제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았다. 약속한 기한이 되어 본래의 소 주인한테 이끌려 처음으로 소시장에 나갔다.
두 번째 주인은 화전 농사를 하는 산속 외딴집에 살았다. 산비탈 화전 밭뙈기에서 옥수수가 줄을 지어 자라는 모습이 힘차게 보였다. 주인 식구들은 부지런하고 순했다. 거기서 소는 처음으로 밭을 가는 일을 배웠고, 무거운 짐도 실었다. 땀을 흘리는 일,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똑똑히 알았다. 땀을 흘려야 구수한 감자 같은 것을 먹을 수 있는 화전 농사꾼들은 흙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 화전 농사꾼들과 헤어질 때도 소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마음처럼 지금도 소는 세 번째 주인과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 번 헤어진 사람들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것도 소의 슬픔이다.
네 번째 옮겨 온 주인집도 같은 농사꾼 집이었다. 기찻길이 나 있는 굴다리 밑을 지나, 훤히 트인 들판을 걸었다. 마을 앞엔 맑은 시내가 흐르고 정자나무가 군데군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아이들이 소를 몰고 그 정나나무 밑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만그만한 크기의 소들이 먼지 길을 뚜벅뚜벅 걸어서 간다. 소는 소끼리 벌써 전부터 말없이 서로를 알고 있는 듯이 지낸다. 마주칠 때도 인사를 하지 않는 척 인사를 나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집들이 꽤나 큼직큼직하게 많이 들어선 것이 처음 보는 큰 동네였다. 소는 그 중의 두 번째 골목 첫 집 커다란 대문으로 새 주인을 따라 들어갔다. 외양간 천장도 여태까지의 집보다 두어 뼘이나 높았다.
농가의 큰 집은 일거리가 많았다. 논밭은 십릿길이 넘는 먼 못에도 있었다. 달밤의 들길을 보릿단을 집더미만큼 싣고, 풍경 소리를 울리며 달구지를 끌었다. 진종일 시달린 다음엔 맛있는 먹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콩과 좁쌀로 끓인 쇠죽이 종종 서너 자배기나 듬직한 구유에 가득히 담겨졌다. 소는 엉덩이살이 오르고 다리의 힘살이 굳어졌다. 털빛은 진한 자줏빛이 되고 눈동자는 더 새까맣게 빛을 뿜었다.
가을이 닥쳐오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 이내 돌아왔다. 소는 철이 지나가는 것이 차차 두려웠다. 3년을 넘겨 보지 못하고 주인이 갈렸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나면 벌써 소는 그 집, 그 동네에 정이 들어 버린다. 소는 이젠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은 것이다. 단풍잎이 산을 덮었다가 깨끗이 져버리고 겨울이 닥치는 것이 그래서 반갑지 않다.
눈이 퐁퐁 쏟아지는 어느 날, 소는 외양간에서 따뜻한 짚북데기에 주둥이를 박고 어린 날의 꿈을 꾸었다. 소한테도 엄마가 있었다. 아랫배에 꼭지가 네 개 있는 젖통을 단 엄마 소는 조용하고도 정다웠다. 소는 그 엄마 소의 둘레에서 세상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주 조금, 걸음마를 떼어놓는 아기 걸음처럼 그 만큼밖에 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봄이 왔다. 마을엔 살구꽃이 피고, 들에는 파랗게 보리가 자란다. 자장자장 햇볕이 따습게 쬐는 5월이 이내 닥쳤다. 농삿일이 바빴지만 소는 무럭무럭 힘이 솟았다. 파랗게 돋은 풀이 소의 입맛을 돋워 주고, 가슴에 피를 가득히 만들었다.
하늘이 푸른 것이 소는 더 좋았다. 그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 산들바람, 소는 눈 가득히 보드라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맡겨진 일을 끝내고 풀밭에 누워 있다. 소의 가슴이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둥둥 부풀만큼 즐겁기도 한 것이 좀 야릇했다. 소는 두 귀를 쫑긋 기울였다. 어디선지 고운 소 울음소리가 났다. 그건 색시 소 울음소리다.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는 저쪽 보리밭 건너편에 노란 색시 소 한 마리가 춤을 추고 있다. 고운 목소리로 ˝옴매애…˝ 노래부르면서.
소는 문득 그 색시 소한테 장가가 가고 싶어졌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앞발을 들고 뛰어가려 했다. 말뚝에 매인 고삐가 움직이지 않는다. 소는 힘껏 고삐를 잡아끌며 앞으로 몸을 밀었다. 말뚝이 쑥 빠졌다. 소는 달리기 시작했다.
색시 소는 이듬해 봄 송아지를 낳았다. 가끔 색시 소를 따라나와 귀엽게 뛰어다니는 송아지를 보고, 소는 그게 제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소는 모른 척 살아야 했다. 그래야만 소는 마음이 편한 것이다. 괜히 아는 척하면 소는 슬프고 괴롭기 때문이다.
소는 세 번 장가를 갔고 세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지만 언제나 혼자였다. 소는 그렇게 차차 늙어갔다. 달구지 끌기도 힘겨웠다. 어느 날 소는 처음으로 나락단을 실은 달구지를 개울 둑 밑에다 그루박아 버렸다. 달구지가 산산조각이 나고 소는 허리와 한쪽 뒷다리를 다쳤다.
그러나 겨울이 가까스로 지나고 봄이 왔을 때, 소는 한층 처량한 모습이 되었다. 주인은 소의 몸뚱이를 자세히 살펴봤다. 몇 번이고 혀를 차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주인은 소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힘없는 눈을 들여다봤다. 소는 회복되지 않는 자기의 몸을 걱정하는 주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소는 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처리하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응달엔 아직도 눈이 희끗희끗 깔린 이른 봄날, 소는 뒷다리 하나를 절뚝거리며 장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소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을을 멀리 떨어져 나왔을 때, 소는 한 번 뒤돌아봤다. 그리고 고삐를 잡은 주인을 쳐다봤다. 소는 지금 주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가 지금 마지막으로 주인에게 봉사하는 일은 되도록 값을 많이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주인이 귀중히 여기는 것은 역시 소의 목숨보다 돈인 것이다.
소는 갑자기 걷던 걸음이 힘없이 멎어졌다. 소는 전부터 모두 알고 있었다. 자기가 여태까지 속아 살아왔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소는 속아 산다고 생각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달구지를 끄는 일도, 밭갈이를 하는 것도 모두 즐거운 자기 몫의 일로만 생각했다. 좀 더 정성껏, 좀더 부지런히 일하고 싶었던 것은 주인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다고 생각했다.
소는 지금도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걸어가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굳게 믿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말고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걸었다. 장터까지는 아직도 더 많이 걸어야 했다. 꼬불꼬불 뚫린 먼 우찻길 위로 자국자국 발자국이 뒤에 남았다. (*)
출전 <사과나무밭 달님>
소는 코가 꿰인 채 잠자코 끌려가 준다. 사람 대신 무거운 달구지에 짐을 실어다 준다.
소가 살이 찌면 사람들은 값을 얼마쯤 올려 매긴다. 그러나 소는 그림처럼 언제나 아름답다.
구정물 찌꺼기를 먹고 살아도 소는 하늘에 눈을 둔다. 소는 꿈속에서도 침묵을 지키고 마음으로만 얘기한다.
아이가 고삐를 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를 몰고 가면 소는 아이의 뜻대로 커다란 몸뚱이를 움직여 준다. 소는 아이가 귀엽다. 아침나절 풀이슬 오솔길처럼 사랑스럽다.
땅바닥에 그림자가 아른아른 따라간다. 아이의 조그만 그림자가 커다란 소 그림자 속에 폭 안긴다. 소가 아이를 안고 간다. 아버지가 밭갈이하려고 기다리는 밭까지 닿자 소는 안고 있는 아이를 내려놓는다. 아이는 시냇가로 뛰어간다. 소의 등에 멍에가 메워진다.
아이의 아버지는 쟁기를 잡고 회초리로 소의 엉덩이를 후려친다. 소는 이랑을 세면서 봇줄이 팽팽하도록 쟁기를 끈다. 팥고물 같은 흙이 가리마처럼 갈려지면서 밭은 보드라워진다.
푸른 하늘로 구름이 지나간다. 소의 눈이 그 구름을 따라가고 소는 어느덧 구름이 된다.
산등성이 소나무 이파리를 스치며 흘러간다. 초가집 마을을 내려다본다. 실버들 가지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곱다. 거기 아늑하게 안겨 소는 문득 행복해진다.
주인이 소의 엉덩이를 때리며 일으켜 세운다. 소는 깜빡 꿈에서 깨어난다. 주인을 따라 집으로 가보니 조그만 외양간엔 아침에 눠둔 똥덩어리가 거죽이 까맣게 말라 있다. 쉬파리가 붕붕 날고 있다. 소는 길고 다부룩한 꼬리로 파리를 쫓는다. 구수한 쇠죽이 구유에 그득히 담긴다. 소는 순하게 쭈그리고 죽을 먹는다.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콧구멍에서 말간 콧물이 지르르 나온다. 기다란 혀 끝으로 그걸 핥는다.
솔방울, 나무껍질 같은 먹을 수 없는 찌꺼기가 구유 한쪽에 조심스레 남고 죽은 말끔히 먹히운다. 소는 숨을 길게 뿜어내며 보릿짚 바닥에 눕는다.
골목길에 풍경 소리가 난다. 이웃집 친구가 거름을 싣고 지나가며 ˝음매애˝ 길게 소리쳐 운다. 그 울음소리가 귀보다 가슴에 먼저 와닿는다. 바르르 떨릴 만큼 가슴 안이 서늘해진다. 소는 저도 모르게 꼭 같이 ˝음매에˝ 소리쳐 운다.
닭장 밑에서 늘어지게 잠들었던 복슬강아지가 깨어나 두 귀를 쫑긋 일으켜 세우고 아직 덜 깬 잠꼬대 같은 비틀걸음으로 아장아장 걷는다. 외양간 문지방 밑에 와서 킁킁 냄새를 맡아보고 소 곁으로 다가간다. 소의 눈이 순하게 맞아 준다. 강아지는 콧잔등에 주름살을 지워 주둥이를 싸악 벌려 하품을 하고 앞다리를 꽉 버티었다가 깡총 뛰어올라 소의 목덜미를 발톱으로 긁는다. 소는 곁눈으로 강아지를 보고 가만히 웃는다.
소는 이런 때, 제 몸뚱이가 강아지만큼 작아지고 싶다.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뿔대가리를 끄덕끄덕 꼬드겨봤다. 너무 커서 열없다. 복슬강아지는 몇 번 깡충깡충 뛰어올라 보다가 그만 싫증이 났다. 콧구멍을 킁킁 발름거리며 돌아선다. 꼬리를 가락지처럼 말아 가지고 아장아장 가버린다. 소는 제 몸집이 큰 것이 괜히 부담이 된다.
칠월 어느 장날 소는 장터로 끌려갔다. 그동안 소는 세 번째 주인이 바뀐 것이다.
맨 처음 주인은 홀로 사는 아주머니였다. 열 살짜리 아들과 단 두 식구였다. 배냇소로 끌려와 스물넉 달 동안 거기서 살았다. 작은주인은 알뜰하고 사랑스러웠고 친구처럼 소를 귀여워했다. 어머니도 부지런히 구정물 찌꺼기를 모아 푸근하게 쇠죽을 쑤어 주었다.
소는 그 홀어머니 댁에서 평생 함께 살고 싶었다. 그러나 소의 운명이란 그렇게 제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았다. 약속한 기한이 되어 본래의 소 주인한테 이끌려 처음으로 소시장에 나갔다.
두 번째 주인은 화전 농사를 하는 산속 외딴집에 살았다. 산비탈 화전 밭뙈기에서 옥수수가 줄을 지어 자라는 모습이 힘차게 보였다. 주인 식구들은 부지런하고 순했다. 거기서 소는 처음으로 밭을 가는 일을 배웠고, 무거운 짐도 실었다. 땀을 흘리는 일,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똑똑히 알았다. 땀을 흘려야 구수한 감자 같은 것을 먹을 수 있는 화전 농사꾼들은 흙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 화전 농사꾼들과 헤어질 때도 소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마음처럼 지금도 소는 세 번째 주인과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 번 헤어진 사람들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것도 소의 슬픔이다.
네 번째 옮겨 온 주인집도 같은 농사꾼 집이었다. 기찻길이 나 있는 굴다리 밑을 지나, 훤히 트인 들판을 걸었다. 마을 앞엔 맑은 시내가 흐르고 정자나무가 군데군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아이들이 소를 몰고 그 정나나무 밑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만그만한 크기의 소들이 먼지 길을 뚜벅뚜벅 걸어서 간다. 소는 소끼리 벌써 전부터 말없이 서로를 알고 있는 듯이 지낸다. 마주칠 때도 인사를 하지 않는 척 인사를 나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집들이 꽤나 큼직큼직하게 많이 들어선 것이 처음 보는 큰 동네였다. 소는 그 중의 두 번째 골목 첫 집 커다란 대문으로 새 주인을 따라 들어갔다. 외양간 천장도 여태까지의 집보다 두어 뼘이나 높았다.
농가의 큰 집은 일거리가 많았다. 논밭은 십릿길이 넘는 먼 못에도 있었다. 달밤의 들길을 보릿단을 집더미만큼 싣고, 풍경 소리를 울리며 달구지를 끌었다. 진종일 시달린 다음엔 맛있는 먹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콩과 좁쌀로 끓인 쇠죽이 종종 서너 자배기나 듬직한 구유에 가득히 담겨졌다. 소는 엉덩이살이 오르고 다리의 힘살이 굳어졌다. 털빛은 진한 자줏빛이 되고 눈동자는 더 새까맣게 빛을 뿜었다.
가을이 닥쳐오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 이내 돌아왔다. 소는 철이 지나가는 것이 차차 두려웠다. 3년을 넘겨 보지 못하고 주인이 갈렸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나면 벌써 소는 그 집, 그 동네에 정이 들어 버린다. 소는 이젠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은 것이다. 단풍잎이 산을 덮었다가 깨끗이 져버리고 겨울이 닥치는 것이 그래서 반갑지 않다.
눈이 퐁퐁 쏟아지는 어느 날, 소는 외양간에서 따뜻한 짚북데기에 주둥이를 박고 어린 날의 꿈을 꾸었다. 소한테도 엄마가 있었다. 아랫배에 꼭지가 네 개 있는 젖통을 단 엄마 소는 조용하고도 정다웠다. 소는 그 엄마 소의 둘레에서 세상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주 조금, 걸음마를 떼어놓는 아기 걸음처럼 그 만큼밖에 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봄이 왔다. 마을엔 살구꽃이 피고, 들에는 파랗게 보리가 자란다. 자장자장 햇볕이 따습게 쬐는 5월이 이내 닥쳤다. 농삿일이 바빴지만 소는 무럭무럭 힘이 솟았다. 파랗게 돋은 풀이 소의 입맛을 돋워 주고, 가슴에 피를 가득히 만들었다.
하늘이 푸른 것이 소는 더 좋았다. 그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 산들바람, 소는 눈 가득히 보드라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맡겨진 일을 끝내고 풀밭에 누워 있다. 소의 가슴이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둥둥 부풀만큼 즐겁기도 한 것이 좀 야릇했다. 소는 두 귀를 쫑긋 기울였다. 어디선지 고운 소 울음소리가 났다. 그건 색시 소 울음소리다.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는 저쪽 보리밭 건너편에 노란 색시 소 한 마리가 춤을 추고 있다. 고운 목소리로 ˝옴매애…˝ 노래부르면서.
소는 문득 그 색시 소한테 장가가 가고 싶어졌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앞발을 들고 뛰어가려 했다. 말뚝에 매인 고삐가 움직이지 않는다. 소는 힘껏 고삐를 잡아끌며 앞으로 몸을 밀었다. 말뚝이 쑥 빠졌다. 소는 달리기 시작했다.
색시 소는 이듬해 봄 송아지를 낳았다. 가끔 색시 소를 따라나와 귀엽게 뛰어다니는 송아지를 보고, 소는 그게 제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소는 모른 척 살아야 했다. 그래야만 소는 마음이 편한 것이다. 괜히 아는 척하면 소는 슬프고 괴롭기 때문이다.
소는 세 번 장가를 갔고 세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지만 언제나 혼자였다. 소는 그렇게 차차 늙어갔다. 달구지 끌기도 힘겨웠다. 어느 날 소는 처음으로 나락단을 실은 달구지를 개울 둑 밑에다 그루박아 버렸다. 달구지가 산산조각이 나고 소는 허리와 한쪽 뒷다리를 다쳤다.
그러나 겨울이 가까스로 지나고 봄이 왔을 때, 소는 한층 처량한 모습이 되었다. 주인은 소의 몸뚱이를 자세히 살펴봤다. 몇 번이고 혀를 차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주인은 소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힘없는 눈을 들여다봤다. 소는 회복되지 않는 자기의 몸을 걱정하는 주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소는 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처리하든지 그대로 따르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응달엔 아직도 눈이 희끗희끗 깔린 이른 봄날, 소는 뒷다리 하나를 절뚝거리며 장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소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을을 멀리 떨어져 나왔을 때, 소는 한 번 뒤돌아봤다. 그리고 고삐를 잡은 주인을 쳐다봤다. 소는 지금 주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가 지금 마지막으로 주인에게 봉사하는 일은 되도록 값을 많이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주인이 귀중히 여기는 것은 역시 소의 목숨보다 돈인 것이다.
소는 갑자기 걷던 걸음이 힘없이 멎어졌다. 소는 전부터 모두 알고 있었다. 자기가 여태까지 속아 살아왔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소는 속아 산다고 생각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달구지를 끄는 일도, 밭갈이를 하는 것도 모두 즐거운 자기 몫의 일로만 생각했다. 좀 더 정성껏, 좀더 부지런히 일하고 싶었던 것은 주인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다고 생각했다.
소는 지금도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걸어가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굳게 믿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말고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걸었다. 장터까지는 아직도 더 많이 걸어야 했다. 꼬불꼬불 뚫린 먼 우찻길 위로 자국자국 발자국이 뒤에 남았다. (*)
출전 <사과나무밭 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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