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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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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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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8:22 벳세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벹으시며 그에게 안수(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짐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축복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분의 축복을 받으며 그분의 축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벗세다에 가셨을 때 소경 한사람을 축복하시고 그 소경은 눈을 뜨는 축복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람들이 소경 한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고쳐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하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을 데리고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가신 이유는 그 소경을 데리고 온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보다는 이적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기사와 이적과 표적과 축복을 '얻기'위해 예수님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입니다. 다 얻었을지라도 '복음'을 얻지 못했다면 그 얻은 것이 다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도 얻지 못했을지라도 '복음'을 얻었다면 그 사람은 나머지도 다 얻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고(11절) 제자들은 아직도 복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또 기억치 못하고(18절) 예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 이적을 행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12절) 그리하여 소경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에게만 고요히 관계하심으로 그에게 영적인 안식을 주셨습니다. 누구든 인간은 주님 안에서만 평안을 얻습니다. 평안함 가운데서 비로소 생명의 자라는 기운이 느껴집니다. 불안한 마음은 사람의 뼈를 마르게 하고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속이 상하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평안함과 안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편안'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돈으로 '편안'은 살 수 있어도 '평안'은 살 수 없습니다. 말장난 같지만 '편안'과 '평안'은 본질적으로 다른 마음 상태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 안에서 쉬게 하소서.
걱정도 하지 않고 근심도 하지 않고
눈물과 고통의 짐을 벗어 놓고
당신 안에서 쉬게 하소서
당신의 손이 모든 짐을 가볍게 한다는 걸 잊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나와 함께 할 때에는
캄캄한 어둠의 길을 걸을 때에도 평안이 있나이다.
예수님은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니 처음에는 사람들을 보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고, 예수님이 다시 안수하시니 만물이 밝히 보였습니다. 단번에 고쳐지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소경의 믿음이 부족해서인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안수하신 것은 매우 드문 일 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언제나 '다시'한번 우리에게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의 무딘 마음과 닫혀진 영적 눈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한번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도 주님은 '다시 오실 메시야'셨고 신약의 예수님도 '다시 오실'예수님 이십니다.
'다시'오시는 주님이시기에 나의 닫혀진 눈이 열리고 흐려진 시야기 밝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안수하시는 주님의 인내와 사랑이 있기에 주님을 주목하여(25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흐릿하게 보였던 예수님을 주목하여 확실하게 볼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맙시다. 다시 안수하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합시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너무도 이적에만 마음을 두고 복음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까닭에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하십니다. (26절)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축복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분의 축복을 받으며 그분의 축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벗세다에 가셨을 때 소경 한사람을 축복하시고 그 소경은 눈을 뜨는 축복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람들이 소경 한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고쳐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하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을 데리고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가신 이유는 그 소경을 데리고 온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보다는 이적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기사와 이적과 표적과 축복을 '얻기'위해 예수님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입니다. 다 얻었을지라도 '복음'을 얻지 못했다면 그 얻은 것이 다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도 얻지 못했을지라도 '복음'을 얻었다면 그 사람은 나머지도 다 얻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고(11절) 제자들은 아직도 복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또 기억치 못하고(18절) 예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 이적을 행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12절) 그리하여 소경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에게만 고요히 관계하심으로 그에게 영적인 안식을 주셨습니다. 누구든 인간은 주님 안에서만 평안을 얻습니다. 평안함 가운데서 비로소 생명의 자라는 기운이 느껴집니다. 불안한 마음은 사람의 뼈를 마르게 하고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속이 상하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평안함과 안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편안'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돈으로 '편안'은 살 수 있어도 '평안'은 살 수 없습니다. 말장난 같지만 '편안'과 '평안'은 본질적으로 다른 마음 상태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 안에서 쉬게 하소서.
걱정도 하지 않고 근심도 하지 않고
눈물과 고통의 짐을 벗어 놓고
당신 안에서 쉬게 하소서
당신의 손이 모든 짐을 가볍게 한다는 걸 잊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나와 함께 할 때에는
캄캄한 어둠의 길을 걸을 때에도 평안이 있나이다.
예수님은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니 처음에는 사람들을 보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고, 예수님이 다시 안수하시니 만물이 밝히 보였습니다. 단번에 고쳐지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소경의 믿음이 부족해서인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안수하신 것은 매우 드문 일 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언제나 '다시'한번 우리에게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의 무딘 마음과 닫혀진 영적 눈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한번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도 주님은 '다시 오실 메시야'셨고 신약의 예수님도 '다시 오실'예수님 이십니다.
'다시'오시는 주님이시기에 나의 닫혀진 눈이 열리고 흐려진 시야기 밝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안수하시는 주님의 인내와 사랑이 있기에 주님을 주목하여(25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흐릿하게 보였던 예수님을 주목하여 확실하게 볼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맙시다. 다시 안수하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합시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너무도 이적에만 마음을 두고 복음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까닭에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하십니다. (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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