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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 5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 창조 속에서 빛이 비추어 지고 그리고 우주를 계속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1-10)1. 하나님이 스스로 명백히 모습을 드러내시므로 우리는 모든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축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요 17 : 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말한 바 있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실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신성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훨씬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시 104 : 2)라고 아주 적절하게 외쳤다. 말하자면 이 말은 우주 창조이래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복장으로 자신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신 이후부터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영광의 훈장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과 같다.
시편 기자는 또한 같은 곳에서 능란하게 광대한 하늘을 왕궁에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시 104 : 2-4)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영광이 위에서는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에, 흔히 하늘을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른다(시 11 : 4). 더욱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어느정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광대한 이 우주의 구조를 그 광채의 무한한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 (히 11 : 3)이라고 우아하게 표현하였던 이유는, 정교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 말로 일종의 거울(mirror)이요, 바로 이 거울로 달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천체에다 만민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 이유는(시 19 : 2이하), 그 천체가 너무도 명백하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 관찰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밝혀 주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 : 19-20).
2.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수많은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은 천문학이나 의학, 또는 일체의 자연 과학의 엄밀한 연구 대상으로 정해진 심원한 것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그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반드시 그것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학문을 다소나마 수학한 사람들이라면 그 도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에 무식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없다든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더 한층 나아가 별의 운행을 조사하고, 그 위치를 정하며, 그 간격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정밀한 수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한층 더 명백하게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오로지 눈으로만 배운 일반 대중이나,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은 깨닫게 마련이다. 그것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천체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를 풍부하게 보여 주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곧 우리가 갈렌의 노련한 기술로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3. 인간이 신의 지혜로우심을 최고로 증명한다
따라서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의 소우주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싫증만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경이로움을 그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 : 27)라고 첨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사람이 자신을 깨우쳐 주는 하늘나라의 은혜를 내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의 그 게으름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와 똑같은 이유로 다윗은 도처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름과 영광을 간단히 찬양하고, 곧 이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시 8 : 4)라고 외쳤다. 그는 다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시 8 : 2)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가슴에서 젖 먹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다른 웅변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래서 다윗은 악마적인 교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없애고자 하는 자들의 그 광란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를 여기의 논전에 끌어내 온 것이다. 따라서 바울도 또한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 : 28)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와 같은 훌륭한 탁월성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심으로써,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증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교의 시인들도 상식과 경험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을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진실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맛보고 다음에 자기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드리지 않는 한, 아무도 자기를 바쳐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4.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께 반항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파렴치한 배은망덕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과, 동시에 측량 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더욱 더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그들은 깨닫고 있다. 그들은 또한 각종의 많은 은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것들이 신성의 표시임을 그들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버리고 만다. 실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추어 주는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탈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지상에는 많은 기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말하기 위하여 인간성 안에 널리 뿌려져 있는 신성의 모든 씨앗을 그릇되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수백 번이라도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광란이야말로 얼마나 가증한 것인가? 그들은 인간이 우연히 동물과 구별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을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린다. 그들은 극히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입과 눈에서부터 심지어는 발끝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각 지체 전체를 통하여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킨다. 그러나 영혼의 신속한 운동, 그 탁월한 기능, 그 특수한 은사, 이러한 것들은 특히 쉽게 감춰질 수 없는 신성을 그 면전에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에피큐로스 학파는 키클로페스(Cyclopes)와 같이 그러한 고귀성을 이용해서 더욱 더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우주에는 이러한 특권이 없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겨우 5척밖에 안 되는 버러지를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나라의 모든 지혜의 보화가 한 곳에 다 동원되었단 말인가? 첫째, 그 영혼 안에 육체의 각 부분과 부합하는 어떤 기관이 있다고 먼저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이다. 에피큐로스로 하여금 다음의 질문에 답하게 하자. 곧 원자의 집합이 어떻게 식물과 음료를 분해하여 한 부분은 배설물로 다른 부분은 피로 변하게 하는가? 그리고 마치 많은 영혼이 상의하여 한 육체를 다스리기나 하는 것처럼 무엇이 각 지체로 하여금 열심히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가!5.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돼지 떼와 같은 것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다. 오히려 해괴한 것들에 끌리어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리를 박탈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그 냉소적인 교설을 부정한 방법에 따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이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며 자연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대한 억압한다.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지체를 돕는 기능에만 국한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천체를 관측하고 별의 수를 계산하며, 그 크기를 결정하고 별과 별 사이 거리를 알며,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의 기울기의 정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도대체 사람의 육체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실로 나는 천문학의 유용함을 인정하고 있다.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체에 대한 이러한 깊은 연구에는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는 구별된 영혼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위에서 제시한 한 실례로 인해 독자들은 나머지 문제들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계속 기억에 담아 두며, 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영혼의 그 다방면의 민첩함 그리고 훌륭한 것들을 발명해 내며 많은 놀라운 발명품의 어머니인 영혼의 그 다방면의 교묘함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 외에도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이 여기 저기 배회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유익한 것들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추리하며 심지어는 미래의 일을 예시하기까지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인간에게 심어져 있는 영혼 불멸의 흔적은 지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신적 존재인 인간이 창조주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실로 우리가 받은 판단력에 따라 정과 사를 분별할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나라에 심판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수면 중에도 우리에게는 지능의 어떤 부분이 활동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깨어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많은 예술과 유익한 것들의 창안자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은 그가 받으실 찬양을 빼앗겨도 좋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다른 근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 졌음을 경험이 풍부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더우기 전 우주에 생명을 주는 것은 은밀한 영감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버질(Vergil)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좋아하고 있다.
최초에 한 영이 있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부양한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고루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이 영으로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유리같이 빛나는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했다.이 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장관(??)으로 세워진 이 세계가 마치 그 자체의 창조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은 다른 곳에서도 헬라 사람과 라틴 사람의 공통적인 견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빨아 들인다.
그것은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어날 때
실낱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
또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 많은 하늘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그것을 움직인다는 우주 정신에 대한 그 빈약한 사색이 인간의 마음에 경건을 일으키며 키우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사상은 또한 위와 같은 원리에서 연역해 낸 추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그 모독적인 시구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이 시는 실로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하고 찬양해야 할 참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영광적인 신격을 고안해 낸 것이다. 물론 경건한 마음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 자연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경건하게 말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귀에 거슬리며 부적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경건을 요하는 중대한 과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 사역의 열등한 과정과 혼동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6. 창조주는 자신의 주(主) 되심을 창조에서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고찰 할 때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셔서 바로 이 분이 자연 전체를 주관하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하시며, 우리의 신앙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시며, 또한 자기에게 예배를 드리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우리 안에 신적인 본성을 증거해 주는 그 놀라운 은사를 향유하면서도, 우리가 이 은사를 풍부하게 주신 창조주를 멸시하는 것처럼 더 불합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권능은 얼마나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가! 우리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지 않는 한 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감추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한히 거대한 이 천지를 지탱하신다. 때로는 단순한 그의 고개짓 신호 만으로도 천둥을 일으켜 하늘을 뒤흔들어 놓으시며, 번개로 모든 것을 뒤 흔들고, 불꽃으로 대기 전체를 태우신다. 때로는 여러 가지 폭풍우로 대지를 휘저어 놓으시며 그가 원하실 때에는 순식간에 그것들을 잔잔케 하신다. 그리고 파도가 높게 일어 계속 땅을 파멸할 것같이 보이는 큰 바다를 마치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것을 견제하시며 때로는 심한 폭풍을 일으켜서 그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격동시켰다가는 다시 잔잔하게 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연의 증거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찬양이 성경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지만, 특별히 욥기와 이사야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에 대하여는 고의적으로 생략하려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근거하여 우주 창조를 논할 때 더 적절하게 소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제시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모습의 그 윤곽을 높게 추구하고, 낮게 추구하는 것이라면 교회에 속하는 사람이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나 다같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공통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 능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성을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필연적으로 영원하시며 자존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보존하시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만일 그 유일한 이유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데 충분히 남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선포한대로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자비를 넘치도록 받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시 145 : 9 참조).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사역의 제2의 종류, 곧 자연의 정상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증거는 모든 점에서 똑같이 명백하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사회를 다스리실 때 섭리를 잘 조절하셔서 무수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명백하고 일상적인 지시에 따라 경건한 자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하고 범죄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흉악한 행위에 대하여 형벌로 보복하신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무죄자의 보호자요, 변호자이시며, 선한 사람들을 축복하셔서 그들의 생활이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궁핍함을 도우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며, 그들을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악한 자와 행악자가 일시적으로 벌을 받지 않은 채 날뛰도록 허용하시며 일시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많은 역경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심지어는 불경한 자들의 불법과 악의로 압박까지 받게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그 불변적인 의의 법칙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와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한 가지 죄를 벌하실 때 그의 진노를 명백히 하시는 것은 그가 모든 죄를 미워하신 다는 뜻이요, 그가 많은 죄악을 벌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두는 것은 앞으로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그 형벌을 연기하신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의 긍휼하심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시기 위해 얼마나 풍부한 기회를 주셨던가! 곧 하나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비참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은혜를 나누어주시고, 아버지의 사랑 이상의 것으로 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셔서 그들의 행악을 산산이 부숴 버리지 않으셨는가!
8.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생활을 좌우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선지자는 절망적인 곤경에서 거의 멸망 직전에 빠져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갑자기 기적적으로 또는 예상 밖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는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시 107 : 4-7), 궁핍하고 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9절), 사로잡힌 자들을 음침한 토굴과 쇠사슬에서 놓아주시며(10-16절),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23-30절), 병으로 거의 죽게 된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절), 뜨거운 열기와 건조로 땅을 태우기도 하시며, 은밀한 자비의 단비로 그 땅을 비옥하게도 하신다(33-38절).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혹은 높은 자들을 그 위엄 있는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39-41절) 이러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선지자는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요, 특별히 그의 부성적인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주는 것임을 보여 준다. 여기서부터 경건한 자들은 기쁨의 근거를 얻게 되고 불경자와 유기자(??者)들은 그 입을 다물게 된다(42절). 그러나 사람들은 대다수가 잘못에 빠져들어 그와 같은 눈부신 극장 안에 있으면서도 눈먼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특수한 지혜의 문제요(43절), 그리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가장 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이를 생각하는 데는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날지라도 이를 참으로 보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겨우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는 흑암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억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불경자의 그 흉악함이 순식간에 정복되고, 그들의 오만함이 꺾이고, 그들의 강한 요새가 무너지며, 그들의 무기와 갑옷이 산산 조각나며, 그들의 힘이 무너지고, 그들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이 스스로 거꾸러질 때, 또 하늘 위에까지 높이 오른 그들의 뻔뻔스러움이 땅 한가운데에 내던져질 때 하나님의 권능은 그 자체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시 113 : 7), 눌린 자와 슬퍼하는 자를 궁지에서 구해 내시며, 절망자로 하여금 선한 소망을 다시 찾게 하시며, 소수이며 약한 비무장자가 많고 강한 무장자에게 승리할 때에도 또한 하나님의 권능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실로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을 가장 적합한 때에 맞춰 처리하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혼란하게 하시며(고전 1 : 20 참조), 그리고 "지혜 있는 아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고전 3 : 19, 욥 5 : 13 참조) 하실 때, 그의 탁월성을 나타내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다스리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9.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다 꿰뚫어 보려고 하지 말고 그 하신 일을 보고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설명하며 주장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기 위해 이 이상 더 장황하고 수고로운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위에서 닥치는 대로 말한 것들은 비록 적은 것이긴 하지만 눈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으며, 손으로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어디서나 분명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상고하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것을 주의 해야 한다. 이 지식은 공허한 사색으로 만족하며 단순히 뇌리에서 맴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지각하며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만 한다면 반드시 건전한 것이 되며 풍성한 열매을 맺는 지식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권능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므로, 그 능력을 우리 속에서 느끼며 그 은사를 우리가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을 통하여 한층 더 깊이 감동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인식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공상해서는 안 된다.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완전한 방법이요 가장 적절한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은 주의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기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권능으로 우리 각자 안에 거하시므로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행 17 : 27-28). 이러한 이유로 다윗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고 먼저 고백하고(시 145 : 3), 곧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라고 고백하였다(시 145 : 5-6, 시 40 : 5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특별히 하나님에 관한 탐구에 열중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신력을 감탄케 할뿐만 아니라, 우리를 깊이 감동시킨다는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다. 어거스틴(Augusti e)이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파악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다시 소생해야 하는 것이다.
10.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마땅히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극시킬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의 자비하심과 엄격하심에 대한 표본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의심 없이 이러한 표본이 위대한 사건들의 서곡이며, 따라서 이것의 완전히 드러남은 그 충분한 제시는 미래의 생활에까지 연기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 불경한 자로부터 고통을 당하며 해를 받고, 중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능욕과 비난으로 상처를 받는 것을 본다. 이와는 반대로 악한 자는 번영하며 부요하게 되고, 엄연히 안정을 누리고 조금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내는 것을 본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여기서 즉시 결론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이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서 거기서 불의는 벌을 받게 되고, 의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자들이 자주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게 될 때, 불경자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형벌을 전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매우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유명한 말이다. "만일 공개적으로 형벌이 현재 모든 죄에 대하여 가해진다고 하면, 최후 심판에 남을 것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각 사역에서 특히 그 전체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림에서처럼 실제로 표현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그가 하신 사역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 능력의 주요한 목적, 그 가치, 그리고 이에 대하여 우리가 숙고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생명, 지혜, 능력을 보이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의, 선, 자비를 행사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불신자들이 인류의 통치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그 심원한 계획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윗이 그들의 우매함을 탄식한 바 있지만(시 92 : 5-6),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우리들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하였다(시 40 : 12 참조). 그러나 이 논의는 후에 더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를 생략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경배 드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침내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 11-12)11. 창조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증거가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명백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구조와 질서에 대하여 말한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거나 온 땅을 두루 바라볼 때 마음을 기울여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가 우리 중 과연 몇이나 있는가? 오히려 창조주를 무시하고, 나태하게 앉아서 그의 사역을 바라다보고만 있지 않은가? 사실, 자연의 통상적인 과정 밖에서 매일같이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로 지배를 받는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운명에 의하여 회전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우리 중에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의 안내와 지도에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성에 대한 개념을 경솔히 파악하고, 즉시 자신의 육적인 망상과 광란에 빠져 들어가서 마침내는 공허한 것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서로 동일하지 않은 데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수한 오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괴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위해서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을 버리는 데는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동일하다. 범인이나 둔한자 뿐만 아니라 가장 탁월하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예리한 식별력을 가진 자라도 다같이 이와 같은 질병에 걸려 있다.
이 점에 대하여 모든 철학자가 얼마나 그들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을 여실하게 드러내었던가! 가장 미련한 자처럼 행한다는 철학자들은 그만 두고라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신중했던 플라톤 역시 자신이 생각해 낸 둥근 구체(球?)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사람들에게 길을 비추어 주는 것을 그 임무로 하는 지도적인 인물들도 이렇게 방황하고 비틀거리고 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통치가 너무도 명백하게 섭리를 증거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보고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만사가 생각 없는 운명의 의지에 의하여 뒤죽박죽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공허와 오류에 크게 기울어져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은 가장 탁월한 사람에 대해서이지 하나님의 진리를 모독하는데 그 광기가 지나친 천박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 되었다
온 세상을 채우고 뒤덮은 그 무한히 더러운 오류의 진창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왜냐하면 각자의 마음은 미궁과 같아서 민족마다 여러 가지 허위에 각각 끌려 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뿐만 아니라 거의 각 사람마다 자신의 신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경솔함과 천박함이 무지와 흑암으로 더불어 결합되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위해서 우상과 환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거대하고 풍부한 샘에서 물이 분출되어 나오는 것처럼 무진장한 신들이야말로 인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그들은 각자가 극단적인 방종으로 흘러 하나님에 대해서 이것 저것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여기서 세계를 혼란의 와중에 빠지게 하는 미신의 목록을 구태여 작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끝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의 그 맹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미신에 대하여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패를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나는 여기서 미개하고 교양이 없는 천박한 사람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과 교양으로 하늘나라를 통찰하려고 애쓰는 철학자들이 서로 불일치하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예술과 학문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채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엄밀히 조사해 보면 그것들은 모두가 다 허무한 그림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스토아 학파(Stoics)는 자연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명칭을 끌어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이러한 자신들의 사상이야말로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말은 마치 우리가 각종의 제신에 속아 점점 더 심한 오류에 끌려 들어가는 일만 없으면 공허한 것에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같은 수법이다. 애굽인들의 신비주의적 신학은 아무 이유 없이 헛소리를 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자기들 모두는 용의 주도하게 이에 대하여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처음 볼 때에는 이에 속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치고 종교를 기본적으로 부패하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극히 혼란한 다양성은 에피큐로스(Epicurearts) 학파와 그 외 경건을 경멸하는 자들을 대담하게 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념을 버리도록 하였다. 그들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의견의 불일치와 심지어는 천박하고 어리석은 가르침 때문이라고 보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신을 탐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공허하고 어리석게 스스로를 괴롭힌다고 주저 없이 추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하고도 아무 형벌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신들을 날조하여 끝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불경을 감추기 위해서 인간적인 무지의 연막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무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결코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똑같이 불일치를 일으킬 만한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탐구하는데 그렇게 많은 잘못을 범하는 인간이니 만큼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하여는 한층 더 어리석고 눈이 멀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모니데스 (Simonides)는 폭군 히에로(Hiero)에게서 하나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하여 하루 동안 생각할 수 있는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답변을 칭찬하였다. 다음날 다시 그 폭군이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자 그는 이틀 동안의 여유를 더 허락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여러 번 날수를 배로 연기하고 나서 마침내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희미해집니다." 그가 그렇게 희미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였던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행 17 : 23 참조).
(인간은 오류를 고집하는 한 핑계할 수 없다. 13-15)
13.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종교 행위를 거절하신다
우리는 이제 순수한 종교를 부패하게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자신의 견해에 집착하는 자는 모두가 다 필연적으로 이런 데에 빠지게 된다-한 분이신 유일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자라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정말 그들은 마음에 그러한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며, 그들의 확신하는 바가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먼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마귀를 두는 자는 모두 다 배교자라고 성령께서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고전 10 : 20 참조).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에서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도 없이" 지내던 자였다고 말한다(엡 2 : 12-13). 그리고 이 말은 한 국민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주장한 대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위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롬 1 : 21).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들어가실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전에 이방인들 사이에 신으로 경배받던 것은 어떠한 신도 어리석고 거짓된 신으로 정죄하는 한편,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계속 번창하던 시온산 외에는 어떠한 하나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합 2 : 18,20). 확실히 예수님 당시의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참된 경건에 거의 접근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신 말씀을 듣는다(요 4 : 22).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이 무익하며 잘못된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비록 큰 죄악에 빠져 있지 않고 혹은, 공공연하게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공통적인 이해에 근거한 순수하고 공인된 종교는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광란에 감염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라고 한 바울의 주장은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고전 2 : 8). 그러나 가장 탁월한 자가 오류라는 어둠 속에서 헤매인다고 하면 민중의 찌끼와 같은 존재들에 대하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예배 형식을 성령이 속된 것으로 거절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인간의 방법으로 얻어진 의견은 비록 그것이 항상 막대한 오류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오류의 산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비록 나쁜 결과를 수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행 17 : 23 참조).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하나님에 대해 율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도 모두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였다(요 4 : 22).
그리고 가장 훌륭한 입법자들은 종교가 일반의 여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말하였을 뿐, 그 이상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 크세노폰(Xenophon)에 의하면 소크라테스(Socrates)까지도 사람은 누구나 조상으로부터 받은 의식과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의 관습에 따라 신들에게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명령한 아폴로(Apollo)의 신탁을 예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를 멀리 초월하고 있는 것을 그들 자신의 권위로 정의할 수 있는 이 법칙은 어디서부터 인간에게 왔는가? 혹은 인간적으로 전해진 신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 조상들의 법규나 민중의 제정을 누가 그렇게 감수할 수 있겠는가?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따르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한 도시의 관습이나 전통의 여론에 따르는 것은 경건의 띠로서는 너무도 약하고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시는 일뿐이다.
14.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등불이 우리를 위해 비춰 주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이다. 비록 그 광선이 우리의 온 둘레를 비춰 준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분명히 약간의 섬광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충분한 빛을 방사하기도 전에 사그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사도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바로 그 구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히 11 : 3)라는 말씀을 첨가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곧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세계의 창조에서 명백히 보여졌다고 말한 곳에서도(롬 1 : 19) 바울은 그러한 현현을 인간의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으로서는 변명할 수 없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셨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를 멀리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행 17 : 27),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접근의 결과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를 가르쳤다. 곧 "하 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행 14 : 16-17)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지 않는데도 자기를 알리시기 위하여 각종의 풍부한 인자하심으로 인류를 친절하게 이끄시는데 인간은 자기의 길, 곧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15. 우리의 무능함이 죄이다
그러나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 우둔함의 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로 우리의 양심이 나태와 배은망덕을 항상 깨우쳐 주지 못하더라도 무지를 구실로 내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다음의 변명들, 곧 잘못하는 피조물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해주는 그 진리를 들을 만한 귀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인간이 변명하는 것과, 눈 없는 피조물이 보여 준 것을 자기에게는 눈이 없어서 볼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리고 비이성적인 피조물까지도 교훈을 주는데 정신 박약이라 더 이해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들이 당연히 용납되기라도 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줄지라도 우리가 방황자요 방랑자로서 길을 잃고 헤맨다면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놀라운 구조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씨앗을 즉시 부패케 하여 훌륭하고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사실은 마땅히 그들 자신의 태만에 돌려야 한다. 그러나 한편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찬란하게 보여 주는 그 단순한 증거만으로는 우리가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거짓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신성(神性)을 맛보게 되자 우리는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상을 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의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일 하시는 역사를 그릇되게 판단함으로써 그 역사를 희미하게 하거나 뒤집어 엎거나 하여 그 사역 자체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며 창조주에게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찬양을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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