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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어느 나라에 ´이솝´이란 영감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솝 영감님은 소문난 이야기꾼이어서 절로 귀가 솔깃해지는 숱한 이야기들을 남겨 놓았는데, 어느 날 이솝 영감님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치, 너는 이슬이나 받아 마시며 노래밖에 할 줄 모르는 게으름쟁이야. 그러나, 저 부지런한 개미를 봐라. 날만 새면 언제나 끊임없이 일하는 저 훌륭한 일꾼- 개미를 보란 말이야. 부끄럽지도 않니?˝
그래서, 이솝 영감님은 눈보라치는 겨울이 오자, 이제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노래도 부를 수가 없게 된 늙은 여치를 가엾게도 땅바닥에 쓰러지게 하였습니다. 여치는 비틀거리며 개미를 찾아가 구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미님, 먹을 것을 좀 줍쇼...... 제발 불쌍한 나를 살려 주시면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부지런하고 착한 개미는 여치의 그 가여운 모습을 보고 모른 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 보라구요. 왜 날 좋은 여름 동안 우리처럼 땀 흘려 일하지 않고, 그 쓸데없는 시끄러운 노래만 부르며 빈둥빈둥 놀고 있었소? 그러니까 이 지경이지......˝
하면서도, 개미는 여치를 위해 먹을 것을 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까요?
정말 여치는 시끄러운 노래나 부르고 다니는 게으름쟁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 사람들이 모두 믿고 있는 이솝 영감님의 이야기처럼.
개미는 부지런한 일꾼이지만, 여치처럼 노래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물들에게 저마다 다른 어떤 일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개미가 땀 흘려 일하는 동안, 여치는 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살아온 것입니다.
여치가 첫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무더운 여름 밤부터였습니다.
무더워도 이따금 선들바람이 불어오곤 하던 별빛 총총한 그 날 밤. 여치는 아무도 몰래 어느 가난한 집 담장 밑에 소복이 돋아나 있는 풀섶 사이로 숨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기쁨을 깨달으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여치는 정말 얼마나 오랫동안 묵묵히 목청을 가다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타는 듯한 불볕 아래서도 또 지루한 장마 속에서도 정말 여치는 끈덕지게 참고 기다려 왔습니다. 그 오랜 기도와 뼈를 깎는 아픔 끝에 비로소 흘러나오는 여치의 노래. 찌르찌르찌르...... 아침 이슬보다도 더 맑고 또랑한 여치의 노래-.
그 날부터 여치는 먼 길을 헤매며 밤마다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치가 살기 좋은 풀섶을 빠져 나와 험한 세상에 뛰어든 것도 진정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였답니다.
여치는 언젠가 까마득한 시멘트 담벼락을 기어오르다 떨어져 한쪽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고, 또 때로는 사나운 구둣발에 짓밟힐 뻔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은 판잣집 비좁은 부엌 안까지 찾아들어가 노래를 부르다 연탄 가스에 중독되어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치는 노래만은 결코 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을 겪을수록 더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가을이 사라져 가고 어느새 첫 추위가 닥쳐오고 말았습니다.
살얼음이 지피고 싸락눈이 내렸습니다. 살아 있는 다른 이웃들은 모두 제 집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치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여치는 가까스로 누렇게 시든 풀섶을 찾아 기어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한바탕 맵찬 바람이 휘몰아쳐 오자 여치는 마치 한 점 티끌처럼 날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언 땅 위에 쓰러진 여치에게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여치는 안감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겨울을 참고 이겨 내야 한다는 굳센 마음이 여치를 지켜 주고 있었습니다.
여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춥고 긴 겨울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마침내 따뜻한 봄이 오게 마련이란 것을.
˝추위야, 네가 아무리 사납다고 해도 내 노래만은 얼어 죽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 그것만은 안 돼......˝
여치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차디찬 언 땅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멀리 따뜻한 불빛이 가물거리며 나타났습니다. 여치는 부쩍 용기를 내어 한사코 그 불빛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곳에만 가면 따뜻한 방이 있고, 먹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마 여치를 모른다고 내쫓기야 하겠습니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가까스로 문 앞까지 기어간 여치는 가냘픈 목소리로 주인을 부렀습니다.
그러자 조금 후,
˝누구시죠?˝
하고,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개미였습니다.
˝어, 추워. 이 추운 밤에 웬일이오?˝
하고 개미는 고개는 내밀고서도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갈 곳이 없어서 신세를 좀 지려고 왔는데요.˝
하고 여치가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자,
˝허어, 그것 참 딱하게 됐군요. 하여간 어서 들어오기나 하시오, 쯧쯧
쯧......˝
하고 개미는 무척 귀찮은 듯 여치를 맞아들였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간 순간 여치는 마치 천국에라도 온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이 따뜻하고 훈훈한 방 안, 또 무엇보다도 구수한 음식 냄새...... 모든 것이 바깥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 추운 겨울날, 이렇게 봄날처럼 살기 좋은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풍경에 눈이 부신 여치는 바보처럼 두리번거리며 개미 뒤를 따라갔습니다. 많은 방을 거쳐서 여치가 들어간 곳은 가장 크고 으리으리한 방이었습니다.
˝방마다 먹을 것이 가득 차 있지요. 아무리 긴 겨울이라도 배불리 먹으며 편안히 지낼 수가 있어요.˝
개미가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따뜻한 방 안에서 배불리 먹고 지내는 개미는 여치와 달리, 무척 건강한 데다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개미는 아마 두리번거리는 여치가 행복한 자기를 몹시 부러워하고 있는 것만 같은지,
˝예, 정말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많은 재산을 모아 놓았어요?˝
하고 여치가 말하자,
˝뭐, 이만한 재산이야 보통이지요. 나보다 더 잘사는 집들도 많으니까요.˝
하고, 배를 쑥 내밀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보다 더 잘사는 수도 있어요?˝
여치가 물었습니다.
˝그럼요. 허허,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는 모양이군. 나는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지만, 다른 집들은 달라요. 채찍을 휘둘러서 재산을 끌어 모은 부자들도 많다는 것을 모르시오?˝
˝글쎄요. 나는 도무지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그러니까 밤낮 그렇게 고생만 하지 않아요. 이젠 좀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그 동안 무얼 했어요? 봄부터 가을까지 뭘 하며 보냈기에 이 모양이오? 이 딱한 양반아.˝
개미가 꾸짖듯 말했습니다.
˝나는 그 동안 노래만 부르고 있었소. 아니 내 노래를 들은 적이 없어요?˝
여치가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허허, 밤마다 들려 오던 그 시끄러운 소리 말이오? 뭣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노래나 부르며 빈둥빈둥 놀고 있었소? 그러니까 이 지경이 아니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내 노래가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시오?˝
여치가 화가 나서 소리 쳤습니다.
˝그럼 그게 뭐란 말이오? 아무리 밤새도록 불러 봐도 누가 그걸 듣고 있는 줄이나 아시오? 이 바쁜 세상에 잠꼬대 같은 소리 그만 해요.˝
개미도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그건 댁에서 모르는 말씀이오. 나는 저 신비스런 우주를 노래해 왔어요. 아마 댁의 가슴에도 내 노래가 남아 있을 거요.˝
˝천만에. 난 그런 시끄러운 소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럴 틈이 있으면 더 부지런히 재산이나 모으겠소.˝
˝아, 정말 답답하군요. 왜 그렇게 한 가지만 생각하시오? 내 노래가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지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군요.˝
여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답답한 건 나요. 지금 굶어 죽게 되었으면서도 노래가 다 뭐요? 그럼 좋아요. 당신의 노래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라면, 어디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그것만 듣고 있으면, 배가 부르나요? 아니면 몸이 따뜻해지나요?˝
하고, 개미는 다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봐요, 당신의 그 아름다운 노래가 무얼 가져다 주는 가요? 난 그보다 쌀 한 톨이 더 귀중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안 그래요? 아무리 그래 봤자 쌀 한 톨과도 바꿀 수 없는 그 노래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오? 허어, 정말 딱한 양반이로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댁이 모은 재산은 배를 부르게 하지만, 내 노래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배만 부르다고 해서 살 수가 있나요? 영혼이 맑고 깨끗해야 살아 있는 보람을 느낄 수가 있어요.˝
˝허어, 이것 봐요. 그렇게 말해도 내 말을 못 알아듣겠어요? 영혼이 뭐요? 배가 부르고 몸만 따뜻하고 편안하면 기분 좋게 살 수 있는데, 영혼이 어쨌다는 거요? 그것 참, 그럼 당신 마음대로 해 보구려. 지금 이곳에서 나가면 춥고 배가 고파 죽게 될 형편인데도, 영혼만 맑고 깨끗하면 뭘 한단 말이오? 하하하하......˝
하고, 개미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여치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 제 눈에 보이는 것밖에 믿을 줄 모르는 어리석은 개미가 가여워졌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일 영혼이 없다고 하면, 저 모래알이나 티끌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댁이 모은 재산은 결국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아 놓아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의 영화도 들에 핀 한 떨기 백합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요? 하지만, 영혼은 영원합니다. 맑고 깨끗한 영혼은 우주의 신비스러운 속삭임을 엿들을 수 있으며, 또 한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생각해 보세요.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해지면, 그 다음은 무엇이 남습니까? 아마 코를 골며 잠이 들지 않으면 사치와 허영에 휩쓸려 들겠지요. 그렇게 살다 한 점 티끌이 된다고 하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요? 아마 뭣 때문에 살아왔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물론 댁이 피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일한 것은 훌륭하고 보람찬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많은 재산을 모을 수가 있게 되었고 편안히 지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내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댁은 시끄러운 소리에 지나지 못한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조용히 생각해 보셔요. 어쩌면 댁의 가슴 깊이 내 노래가 간직되어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결코 내 자신을 위해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댁의 재산은 혼자만의 것이지만, 내 노래는 누구나 그것의 주인입니다. 나는 비록 가난하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치가 아무리 말해 주어도 개미는 코웃음만 치고 있었습니다. 개미는 여치가 너무 고생만 한 끝에 잠꼬대 같은 소리만 늘어놓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글쎄 이곳에서 쫓겨나기만 하면 금방 얼어 죽고 말 가엾고 초라한 이 여치가 뭘 믿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개미가 뭐라고 한 마디만 하면 ´예, 개미님 말씀이 옳습니다요.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하고 빌 줄만 알았는데, 이건 정말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개미는 생각했습니다.
´응, 알겠다. 먹을 것을 주면 아마 마음이 달라지겠지. 그 때는 아마 틀림없이 내 말이 옳다고 빌게 될 거야.´
그래서, 개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빵과 달콤한 꿀차를 가져왔습니다.
˝자, 배가 고플 테니 우선 목이나 축이시오.˝
하며, 개미는 힐끗 여치의 눈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흰 빵과 달콤한 꿀을 보자 여치는 정말 군침부터 삼켰습니다. 보기만 하고 냄새만 맡아도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예, 정말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허기진 여치가 막 그 달콤한 꿀차를 마시려고 하자,
˝잠깐만.˝
하고, 개미가 말했습니다.
˝먼저 내 이야기부터 듣고 먹도록 해요. 이번 겨울 동안은 여기서 함께 살아도 좋습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고 따뜻한 방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와도 그 쓸데없는 잠꼬대 같은 노래는 절대로 부르지 않겠다고 이 자리에서 약속을 하시오. 대신 우리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서 재산이나 모으란 말이오. 괜히 헛고생만 하지 말고. 알겠소?˝
그 때였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여치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외쳤습니다.
˝뭐요? 이제 뭐라고 했어요? 미안하지만 그따위 약속은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름이 오면 다시 내 노래를 불러야겠어요. 헐벗고 굶주려 쓰러진다고 해도 나는 내 노래만은 버리지 않겠소. 자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개미님, 잘 쉬었다 갑니다.˝
그러면서 여치는 그 지친 몸을 이끌고 따뜻한 방 안을 뛰쳐나갔습니다. 저 눈보라와 굶주림의 차디찬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여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어디론가 끝없이 기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이솝 영감님은 소문난 이야기꾼이어서 절로 귀가 솔깃해지는 숱한 이야기들을 남겨 놓았는데, 어느 날 이솝 영감님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치, 너는 이슬이나 받아 마시며 노래밖에 할 줄 모르는 게으름쟁이야. 그러나, 저 부지런한 개미를 봐라. 날만 새면 언제나 끊임없이 일하는 저 훌륭한 일꾼- 개미를 보란 말이야. 부끄럽지도 않니?˝
그래서, 이솝 영감님은 눈보라치는 겨울이 오자, 이제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노래도 부를 수가 없게 된 늙은 여치를 가엾게도 땅바닥에 쓰러지게 하였습니다. 여치는 비틀거리며 개미를 찾아가 구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미님, 먹을 것을 좀 줍쇼...... 제발 불쌍한 나를 살려 주시면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부지런하고 착한 개미는 여치의 그 가여운 모습을 보고 모른 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 보라구요. 왜 날 좋은 여름 동안 우리처럼 땀 흘려 일하지 않고, 그 쓸데없는 시끄러운 노래만 부르며 빈둥빈둥 놀고 있었소? 그러니까 이 지경이지......˝
하면서도, 개미는 여치를 위해 먹을 것을 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까요?
정말 여치는 시끄러운 노래나 부르고 다니는 게으름쟁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 사람들이 모두 믿고 있는 이솝 영감님의 이야기처럼.
개미는 부지런한 일꾼이지만, 여치처럼 노래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물들에게 저마다 다른 어떤 일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개미가 땀 흘려 일하는 동안, 여치는 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살아온 것입니다.
여치가 첫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무더운 여름 밤부터였습니다.
무더워도 이따금 선들바람이 불어오곤 하던 별빛 총총한 그 날 밤. 여치는 아무도 몰래 어느 가난한 집 담장 밑에 소복이 돋아나 있는 풀섶 사이로 숨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기쁨을 깨달으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여치는 정말 얼마나 오랫동안 묵묵히 목청을 가다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타는 듯한 불볕 아래서도 또 지루한 장마 속에서도 정말 여치는 끈덕지게 참고 기다려 왔습니다. 그 오랜 기도와 뼈를 깎는 아픔 끝에 비로소 흘러나오는 여치의 노래. 찌르찌르찌르...... 아침 이슬보다도 더 맑고 또랑한 여치의 노래-.
그 날부터 여치는 먼 길을 헤매며 밤마다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치가 살기 좋은 풀섶을 빠져 나와 험한 세상에 뛰어든 것도 진정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였답니다.
여치는 언젠가 까마득한 시멘트 담벼락을 기어오르다 떨어져 한쪽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고, 또 때로는 사나운 구둣발에 짓밟힐 뻔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은 판잣집 비좁은 부엌 안까지 찾아들어가 노래를 부르다 연탄 가스에 중독되어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치는 노래만은 결코 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을 겪을수록 더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가을이 사라져 가고 어느새 첫 추위가 닥쳐오고 말았습니다.
살얼음이 지피고 싸락눈이 내렸습니다. 살아 있는 다른 이웃들은 모두 제 집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치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여치는 가까스로 누렇게 시든 풀섶을 찾아 기어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한바탕 맵찬 바람이 휘몰아쳐 오자 여치는 마치 한 점 티끌처럼 날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언 땅 위에 쓰러진 여치에게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여치는 안감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겨울을 참고 이겨 내야 한다는 굳센 마음이 여치를 지켜 주고 있었습니다.
여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춥고 긴 겨울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마침내 따뜻한 봄이 오게 마련이란 것을.
˝추위야, 네가 아무리 사납다고 해도 내 노래만은 얼어 죽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 그것만은 안 돼......˝
여치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차디찬 언 땅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멀리 따뜻한 불빛이 가물거리며 나타났습니다. 여치는 부쩍 용기를 내어 한사코 그 불빛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곳에만 가면 따뜻한 방이 있고, 먹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마 여치를 모른다고 내쫓기야 하겠습니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가까스로 문 앞까지 기어간 여치는 가냘픈 목소리로 주인을 부렀습니다.
그러자 조금 후,
˝누구시죠?˝
하고,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개미였습니다.
˝어, 추워. 이 추운 밤에 웬일이오?˝
하고 개미는 고개는 내밀고서도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갈 곳이 없어서 신세를 좀 지려고 왔는데요.˝
하고 여치가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자,
˝허어, 그것 참 딱하게 됐군요. 하여간 어서 들어오기나 하시오, 쯧쯧
쯧......˝
하고 개미는 무척 귀찮은 듯 여치를 맞아들였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간 순간 여치는 마치 천국에라도 온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이 따뜻하고 훈훈한 방 안, 또 무엇보다도 구수한 음식 냄새...... 모든 것이 바깥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 추운 겨울날, 이렇게 봄날처럼 살기 좋은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풍경에 눈이 부신 여치는 바보처럼 두리번거리며 개미 뒤를 따라갔습니다. 많은 방을 거쳐서 여치가 들어간 곳은 가장 크고 으리으리한 방이었습니다.
˝방마다 먹을 것이 가득 차 있지요. 아무리 긴 겨울이라도 배불리 먹으며 편안히 지낼 수가 있어요.˝
개미가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따뜻한 방 안에서 배불리 먹고 지내는 개미는 여치와 달리, 무척 건강한 데다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개미는 아마 두리번거리는 여치가 행복한 자기를 몹시 부러워하고 있는 것만 같은지,
˝예, 정말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많은 재산을 모아 놓았어요?˝
하고 여치가 말하자,
˝뭐, 이만한 재산이야 보통이지요. 나보다 더 잘사는 집들도 많으니까요.˝
하고, 배를 쑥 내밀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보다 더 잘사는 수도 있어요?˝
여치가 물었습니다.
˝그럼요. 허허,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는 모양이군. 나는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지만, 다른 집들은 달라요. 채찍을 휘둘러서 재산을 끌어 모은 부자들도 많다는 것을 모르시오?˝
˝글쎄요. 나는 도무지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그러니까 밤낮 그렇게 고생만 하지 않아요. 이젠 좀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그 동안 무얼 했어요? 봄부터 가을까지 뭘 하며 보냈기에 이 모양이오? 이 딱한 양반아.˝
개미가 꾸짖듯 말했습니다.
˝나는 그 동안 노래만 부르고 있었소. 아니 내 노래를 들은 적이 없어요?˝
여치가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허허, 밤마다 들려 오던 그 시끄러운 소리 말이오? 뭣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노래나 부르며 빈둥빈둥 놀고 있었소? 그러니까 이 지경이 아니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내 노래가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시오?˝
여치가 화가 나서 소리 쳤습니다.
˝그럼 그게 뭐란 말이오? 아무리 밤새도록 불러 봐도 누가 그걸 듣고 있는 줄이나 아시오? 이 바쁜 세상에 잠꼬대 같은 소리 그만 해요.˝
개미도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그건 댁에서 모르는 말씀이오. 나는 저 신비스런 우주를 노래해 왔어요. 아마 댁의 가슴에도 내 노래가 남아 있을 거요.˝
˝천만에. 난 그런 시끄러운 소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럴 틈이 있으면 더 부지런히 재산이나 모으겠소.˝
˝아, 정말 답답하군요. 왜 그렇게 한 가지만 생각하시오? 내 노래가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지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군요.˝
여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답답한 건 나요. 지금 굶어 죽게 되었으면서도 노래가 다 뭐요? 그럼 좋아요. 당신의 노래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라면, 어디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그것만 듣고 있으면, 배가 부르나요? 아니면 몸이 따뜻해지나요?˝
하고, 개미는 다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봐요, 당신의 그 아름다운 노래가 무얼 가져다 주는 가요? 난 그보다 쌀 한 톨이 더 귀중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안 그래요? 아무리 그래 봤자 쌀 한 톨과도 바꿀 수 없는 그 노래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오? 허어, 정말 딱한 양반이로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댁이 모은 재산은 배를 부르게 하지만, 내 노래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배만 부르다고 해서 살 수가 있나요? 영혼이 맑고 깨끗해야 살아 있는 보람을 느낄 수가 있어요.˝
˝허어, 이것 봐요. 그렇게 말해도 내 말을 못 알아듣겠어요? 영혼이 뭐요? 배가 부르고 몸만 따뜻하고 편안하면 기분 좋게 살 수 있는데, 영혼이 어쨌다는 거요? 그것 참, 그럼 당신 마음대로 해 보구려. 지금 이곳에서 나가면 춥고 배가 고파 죽게 될 형편인데도, 영혼만 맑고 깨끗하면 뭘 한단 말이오? 하하하하......˝
하고, 개미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여치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 제 눈에 보이는 것밖에 믿을 줄 모르는 어리석은 개미가 가여워졌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일 영혼이 없다고 하면, 저 모래알이나 티끌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댁이 모은 재산은 결국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아 놓아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의 영화도 들에 핀 한 떨기 백합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요? 하지만, 영혼은 영원합니다. 맑고 깨끗한 영혼은 우주의 신비스러운 속삭임을 엿들을 수 있으며, 또 한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생각해 보세요.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해지면, 그 다음은 무엇이 남습니까? 아마 코를 골며 잠이 들지 않으면 사치와 허영에 휩쓸려 들겠지요. 그렇게 살다 한 점 티끌이 된다고 하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요? 아마 뭣 때문에 살아왔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물론 댁이 피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일한 것은 훌륭하고 보람찬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많은 재산을 모을 수가 있게 되었고 편안히 지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내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댁은 시끄러운 소리에 지나지 못한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조용히 생각해 보셔요. 어쩌면 댁의 가슴 깊이 내 노래가 간직되어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결코 내 자신을 위해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댁의 재산은 혼자만의 것이지만, 내 노래는 누구나 그것의 주인입니다. 나는 비록 가난하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치가 아무리 말해 주어도 개미는 코웃음만 치고 있었습니다. 개미는 여치가 너무 고생만 한 끝에 잠꼬대 같은 소리만 늘어놓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글쎄 이곳에서 쫓겨나기만 하면 금방 얼어 죽고 말 가엾고 초라한 이 여치가 뭘 믿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개미가 뭐라고 한 마디만 하면 ´예, 개미님 말씀이 옳습니다요.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하고 빌 줄만 알았는데, 이건 정말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개미는 생각했습니다.
´응, 알겠다. 먹을 것을 주면 아마 마음이 달라지겠지. 그 때는 아마 틀림없이 내 말이 옳다고 빌게 될 거야.´
그래서, 개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빵과 달콤한 꿀차를 가져왔습니다.
˝자, 배가 고플 테니 우선 목이나 축이시오.˝
하며, 개미는 힐끗 여치의 눈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흰 빵과 달콤한 꿀을 보자 여치는 정말 군침부터 삼켰습니다. 보기만 하고 냄새만 맡아도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예, 정말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허기진 여치가 막 그 달콤한 꿀차를 마시려고 하자,
˝잠깐만.˝
하고, 개미가 말했습니다.
˝먼저 내 이야기부터 듣고 먹도록 해요. 이번 겨울 동안은 여기서 함께 살아도 좋습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고 따뜻한 방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와도 그 쓸데없는 잠꼬대 같은 노래는 절대로 부르지 않겠다고 이 자리에서 약속을 하시오. 대신 우리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서 재산이나 모으란 말이오. 괜히 헛고생만 하지 말고. 알겠소?˝
그 때였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여치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외쳤습니다.
˝뭐요? 이제 뭐라고 했어요? 미안하지만 그따위 약속은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름이 오면 다시 내 노래를 불러야겠어요. 헐벗고 굶주려 쓰러진다고 해도 나는 내 노래만은 버리지 않겠소. 자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개미님, 잘 쉬었다 갑니다.˝
그러면서 여치는 그 지친 몸을 이끌고 따뜻한 방 안을 뛰쳐나갔습니다. 저 눈보라와 굶주림의 차디찬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여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어디론가 끝없이 기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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