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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치유영적전쟁 장봉운 목사............... 조회 수 2820 추천 수 0 2010.03.16 08: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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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음성 듣기를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기술도 배우고 실천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자주 듣고 그 음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하게 되며, 자신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지시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이 영적으로 성숙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 성령님으로부터 직접 자세하게 일일이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음성듣기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구체적으로 날마다 듣고 그 음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매우 유쾌한 것 같아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영적 성숙이며, 장성한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꼭 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일일이 간섭하시고 지시하시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런 가르침을 받는 까닭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처럼 그렇게 성장해서 스스로 올바른 행동을 책임을 가지고 행하게 하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서 스스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이 말씀하지 않아도 그분들의 마음을 알아서 스스로 행동할 때 그분들은 참으로 기뻐하고 대견해 합니다. 날마다 곁에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간섭하고 지시하는 일은 우리가 어리기 때문에 부득불 그렇게 하는 것이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통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부모가 자녀를 불러서 문제를 서로 토의하고 의견을 나누어 좋은 결정을 하도록 합니다. 자녀가 성장했다 해도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지시하기도 하고 자녀의 의견을 듣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자녀가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행하면 부모는 섭섭해 합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며, 간혹 중대한 일이 있을 경우 부모나 지도자와 상의하고 토론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성장 가운데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한 수단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기 위해서 거치는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방법이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수단도 포함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동행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이 개별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고 그 마음을 간직하고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지만 곧 그 음성에서 벗어나 마음을 헤아려 행동하는 의지적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중대한 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음성 듣기를 통해서 자라나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날마다 음성만 듣고 그 음성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으로만 여기고 음성을 듣는 일에만 매진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장할 시기가 되면 하나님의 음성은 점차로 줄어들고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여 판단하도록 이끄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고 사소한 일마저도 오로지 음성에만 매달려 행동하려고 한다면 그는 성숙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마귀의 거짓음성에 속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아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성령의 음성만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통해서 또는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때로는 환경을 통해서 그리고 꿈과 환상을 통해서 등등 다양한 방법과 기술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음성 듣기는 다른 기능들이 가지지 않은 독특한 특성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음성 듣기가 유익하며 할 수만 있다면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밖의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며,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행하시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보자에게 강력한 경험을 거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날마다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들려 기도하는 것이 신나고 즐겁고 간구한 것 마다 응답이 되어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처럼 느껴져 너무도 감사하고 즐겁다면 이 시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간직해야 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날마다 이런 따스한 날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죄를 범하지 않으면 이런 은혜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가가 지나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날마다 음성에만 의존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내몹니다.

따스한 요람에서 날마다 부모와 얼굴만 맞대고 재롱만 피우는 유아를 언제까지 바라만 보는 것을 즐거워할 부모는 아무도 없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유아적인 순종에만 머물러 수동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장성한 사람은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히 5:14). 날마다 시시콜콜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완성이나 의로움의 결과가 아니라 그 시기에 하나님의 친밀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소중한 기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분별력을 기르는 귀중한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서서히 줄어들고 그 친밀함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스스로 돌아보아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이것은 현실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한 일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증거들이 얼마나 나타나는가 입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고 더욱 성숙한 단계로 나아갑니다. 실패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얼마나 많은 성공을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실패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광야의 학교를 통과한 성숙한 사람의 모습이지요. 요람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판단력이 하나님의 불시험을 통해서 연단된 사람입니다. 이 연단을 통해서 식별의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는 법입니다.

성령님과 악령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간혹 이 두 영을 혼동하기도 하지요. 우선 성령님은 상담자입니다. 개역성경은 모사(謀士: 롬 11:34)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모사는 구약성경 사무엘하 15장에 압살롬이 제사를 드릴 때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멜을 그의 고향에서 모셔옵니다. 그가 압살롬에게 가담하자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몰려와서 그 무리가 더욱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구약에서 왕의 모사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아자비 요나단은 지혜가 있어서 모사가 됩니다(대상 27: 32). 표준새번역은 다윗의 삼촌 요나단이 고문이 되었다고 번역합니다. 모사는 현대어로 표현하면 고문, 상담자, 충고자라는 말로 쓸 수 있는데 이 말에 사용된 히브리어 “yaats(야아츠)”는 ‘충고하다’ ‘조언하다’ ‘권면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이며 여기서 모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모사를 신약에서 성령님으로 적용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성령님을 우리를 위한 모사라고 소개하며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모든 면에서 유익하다고 증거합니다.

성령님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갈 5:22).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인데 열거하면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성령님은 우리를 돕는 고문의 위치에서 일하시지만 마귀는 이와는 반대로 억압하고, 서두르고, 통제하고, 억제하고, 강요하며, 위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를 통제하고 장악해 주시기를 바라고 모든 것을 전적으로 성령님에게 내어 맡기는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고 그 음성에 따라서 행동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을 상담자로 알지 못하고 지배자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성령님은 우리의 의지를 존중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난 후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 일을 받아들여 행동하기까지 도우며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우리에게는 때로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거나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을 경우 즉각적으로 고쳐주고 바로 이끄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가 회개하고 그 길을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입니다. 그래서 서두르고 강제적인 마귀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따르게 되기도 합니다.

답답한 것보다는 시원시원한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마귀의 조급함을 받아들이게 되면 일시적으로는 좋은 것 같지만 그 끝은 고통으로 막을 내리게 되며 깊은 파멸을 맛보게 되는 것이지요. 성령님의 권위하시는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주장하는 마귀의 속성을 하나님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조급하고 성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가 ‘인내’인데 이 부분이 우리에게는 취약하지요. 특히 한국인의 특성은 조급함과 서두름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당장에 결론을 내고 서둘러서 끝을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일에서도 이런 모습을 감출 수 없습니다. 제가 상담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론부터 알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은 절차가 있고 순서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조건들을 행할 생각보다는 결론을 더 알고 싶어합니다.

부분적으로 제공해주는 정보는 지금 당사자에게 가장 적합한 조언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성급하게 알려고 합니다. 잘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결론부터 서둘러 알려고 독촉합니다. 이것은 상담자를 괴롭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기도할 때도 역시 하나님에게 독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는데 전문가이십니다. 우리가 독촉한다고 해서 그 뜻을 쉽게 돌이키시는 분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우리만 더욱 지치게 됩니다. 서두르고 조급해 할수록 우리는 마음에 상처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있는 듯이 없는 듯이 그렇게 동행하시므로 예민한 감각을 가지지 않으면 그 존재하심을 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님의 존재를 잊고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런 사실을 깨닫고 매사에 성령님을 기대하고 그 지시하심에만 복종하려고 하는 수동적인 태도도 역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의 삶을 살고자 결단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승복하려는 신실함이 때로는 마귀의 유혹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위험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맹목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려는 수동적인 자세를 순종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거듭나고 영적 자각을 느끼기 시작한 유아기에는 영적 경험이 풍성해지고 성령의 음성이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의 역사의 정점으로 여기고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의지를 모두 부인하고 오로지 성령님의 음성에만 매달리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고 음성을 거두시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삭막함을 경험하게 되고 안절부절하면서 다시 음성듣기를 회복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뜻하지 않게 마귀의 유혹에 휘말리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불순종과 교만으로 인해서 음성듣기가 어려워진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므로 피하고 영적 성숙을 향한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자신에게 향하신 뜻을 파악하여 우리의 연단된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삭막함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까지 하나님에게 묻는 행위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이것은 성숙과도 다른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일일이 여쭙고 지시하심을 따르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 것이며, 성숙한 지각으로 행동해야 하는 영적 성숙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행위이므로 하나님은 이런 태도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뢰고 여쭙는 것은 결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교제를 나누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므로 이는 성숙한 사람일수록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교제의 수단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기도를 통해서 주님에게 우리 모든 것을 아룁니다. 그 대부분은 결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친밀한 교제를 위한 것이며, 간혹 중대한 문제가 있을 경우 성령님의 조언을 부탁하며 그 지시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판단을 하게 되며, 이 판단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는 죄로 인해서 판단의 기준을 잃게 되고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므로 항상 우리의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움직임에 예민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오랜 친밀한 교제가 우선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거듭나면 그 즉시 성령님과 친밀한 영적 경험을 공유하게 하시며, 이 시기에 우리는 많은 영적 현상들을 접하게 되지요. 그러나 지도자가 없어서 이 소중한 시기를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 채로 지내 보내고 맙니다. 이렇게 되어 그 후 우리는 삭막하고 갈등만 남는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에 합할 수도 없는 무지함에 그냥 버려진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그 시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어디서 그 사랑을 잃었는지 그리로 돌아가 회개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 사도가 일곱 교회를 언급하는 중 제일 먼저 소개하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 주신 말씀의 내용입니다(계 2:5).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적 경험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 우선 목적입니다. 이 과정은 다양한 수단과 방법들이 있는데 개인에 따라 다소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으로 크게 구분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대부분이 여성이고 따라서 감성적인 사람들이 절대로 다수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교회는 영적 경험을 통해서 마음으로 이해되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가르침을 준비해야 합니다.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이해가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오는 성령님의 접근을 깨닫고 그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해가 목회자들에게 절대로 필요합니다. 다수의 남성 목회자들은 이런 부분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성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이성으로만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수의 여성 성도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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