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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태어나신 배경을 성경(기독교의 경전으로 예수님의 일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도 담고 있다)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은 불합리 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지만 계급이 있고 노예가 있었던 그당시는 더 불합리하게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단 우리나라만 해도 불과 90년전에는 백정(가축을 도살하는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멸시를 당하고 잘한일을 하고도 누명을 쓰는가 하면 양반이라는 이유로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받던 때가 있었다. 자신이 양반이었다면 억울함도 풀 방도가 있었겠지만 천한 상놈이었다면 어디에도 그억울함을 풀어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유난히 홧병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겠는가... 이스라엘민족과 우리나라 민족은 비슷한 면이 많이 있고 역사적인 경험도 비슷하다.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에 의해 삭민지상태에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식민지로있었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상황이 아닌가 생각 /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곧 탄생하실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정감록같은 책들에의하면 정씨도령이 나타나 우리나라를 구한다는 얘기가 비슷해 메시야 사상비슷한 것을 가지고 잇었던지 아니며 정감록같은 책들이 성경의 사상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이러니한 생각이든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경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메시야 사상(그들의 구원자가 나타나실거이라는..)이 예언되어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메시야를 고대했다. 그러한때 예수는 이스라엘땅의 베들레헴에 태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의 탄생은 너무도 초라하고 처참했다. 당시 로마는 지금의 인구총조사 같은 것을 시행하였는데 지금처럼 사는곳에서 가족신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반드시 신고를 해야하고 이를 어겼을 때는 가혹한 형벌이 따랐다 눅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때에 첫번 한 것이라 /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 눅 2:5 그 정혼한 마리아아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은 고향인 베들레헴에 들렀으나 일가 친척이 전혀 그지역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요셉은 묵을려고 여관을 찾았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찾는 여관마다 만원사례를 이루고 잇었다. 묵을 곳을 못찾은 그들은 할수 없이 여관의 마굿간에 들어가 노숙하게 되고 이때 예수꼐서 태어나신 것이다. 태어나신 상황은 처참했을 지라도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태어나신 예수의 탄생을 예견하고 그분의 탄생을 보려고 찾아온 현자들이 있었다. 마 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성경을 그들을 동방에서 온 박사라고 소개하고 있다.그들은 모두 3명이었는데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로 보인다. 그들은 별을보고 예수님의 탄생장소를 찾아왔다. 마 2: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드리니라 |
예수님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성경이 그부분을 매우 짧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누가(그는 의사로서 엘리트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고 역시 엘리트 계급이엇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한 사도 바울의 주치의로 활동)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감(하나님의 직접교통-특별한 목적에 의해 인간에게 임한다)으로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기록하였다. 눅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해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제사(지금의 교회예배)를 드리기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지금도 성지순례라 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때 당시의 예루살렘 방문은 지금보다 훨씬 강제력이 잇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제사(지금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무데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무곳에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고 예배드릴수 있다.- 아무데나 성전을 지을수 없었고 또한 제사는 오직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드릴수가 있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경배하기위해 예루살렘으로 반드시 모였다. 그중에 유월절(이스라엘 민족의 최대 경축일-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지금의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기념)을 당하여 예수님과 그의 부모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엿다. 이때 예수님은 열두 살이었다. 일을 마친후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이 에루살렘에 남겨진 것을 모른채 고향으로 돌아가게된다. 그것은 일행(친족들)이 무수히 맣았기 때문에그 동행중에 잇는줄 알고 하룻길을 간후에 친족과 아는사람중에서 찾다가 예수님이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지금도 추석이나 명절 때 고향에 가기위해 기차역에 가보면 아이를 잃어 버리는 부모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때 당시는 얼마나 경황이 없었을지 짐작이 가진다. 예수님을 찾아헤맨지 사흘만에 예수님을 성전안에서 발견하였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사흘이 지났다면 불안과 공포에 떨며 어찌할바를 모르고 닿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잇다. 눅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 눅 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님은 평안한 마음으로 그곳의 선생들중에 앉아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고 계셨으며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고했다.. 그부모는 그것을 보고 놀랐고 어머니 마리아는 "어찌하여 이렇게 잇었느냐. 우리가 근심하며 너를 찾앗다"라고 물엇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음과같이 대답하셨다.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예수께서는 이미 이시점부터 자신의 하여야 할 사역에 대해 깨닫고 계셨던 듯하다..바로 예수님은 부모를 순종하며 따라 나사렛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부모를 공경하였다. 어쨌던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계셨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자라는 과정을 경험하신 듯하다. 눅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 눅 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왜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성경은 위인전이나 단순히 일대기가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위한 책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것은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그때당시 이스라엘지역에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세례(기독교의 의식으로 하나님을 믿는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와 죄를 씻어낸다는 의미를 내포)를 행하고 있었다. 마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 마 3: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 마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예수님은 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본격적인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사역에 앞서 사탄(또는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시는데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깊은 상징적의미를 준다. 예수님은 왜 사탄에게 굳이 시험을 당하셨는가. 많은 학자들이 예수님은 시험을 회피하고자 했다면 받지 않으셔도 됐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이스라엘의 사막지역)로 이끌려 나가시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셨다. /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채 지내셨다. 지금도 많은 기독인들이 이것을 모방하여 40일 금식기도를 행하고 있는데 찬반양론이 있다. 이때 사탄은 첫 번째 시험으로 예수에게 다가왔다.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탄은 예수께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금의 굶주림을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깊은 상징적의미를 주고 있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굶어죽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냐고 반문하는 것을 보면 굶주림의 문제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것 같다 이것은 또다른 문제와도 연결이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은 기실은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문제이다 성경은 이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성경 요한복음 첫머리에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예수님을 가르킨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이부분은 참으로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이 아닐수 없다.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심으로서 인간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예수의 모범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친히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의 모든면에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셨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인들이 예수를 닮아가자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수 있다. 사타의 첫 번째 시험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눅 4: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이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진다. 인간이 사는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먹기위해 사느냐 , 살기위해 먹느냐라는 질문이 회자된다.먹기위해 사는 것은 짐승과 같다. 짐승은 오로지 먹고 싸고 잠자는 것외에는 아무런 목표라는 것이 있을수 없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보람있게 살다 죽고싶은 것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살기위해 먹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아무런 대답도 해두지 못한다. 사람이 의식주에 매달릴 때 추하고 비참해진다.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리고. 다투고 싸워서 쟁취하는 삶이 되어 버린다. 예수님은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의미를 던짐으로서 그시험을 이기신 것이다. |
이에 사탄은 두 번째 시험을 던진다 눅 4: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 눅 4: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눅 4: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사타은 권세와 영광의 문제로 예수께 접근한다. 요사이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출세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사람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교육중 가장 잘못된점의 하나가 상대 평가제도라고 생각한다 . 상대평가는 오직 소수만이 승리하는 제도이다. 내가 아무리 90점을 맞았더라도 남이 나보다 더많이 맞추었다면 나는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왜 다같이 승리하는 방안을 찾지 못하는가 . 많은 사람들이 모두다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누군가 승리한다면 누군가는 패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가장싫어하는 프로그램으로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은연중에 어린이들에게 세상를 약육강식의 세게로 바라보게 한다. 약자는 강자에게 잡아먹히고 당할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 약자라고 생각한 동물들이 더 많은 먹이를 얻고 더 많은 새끼를 살지게 키우고 번성하며 강자라고 생각한 동물이 더 배고프고 더 고통속에 있으며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나는 모든 것이 절대 평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평가란 60점만 넘으면 모두 합격하는 것이다. 다른사람을 신격쓸 필요도 없고 함께 승리할수도 있고 다른사람을 격려하고 도와주면서 함께 합격할수 있다..기독교가 뿌리를 내리수록 바로 이 절대평가의 나라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60점만 넘는다면 다 똑같은 것이다. 60점이 낸 아이디어나 100점이 낸 아이디어나 다 똑같이 값어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경쟁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말은 일리가 있어보인다. 그러나 누구와 경쟁하는가가 관건이다. 자기자신과 경쟁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경쟁이다 바로 60점이 그 최소한의 경쟁을 보장해 준다. 60점을 따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넘는다면 모두 똑같은 것이다. 그이후는 각자의 창의력과 도움으로 함께 발전하는 것이다. 출세하기 위해, 남을 누르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바로 이 경쟁과 출세의 문제에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눅 4: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일견 이대답은 문제에 대해 전혀 해답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대답도 본질을 찌르고 있다 다같이 승리하고자 해도 세상은 분배의 문제가 남아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희망이 없는 상황 극복할수 없는 문제들이 항상 우리에게 닥쳐온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신을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세상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인간의 함으로 해결할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실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신앙고백의 중요한 답변을 예수님은 하신 것이라고 볼수 있으리라. 이에 사탄은 세 번째 문제로 예수를 시험한다 마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마 4: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사탄이 세 번째로 제시한 문제는 죽음의 문제와 하나님에대한 시험의 문제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걸리는 문제이며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후에는 어떤세계가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며 어떤이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며 죽음은 또다른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사작은 심판으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시험의 문제이다. 지금세상에는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면 그때 믿겠다고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마음을 닫아 버린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답변으로 사탄의 질문에 대답한다 / 눅 4: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 |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먼저 찾아가신 사람들은 소외되고 병든 나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기적의 사역이 시작되엇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으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그리고 예수님은 그중에 12제자를 선택해 세웠다. 12제자중 가장 수제자에 속했던 베드로와의 만남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 제자 베드로는 거친 어부였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초청한다. /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그리고 차례로 12제자가 선택을 받았다. 이들은 후에 예수님의 죽음후 부활을 목격하고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전파하는 선봉에 선다. 12제자와 함께한 예수님의 사역은 위로와 치유라는 두단어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은 그러한 무리를 보고 무한한 슬픔과 아픔을 느끼셨다. 동시에 예수님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여러 가지 신적인 능력등을 나타내셨다.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간 것이라든지 미래에 대해 정화히 알고계셨던점등....그러면서도 동시에 따르는 무리들에 대해 언제나 무한한 연민의 마음을 나타내셨다. 당시는 여자들이 상대적으로 천대받던 시대였다. 한번은 간통을 한 여인이 사람들에게 체포되었다. 예수님의 사역과 그를따르는 무리들로인해 그를 시기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에게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물었다. 이것은 신각한 시험이었다. 당시는 이러한 범죄를 한사람은 길거리에서 돌로 쳐죽이는 것이 일반적인 형벌이었다. 로마는 식민지에 매우 관대한 정책을 폈는데 그것은 그민족의 어떤이의 범죄가 로마와 관계가 없다면 그들의 법으로 처리하도록 간섭하지 않았다. 사랑을 전파하던 예수님이 법대로 그여인을 돌로 쳐죽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용서하라고 한다면 범죄를 용서하라함으로 공의에 배치되는 행위였다. 이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죄없는자는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 전제이다. 우리는 흔히 법없이도 살사람이라는 말과 죄 한번 짓지 않고 착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성경은 이세상에 죄 짓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있다. /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땅에 오신 이유를 그러한 죄인을 구원하시기위해서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지은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기는 매우 힘든일이며 처벌하지 않는다면 악인이 활개를 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용서받는 길을 제시하러 오신 것이지 악인을 감싸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은 자기죄에 따라 분명히 심판을 받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주님은 용서받을수 없는 죄인에게 용서받을수 있는 길을 선포하러 오셨고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님은 3년동안 이스라엘을 누비며 약하고 병들고 천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렇다고 부자들을 주님이 멀리하신 것은 아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화하시고 치유하셨다. |
예수님은 또한 교회예배당의 변질됨에 대홰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성전(지금의 교회예배당)은 제사의 특성상(당시 예배는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였다) 제물로 삼을 양이나 비둘기같은 동물을 가지고 와야 했다. 그러나 상당히 교통수단이 불편하고 내왕이 힘들었던 당시는 동물까지 데리고 여행을 하기가 번거로웠다. 그래서 성전근처에서 동물을 돈으로 사서 해결하곤 햇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런한 것을 장사의 수단으로 삼아 상당한 폭리를 취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제물의 가격을 문제 삼을수 없었던 점을 더욱 악용하여 예배를 드리러온 여행자들에게 큰 부담이 아닐수 없었다. 예수님은 성전안에 까지 들어와 그러한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셨다. 당시의 상황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 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예수님은 이유없는 미움을 이스라엘 미족에게 당하셨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예언되어잇었다. 그것은 장차 메시야가 오셨을 때 어떻게 되실 것을 무려천년전에 이미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것이다. 그중 이사야라는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 지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당시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데려가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빌라도는 폭동이 무서워 예수를 사형에 처한다 사형.은 로마의 법에 따라 가장 중죄인에게 내려졌던 십자가형에 처했다. 십자가 형은 서서히 죄인을 죽이는 가장 혹독한 형벌로 죄인은 고통을 느끼며 수시간에 걸쳐 죽음을 당하게 된다 만약 이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예수는 단순한 현자중의 한명으로 역사속에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3일뒤에 벌어졌는데 그것은 주님의 시신을 보기위해 찾아간 여인들에 의해서 전하여 졌다. 그가 다시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귀신이나 유령이 아님을 확실히 하셨다. 성경은 처음에 제자들도 그것을 믿지 못했다고 자세히 적고 있다 마 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막 16: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왜 성경은 제자들이 의심했다는 것까지 적고 있을까 그것은 성경이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기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작접 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후에 예수에 제자가된 사도바울도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전 15: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 고전 15:6 그 후에 오 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는 자신의 편지에서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고 있는데 약 6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하였음을 적고 있다. 바로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그후 예수님은 약 40일뒤 하늘로 승천하신다.그리고 다음괴 같은 말이 성경에 남겨졌다.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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