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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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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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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12:34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는 아무도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현대어성경)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이 변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논쟁을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지만, 이 청년은 진지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그리하여 이 청년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34절) 몇 안되는 사람가운데 한사람이 됩니다.
아는 것이 먼저입니까, 믿는 것이 먼저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이 먼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믿음'보다 '아는것(이해하는것)'이 먼저입니다. 오늘 본문가운데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청년은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34절) 때문에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과 논쟁을 했던 유대인들은 참으로 열심히 '믿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믿는 그 믿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신18:15, 18) 또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을 찾아 왔을 때 분명히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나실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민심을 소란케 하는 이단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오늘 저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철썩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우리들의 성경을 믿는 믿음은 유대인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입니다. 우리는 성경 요절을 100구절만 외우고 있어도 대단한 성경 박사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쉐마'교육을 받으며 거의 모든 성경을 외우다시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삶 가운데 실천하는 것도 우리는 유대인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없는 규례와 유전까지 만들어서 철저하게 지킵니다.
성경말씀을 완벽하게 지키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이 잘못입니까, 아니면 성경 말씀은 대충 지키거나 말씀대로 살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잘못입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우리는 유대인들만큼 성경을 알지도 못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이고 우리가 옳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느냐 혹은 믿지 않느냐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 알고(이해하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만큼 전도를 잘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지난 여름 시골집에 다녀왔는데 그 작은 동네에 서울에서 한 가정이 이사를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사온 가정은 동네 사람을 전도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들어온 '여호와의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네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집을 팔고 시골에 들어와 동네사람들과 함께 서투르게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열심있는(?)전도도 헛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못 이해하는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만큼 성경말씀대로 살지도 못하고, 여호와의 증인들만큼 대단한 전도의 열정도 없고, 몰몬교나 통일교인들처럼 뜨거운 열심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틀리고 우리가 옳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경을 잘 모르지만 우리는 성경을 잘 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육체대로' 보고 '육체대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영적으로 알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말씀을 삶 가운데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 묵상이나 큐티, 또는 설교가 반드시 '실천' '행함'이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목회자들은 설교는 반드시 '적용'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듯 합니다. 그래서 설교 말미에는 '이렇게 저렇게 하십시요.'하고 잔소리(?)를 덧붙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육체대로 아무리 잘 적용하고 실천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사람은 말씀을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고 그 마음을 시원하고 흡족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남긴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는 아무도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12장 34절 (현대어성경) 대부분의 성경이 '이해'에 해당하는 '누네코스'를 '지혜'로 번역하였는데 '누네코스'는 '누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고 '누스'는 신약성경에 7회 사용되었는데 모두 '이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만이 '이해'로 잘 번역하였네요. * 들꽃편지 2002.5 (제236호)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이 변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논쟁을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지만, 이 청년은 진지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그리하여 이 청년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34절) 몇 안되는 사람가운데 한사람이 됩니다.
아는 것이 먼저입니까, 믿는 것이 먼저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이 먼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믿음'보다 '아는것(이해하는것)'이 먼저입니다. 오늘 본문가운데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청년은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34절) 때문에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과 논쟁을 했던 유대인들은 참으로 열심히 '믿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믿는 그 믿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신18:15, 18) 또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을 찾아 왔을 때 분명히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나실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민심을 소란케 하는 이단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오늘 저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철썩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우리들의 성경을 믿는 믿음은 유대인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입니다. 우리는 성경 요절을 100구절만 외우고 있어도 대단한 성경 박사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쉐마'교육을 받으며 거의 모든 성경을 외우다시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삶 가운데 실천하는 것도 우리는 유대인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없는 규례와 유전까지 만들어서 철저하게 지킵니다.
성경말씀을 완벽하게 지키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이 잘못입니까, 아니면 성경 말씀은 대충 지키거나 말씀대로 살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잘못입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우리는 유대인들만큼 성경을 알지도 못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이고 우리가 옳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느냐 혹은 믿지 않느냐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 알고(이해하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만큼 전도를 잘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지난 여름 시골집에 다녀왔는데 그 작은 동네에 서울에서 한 가정이 이사를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사온 가정은 동네 사람을 전도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들어온 '여호와의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네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집을 팔고 시골에 들어와 동네사람들과 함께 서투르게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열심있는(?)전도도 헛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못 이해하는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만큼 성경말씀대로 살지도 못하고, 여호와의 증인들만큼 대단한 전도의 열정도 없고, 몰몬교나 통일교인들처럼 뜨거운 열심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틀리고 우리가 옳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경을 잘 모르지만 우리는 성경을 잘 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육체대로' 보고 '육체대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영적으로 알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말씀을 삶 가운데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 묵상이나 큐티, 또는 설교가 반드시 '실천' '행함'이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목회자들은 설교는 반드시 '적용'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듯 합니다. 그래서 설교 말미에는 '이렇게 저렇게 하십시요.'하고 잔소리(?)를 덧붙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육체대로 아무리 잘 적용하고 실천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사람은 말씀을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고 그 마음을 시원하고 흡족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남긴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는 아무도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12장 34절 (현대어성경) 대부분의 성경이 '이해'에 해당하는 '누네코스'를 '지혜'로 번역하였는데 '누네코스'는 '누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고 '누스'는 신약성경에 7회 사용되었는데 모두 '이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만이 '이해'로 잘 번역하였네요. * 들꽃편지 2002.5 (제2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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