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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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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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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누가복음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24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전 세계 여러 민족 중 유독 족보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두 민족이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과 한국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족보들이 나옵니다. 창세기에 10번, 역대상하는 아예 족보책이고 신약의 맨 처음이 족보로 시작하며, 예수 공생에 사역 역시 족보를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족보는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지파, 어느 지방 출신인가에 따라 함께 식사는 물론 마주보지도 않고 심지어 사마리아 지방 같은 경우에는 그 땅을 밟지 않기 위해서 먼길을 돌아서 다닐 정도였으니, 우리나라의 지역차별, 지역감정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약 2천년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들은 민족적 혈통(족보)를 고스란히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자기들은 하나님께 택함받은 민족(선민)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유대인들의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유명합니다. 그들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는데 하나님께 택함 받은 유대인들과,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한 그밖에 사람들(이방인)이라 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지방 출신이기에 '나사렛 예수'라 하는데, 이 말속에는 나사렛 지방 사람을 비하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1:46) 그래서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마태복음은 처음 시작부터 족보를 들먹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면 자기들의 조상이요, 다윗왕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정통 왕이 아닙니까? 이러니 족보 따지는 유대인들도 일단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가 공생애 시작할 즈음에 제시됩니다. 그 이전까지 기록된 내용은 예수님의 친족들과 관련된 가정사입니다.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갖는 이야기,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이야기 등 사람의 가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애비 없이 태어난 사생아라 하는 악의에 찬 헛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누가가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요 8:41)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비꼬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는 정통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는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다. 우리는 너처럼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후레자식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다니 그게 뭔 말이냐?" 이런 뜻이지요. 누가가 이런 사람들의 뜬소문에서 예수님을 변호하자면 건전한 가문과 정상적인 가정생활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람들이 그래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을까봐 곳곳에 구약성경을 인용해가면서 "구약의 이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렇게 이루어졌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살아오신 모습들을 일대기 적듯이 차례로 적어갑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해 보았겠지만 재미없고 투박스러운 족보의 장벽을 넘기가 힘이 듭니다. - 성경을 읽을 때 이 족보의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성경읽기의 문안에 들어갔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문은 쉽게 열리면 안됩니다. 가족이나 아는 사람 외에는 쉽게 들어올 수 없도록 잘 잠겨 있어야 합니다. 성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성경이 아닙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면 안되고, 묻지 않는 자에게 해답을 알려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진심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경의 문을 열 때 성경은 쉽게 문이 열리지만, 그렇지 않고 사리사욕으로 성경을 한 번 이용해 보겠다고 펼치는 사람은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낳고 하는 족보 앞에서 햇갈려 그만 성경을 덮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족보를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족보에 나오는 조상들 한사람 한사람이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고 연약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입니다. 또한 인간들은 자식에게 한 약속도 며칠을 못 넘기는데, 2000년 긴 기다림 끝에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최용우 2000.11.8.수 믿음교회 수요예배설교 2002.6.11수정
전 세계 여러 민족 중 유독 족보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두 민족이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과 한국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족보들이 나옵니다. 창세기에 10번, 역대상하는 아예 족보책이고 신약의 맨 처음이 족보로 시작하며, 예수 공생에 사역 역시 족보를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족보는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지파, 어느 지방 출신인가에 따라 함께 식사는 물론 마주보지도 않고 심지어 사마리아 지방 같은 경우에는 그 땅을 밟지 않기 위해서 먼길을 돌아서 다닐 정도였으니, 우리나라의 지역차별, 지역감정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약 2천년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들은 민족적 혈통(족보)를 고스란히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자기들은 하나님께 택함받은 민족(선민)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유대인들의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유명합니다. 그들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는데 하나님께 택함 받은 유대인들과,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한 그밖에 사람들(이방인)이라 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지방 출신이기에 '나사렛 예수'라 하는데, 이 말속에는 나사렛 지방 사람을 비하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1:46) 그래서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마태복음은 처음 시작부터 족보를 들먹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면 자기들의 조상이요, 다윗왕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정통 왕이 아닙니까? 이러니 족보 따지는 유대인들도 일단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가 공생애 시작할 즈음에 제시됩니다. 그 이전까지 기록된 내용은 예수님의 친족들과 관련된 가정사입니다.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갖는 이야기,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이야기 등 사람의 가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애비 없이 태어난 사생아라 하는 악의에 찬 헛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누가가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요 8:41)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비꼬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는 정통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는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다. 우리는 너처럼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후레자식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다니 그게 뭔 말이냐?" 이런 뜻이지요. 누가가 이런 사람들의 뜬소문에서 예수님을 변호하자면 건전한 가문과 정상적인 가정생활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람들이 그래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을까봐 곳곳에 구약성경을 인용해가면서 "구약의 이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렇게 이루어졌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살아오신 모습들을 일대기 적듯이 차례로 적어갑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해 보았겠지만 재미없고 투박스러운 족보의 장벽을 넘기가 힘이 듭니다. - 성경을 읽을 때 이 족보의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성경읽기의 문안에 들어갔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문은 쉽게 열리면 안됩니다. 가족이나 아는 사람 외에는 쉽게 들어올 수 없도록 잘 잠겨 있어야 합니다. 성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성경이 아닙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면 안되고, 묻지 않는 자에게 해답을 알려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진심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경의 문을 열 때 성경은 쉽게 문이 열리지만, 그렇지 않고 사리사욕으로 성경을 한 번 이용해 보겠다고 펼치는 사람은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낳고 하는 족보 앞에서 햇갈려 그만 성경을 덮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족보를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족보에 나오는 조상들 한사람 한사람이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고 연약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입니다. 또한 인간들은 자식에게 한 약속도 며칠을 못 넘기는데, 2000년 긴 기다림 끝에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최용우 2000.11.8.수 믿음교회 수요예배설교 2002.6.11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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