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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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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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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5:17 -26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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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홍수속에서 정작 마실 물은 없는 이유를 아십니까?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깊고 진지하게 묵상되지 못하고 설교는 언제나 즉석에서 창조(?)되거나 짜집기 됩니다. 이 일 저일로 너무 바쁜 목회자들이 말씀을 소화시켜서 에너지로 만들어 낼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차라리 교회에서 시마다 때마다 다른 설교를 하기 보다는 한편의 설교를 주일낮, 밤, 수요, 철야 시간마다 반복한다면 좋겠습니다. 설교 한편을 한 네번정도 반복하면그 설교는 완벽하게 성도들의 머리속에 박힐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가지고 묵상이나 설교를 한다면 한 10편정도 다른 내용이 나올수 있습니다. 한 본문을가지고 서로 다른 제목으로 일주일 내내 설교를 하면 더욱 그 말씀이 실감나게 적용이 되지 않을까요?
1.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본 예수
2.중풍병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친구들과 예수님
3.네 친구들의 아름다운 우정
4.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바리새인과 중풍병자
5.땅에서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예수님의 권세
6.믿음과 죄사함
7.생각과 행동
8.예수님의 습관
9.중풍병자와 예수님
10.놀라움과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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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네 친구들의 아름다운 우정'을 제목으로 묵상을 하겠습니다.
이 세상 일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기적이 아니고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기적이 필요한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필요도 없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멜테리 선교사는 “하나님은 욕망에 응답하시지 않고 필요에 응답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면 기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에 걸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네 명 생각은 달랐습니다.예수님에게 데리고 가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기적을 기대하고 도전하는 이에게 기적이 따릅니다.
중풍병자는 움직이지 못 하여 중풍병자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메어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2;3) 혼자 하려고 하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동료들과 같이 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네 명이 같이 중풍병자를 움직였습니다. 4명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같이 일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기적은 따르고 있습니다. 옆에 믿음의 동지가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네 명은 포기하지 동료들과 함께 중풍병자를 메어 오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앞으로 중풍병자를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가 컸습니다.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가는 길이 없다는 문제입니다.그러나 이들은 위를 보았습니다. 지붕을 뜯을 수 있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이같이 포기하지 않고 동료를 보며 위를 보는 이에게는 기적이 따릅니다. 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네 명에게는 기적이 따랐습니다.포기하지 않고 합력하여 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를 도왔던 네명과 같은 그런 우정 어린 친구가 나에게 있는가? 나는 또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도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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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번째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26절입니다.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놀랐다는 말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인데, 잘 보세요. 가장 종교적이고 교리적이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놀라버렸습니다.
그들을 놀라게 할 사건이 이세상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동안 체험해 보지 못한 '신적인 현존'을 체험하고서 마치 황홀경에 빠진것 같은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동안 전문가(?)로서 하나님을 수 없이 말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하나님을 만나 본 일도 없고, 하나님의 기침소리조차 들어 본 일도 없고, 머리속에 관념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그렇듯하게 말하는 것에만 일등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진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을 보고는 그만 눈이 휘둥그래져버렸습니다.
뭐, 꼬투리 잡을 일이 없나 하는 마음으로 사사껀껀 시비를 걸었는데, 눈 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버렸고, 이내 강한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이나 신학사상을 잘 들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이 딱딱하고, 교리적이고,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남을 용납하지도 못하고, 기적도 없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나 냉정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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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시각과 입장에서 한 본문의 말씀을 여러번 묵상하고 여러번 설교한다면 훨씬 생생하게 말씀이 가슴에 남을것 같습니다. ⓒ최용우 2002.10.6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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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홍수속에서 정작 마실 물은 없는 이유를 아십니까?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깊고 진지하게 묵상되지 못하고 설교는 언제나 즉석에서 창조(?)되거나 짜집기 됩니다. 이 일 저일로 너무 바쁜 목회자들이 말씀을 소화시켜서 에너지로 만들어 낼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차라리 교회에서 시마다 때마다 다른 설교를 하기 보다는 한편의 설교를 주일낮, 밤, 수요, 철야 시간마다 반복한다면 좋겠습니다. 설교 한편을 한 네번정도 반복하면그 설교는 완벽하게 성도들의 머리속에 박힐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가지고 묵상이나 설교를 한다면 한 10편정도 다른 내용이 나올수 있습니다. 한 본문을가지고 서로 다른 제목으로 일주일 내내 설교를 하면 더욱 그 말씀이 실감나게 적용이 되지 않을까요?
1.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본 예수
2.중풍병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친구들과 예수님
3.네 친구들의 아름다운 우정
4.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바리새인과 중풍병자
5.땅에서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예수님의 권세
6.믿음과 죄사함
7.생각과 행동
8.예수님의 습관
9.중풍병자와 예수님
10.놀라움과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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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네 친구들의 아름다운 우정'을 제목으로 묵상을 하겠습니다.
이 세상 일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기적이 아니고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기적이 필요한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필요도 없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멜테리 선교사는 “하나님은 욕망에 응답하시지 않고 필요에 응답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면 기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에 걸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네 명 생각은 달랐습니다.예수님에게 데리고 가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기적을 기대하고 도전하는 이에게 기적이 따릅니다.
중풍병자는 움직이지 못 하여 중풍병자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메어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2;3) 혼자 하려고 하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동료들과 같이 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네 명이 같이 중풍병자를 움직였습니다. 4명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같이 일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기적은 따르고 있습니다. 옆에 믿음의 동지가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네 명은 포기하지 동료들과 함께 중풍병자를 메어 오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앞으로 중풍병자를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가 컸습니다.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가는 길이 없다는 문제입니다.그러나 이들은 위를 보았습니다. 지붕을 뜯을 수 있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이같이 포기하지 않고 동료를 보며 위를 보는 이에게는 기적이 따릅니다. 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네 명에게는 기적이 따랐습니다.포기하지 않고 합력하여 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를 도왔던 네명과 같은 그런 우정 어린 친구가 나에게 있는가? 나는 또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도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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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번째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26절입니다.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놀랐다는 말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인데, 잘 보세요. 가장 종교적이고 교리적이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놀라버렸습니다.
그들을 놀라게 할 사건이 이세상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동안 체험해 보지 못한 '신적인 현존'을 체험하고서 마치 황홀경에 빠진것 같은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동안 전문가(?)로서 하나님을 수 없이 말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하나님을 만나 본 일도 없고, 하나님의 기침소리조차 들어 본 일도 없고, 머리속에 관념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그렇듯하게 말하는 것에만 일등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진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을 보고는 그만 눈이 휘둥그래져버렸습니다.
뭐, 꼬투리 잡을 일이 없나 하는 마음으로 사사껀껀 시비를 걸었는데, 눈 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버렸고, 이내 강한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이나 신학사상을 잘 들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이 딱딱하고, 교리적이고,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남을 용납하지도 못하고, 기적도 없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나 냉정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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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시각과 입장에서 한 본문의 말씀을 여러번 묵상하고 여러번 설교한다면 훨씬 생생하게 말씀이 가슴에 남을것 같습니다. ⓒ최용우 2002.10.6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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