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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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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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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12:41 예수께서 연보궤(捐補櫃)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었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랩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오늘 본문 가운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구절은 4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새번역성경은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돈은 무섭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성전 사역기간 동안 그 돈에 관련된 사건이 무려 다섯 번이나 있었고, 오늘 과부의 헌금 사건은 돈과 관련된 문제의 핵심을 짚은 마지막 결론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최대 관심은 돈이고, 최대의 문제도 돈입니다. 저도 돈이 문제이고 여러분도 돈이 문제입니다. 돈문제에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고 환전하는 것을 보지 못하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막11:15-19) 또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주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하여 주인이 보낸 아들까지 죽인 패역한 농부들을 진멸하셨습니다. (막12:1-12) 또 납세의 문제(막12:13-17),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막12:38-40)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모두 유대교의 지독한 물질적인 타락상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였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했어도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11:17), 포도원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것은 재산 탈취의 타락된 욕심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겨우 두 렙돈의 보잘 것 없는 돈을 넣은 과부는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돈의 액수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신 것은 액수가 아니라 '마음'을 보신것입니다.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 가를 보고 계셨다."12:41 (표준새번역)
'어떻게' 라는 말을 눈여겨 보십시오. 이 '어떻게'라는 말은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방식으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돈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나의 자세가, 나의 방식은 부자에 가까운지 과부에 가까운지 진실되게 돌이켜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앉으신 곳
2. 부자들의 마음
3. 과부의 마음
1.예수님이 앉으신 곳. - 성전 구조상 예수님이 앉으신 헌금함 맞은편은 말씀을 전하는 '설교단'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성전을 방문하실 때마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눈여겨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시던 어느날 예수님은 아예 헌금함이 잘 보이는 설교단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각 사람의 헌금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예수님은 헌금궤 맞은편에서 불꽃처럼 뜨거운 눈으로 헌금하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유심히 관찰하고 계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곳이 설교단 인가요? 주님의 설교단은 언제나 내 얼굴이 빤히 마주보이는 곳에 놓여져 있습니다. 주님의 설교단은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나의 심중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곳이며 나의 참 마음을 달아보는 곳입니다. 주님의 설교단은 나와 너무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기지 못합니다. 주님은 빛이십니다. 그 빛 앞에서는 모든 어두움이 견디지 못합니다.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외치신 곳이 바로 성전 연보궤 맞은쪽 설교단이었다는 것을 (요8:12,20)
오늘날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강대상이 바로 예수님이 서 계셨던 설교단입니다. 별로 하나님과 친하지 않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자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강대상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강대상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나를 빤히 들여다 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무시하고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 밖에 안됩니다. 나무로 짜 맞추거나 유리로 만든 그 강대상 자체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강대상이라는 상징성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강대상을 바라 볼 때마다 그곳에 나의 심령을 궤뚫는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있음을 의식하십시오. 비록 흠 투성이이고 내 맘에 들지 않는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 설교를 통해서 나의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강대상이라 그 말입니다.
2.부자들의 마음 - 부자들은 예수님이 헌금궤 맞은편 설교단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많은 헌금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설교단 앞의 예수님이 아니라 많은 무리들의 박수갈채와 선망의 탄성과 부러움에 찬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은밀히 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많은 헌금을 인하여 열광하고 부러움에 찬 시선을 보낼 때 예수님은 얼마를 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 (12:41절) 내는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내가 헌금함에 헌금봉투를 넣을 때 그 안에 든 액수 보다는 어떻게 해서 그 돈을 헌금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리고 계십니다. 돈의 액수에 관심있는 것은 사람들이지 주님이 아닙니다.
늘 반복해서 하는 일은 습관이나 형식에 빠지기 쉽습니다. 헌금도 정기적으로 주일마다 하기 때문에 다분히 기계적인 반복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헌금은 '사람들의 눈을 속일수 있는' 매우 손쉬운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교회들이 그 헌금의 액수에 따라 믿음의 크기를 평가해 주고, 헌금을 위한 축복의 기도소리도 더욱 요란하고 길어지기 때문에 불의한 돈을 가지고도 손쉽게 믿음이 크고 축복받은 사람의 행세를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갈채뒤에 텅 빈 마음의 공허와 빈약한 영성을 보시고 쯧쯧 혀를 차신단 말입니다. 부자들의 헌금은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고 겉으로 자기 자랑과 과시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구제할 때에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마태복음6:2) 하였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마6:3) 확실히 알게 하였으며, 은밀히 하지 않고 나팔을 크게 불었습니다.(마6:2)
교회는 자주 헌금을 많이 한 자를 높여주고, 돈이 있어야 장로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목사안수를 받는데도 몇백만원의 돈이 있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장, 노회장을 하는데도 많은 돈이 뿌려져야 합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액의 돈을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비친 부자들의 헌금은 '생명'이 없는 죽은 돈이었습니다. 그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풍족한 중에서'(44절) 얼마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2.과부의 마음 - 성전의 헌금함은 나팔처럼 목이 길었습니다. 그리하여 헌금함 입구에 동전을 넣으면 긴 관을 따라 내려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많은 양의 돈을 넣으면 그 소리도 길게 들리고 크고 시끄럽게 들려서 사람들이 다 알게 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헌금기도와 얼마나 유사합니까! 두랩돈의 돈은 요란한 소리가 날리도 없고 시간이 길게 걸릴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절) 고 하셨습니다. 41절의 '여러 부자'들이 넣은것보다 42절의 '한 가난한 과부'의 두랩돈이 더 큰 돈이라는 예수님의 계산법입니다.
과부는 헌금을 바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44절)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의 전부라는 것은 곧 '생명'입니다. 모든 소유와 생활비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습니다. 과부는 그런 절박함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드린 것입니다.
이 과부처럼 돌아오는 주일에 나의 모든 소유와 생활비까지 다 정리하여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 그렇게 합시다. 집도 팔고 자가용도 팝시다. 택도없는 소리 말라구요? 그러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지요? 드디어 나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지 않나요?
그녀는 과부이니만큼 외롭고, 인격적으로 의지할데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의지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죽이시는 분도 하니님이시라. 도무지 생활고 같은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는 계명의 실천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주기도문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진실되게 드릴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오래도록 자손만대 먹을 것을 쌓아놓고 어찌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며 뻔뻔하게 기도할 수가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부자들의 커다란 돈이 교회의 운영을 돕고,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가난한이들을 구제하는 효용성 면에서는 유익할 지 몰라도,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런 일을 많이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과부의 두랩돈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며,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하나님을 어느정도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을 어떻게 내 모든 것의 소유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두 랩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적 삶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본 성전은 위선과 거짓과 도둑놈들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성전은 화려한 것 같았지만 추하였고, 살아있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죽은자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커다란 무덤 같았으며, 모두들 돈에게 묶여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에 대한 아무런 열매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헌신은 더더구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생명없는 죽은 것들로만 가득찬 삭막한 세상에서 한 숨 길게 쉬고 있을 때,
그러던 중 저 쪽 성전 한 모퉁이에서 그 마음 안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품고 조용히 다가오는 한 초라한 과부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를 향해 살며시 미소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들꽃편지 제225호 2001년4월 15일>
오늘 본문 가운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구절은 4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새번역성경은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돈은 무섭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성전 사역기간 동안 그 돈에 관련된 사건이 무려 다섯 번이나 있었고, 오늘 과부의 헌금 사건은 돈과 관련된 문제의 핵심을 짚은 마지막 결론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최대 관심은 돈이고, 최대의 문제도 돈입니다. 저도 돈이 문제이고 여러분도 돈이 문제입니다. 돈문제에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고 환전하는 것을 보지 못하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막11:15-19) 또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주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하여 주인이 보낸 아들까지 죽인 패역한 농부들을 진멸하셨습니다. (막12:1-12) 또 납세의 문제(막12:13-17),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막12:38-40)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모두 유대교의 지독한 물질적인 타락상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였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했어도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11:17), 포도원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것은 재산 탈취의 타락된 욕심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겨우 두 렙돈의 보잘 것 없는 돈을 넣은 과부는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돈의 액수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신 것은 액수가 아니라 '마음'을 보신것입니다.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 가를 보고 계셨다."12:41 (표준새번역)
'어떻게' 라는 말을 눈여겨 보십시오. 이 '어떻게'라는 말은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방식으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돈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나의 자세가, 나의 방식은 부자에 가까운지 과부에 가까운지 진실되게 돌이켜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앉으신 곳
2. 부자들의 마음
3. 과부의 마음
1.예수님이 앉으신 곳. - 성전 구조상 예수님이 앉으신 헌금함 맞은편은 말씀을 전하는 '설교단'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성전을 방문하실 때마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눈여겨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시던 어느날 예수님은 아예 헌금함이 잘 보이는 설교단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각 사람의 헌금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예수님은 헌금궤 맞은편에서 불꽃처럼 뜨거운 눈으로 헌금하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유심히 관찰하고 계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곳이 설교단 인가요? 주님의 설교단은 언제나 내 얼굴이 빤히 마주보이는 곳에 놓여져 있습니다. 주님의 설교단은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나의 심중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곳이며 나의 참 마음을 달아보는 곳입니다. 주님의 설교단은 나와 너무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기지 못합니다. 주님은 빛이십니다. 그 빛 앞에서는 모든 어두움이 견디지 못합니다.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외치신 곳이 바로 성전 연보궤 맞은쪽 설교단이었다는 것을 (요8:12,20)
오늘날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강대상이 바로 예수님이 서 계셨던 설교단입니다. 별로 하나님과 친하지 않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자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강대상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강대상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나를 빤히 들여다 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무시하고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 밖에 안됩니다. 나무로 짜 맞추거나 유리로 만든 그 강대상 자체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강대상이라는 상징성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강대상을 바라 볼 때마다 그곳에 나의 심령을 궤뚫는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있음을 의식하십시오. 비록 흠 투성이이고 내 맘에 들지 않는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 설교를 통해서 나의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강대상이라 그 말입니다.
2.부자들의 마음 - 부자들은 예수님이 헌금궤 맞은편 설교단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많은 헌금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설교단 앞의 예수님이 아니라 많은 무리들의 박수갈채와 선망의 탄성과 부러움에 찬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은밀히 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많은 헌금을 인하여 열광하고 부러움에 찬 시선을 보낼 때 예수님은 얼마를 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 (12:41절) 내는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내가 헌금함에 헌금봉투를 넣을 때 그 안에 든 액수 보다는 어떻게 해서 그 돈을 헌금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리고 계십니다. 돈의 액수에 관심있는 것은 사람들이지 주님이 아닙니다.
늘 반복해서 하는 일은 습관이나 형식에 빠지기 쉽습니다. 헌금도 정기적으로 주일마다 하기 때문에 다분히 기계적인 반복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헌금은 '사람들의 눈을 속일수 있는' 매우 손쉬운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교회들이 그 헌금의 액수에 따라 믿음의 크기를 평가해 주고, 헌금을 위한 축복의 기도소리도 더욱 요란하고 길어지기 때문에 불의한 돈을 가지고도 손쉽게 믿음이 크고 축복받은 사람의 행세를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갈채뒤에 텅 빈 마음의 공허와 빈약한 영성을 보시고 쯧쯧 혀를 차신단 말입니다. 부자들의 헌금은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고 겉으로 자기 자랑과 과시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구제할 때에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마태복음6:2) 하였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마6:3) 확실히 알게 하였으며, 은밀히 하지 않고 나팔을 크게 불었습니다.(마6:2)
교회는 자주 헌금을 많이 한 자를 높여주고, 돈이 있어야 장로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목사안수를 받는데도 몇백만원의 돈이 있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장, 노회장을 하는데도 많은 돈이 뿌려져야 합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액의 돈을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비친 부자들의 헌금은 '생명'이 없는 죽은 돈이었습니다. 그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풍족한 중에서'(44절) 얼마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2.과부의 마음 - 성전의 헌금함은 나팔처럼 목이 길었습니다. 그리하여 헌금함 입구에 동전을 넣으면 긴 관을 따라 내려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많은 양의 돈을 넣으면 그 소리도 길게 들리고 크고 시끄럽게 들려서 사람들이 다 알게 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헌금기도와 얼마나 유사합니까! 두랩돈의 돈은 요란한 소리가 날리도 없고 시간이 길게 걸릴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절) 고 하셨습니다. 41절의 '여러 부자'들이 넣은것보다 42절의 '한 가난한 과부'의 두랩돈이 더 큰 돈이라는 예수님의 계산법입니다.
과부는 헌금을 바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44절)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의 전부라는 것은 곧 '생명'입니다. 모든 소유와 생활비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습니다. 과부는 그런 절박함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드린 것입니다.
이 과부처럼 돌아오는 주일에 나의 모든 소유와 생활비까지 다 정리하여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 그렇게 합시다. 집도 팔고 자가용도 팝시다. 택도없는 소리 말라구요? 그러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지요? 드디어 나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지 않나요?
그녀는 과부이니만큼 외롭고, 인격적으로 의지할데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의지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죽이시는 분도 하니님이시라. 도무지 생활고 같은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는 계명의 실천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주기도문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진실되게 드릴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오래도록 자손만대 먹을 것을 쌓아놓고 어찌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며 뻔뻔하게 기도할 수가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부자들의 커다란 돈이 교회의 운영을 돕고,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가난한이들을 구제하는 효용성 면에서는 유익할 지 몰라도,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런 일을 많이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과부의 두랩돈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며,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하나님을 어느정도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을 어떻게 내 모든 것의 소유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두 랩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적 삶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본 성전은 위선과 거짓과 도둑놈들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성전은 화려한 것 같았지만 추하였고, 살아있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죽은자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커다란 무덤 같았으며, 모두들 돈에게 묶여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에 대한 아무런 열매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헌신은 더더구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생명없는 죽은 것들로만 가득찬 삭막한 세상에서 한 숨 길게 쉬고 있을 때,
그러던 중 저 쪽 성전 한 모퉁이에서 그 마음 안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품고 조용히 다가오는 한 초라한 과부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를 향해 살며시 미소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들꽃편지 제225호 2001년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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