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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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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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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로 쓰는 최완택목사의 민들레교회 이야기 제 624호 중에서
北山편지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형제 여러분.
우리는 시방 부활절 다섯째 주일을 입하(立夏) 절기와 함께 맞이합니다. 우리는 시방 207년 여름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록(新綠)의 계절 5월을 살고 있습니다.
5월은 입하(立夏) - 소만(小滿) 절기에 해당합니다. 입하는 말 그대로 여름에 들어섰다는 절기이지만 아직 봄과 여름이 공존하는 때입니다. 소만(小滿)은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작은 가득참’입니다. ‘작은 가득참’이란 형용모순의 이름인 소만은 ‘5월의 신록(新綠)을 두고 생긴 말이겠습니다.
5월의 신록을 좀 보십시오. 잎이 다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요즘은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인하여 2-30년전 보다 절기 현상이 일찍 나타나고 있죠?) 그러나 5월 신록의 숲은 한여름에 잎이 충분히 나와서 나무와 숲을 꽉 채운 색깔보다 더 진하고, 더 생명력 있고, 더 신선하고, 더 감동적입니다. 실상 공간의 대부분은 비어 있지만 그 공간이 창조와 은총의 빛으로 꽉 차 있습니다. 사람들이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을 아십니까? 나는 확신하는 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우리 하느님께서 신록 가운데 ‘텅 빈 충만’으로 현현하시는 은총 덕분이라고 봅니다.
신록의 계절 5월에 우리는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그리고 승천 주일, 성령강림절을 지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공동번역, 마르코 복음서 10장 13-16절)
어른들이 시방 굉장히 중요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들이란 참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귀찮게 구는 겁니까? “아이들 데리고 저리 비키세요.” “아이들은 가라!” 제자들의 이런 처신은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오히려 화를 내셨습니다. 당신을 배반한 제자들에게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에게도 내지 않은 화를 당신을 찾아와 귀찮게 구는 아이들을 쫓아내려는 제자들에게 내셨던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화를 내신 예수 스승이 참 좋습니다. 무조건 좋습니다. 이 예수 스승을 새삼스럽게 좋아하면서 ‘어린이와 같은 사람’,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이 그의 ‘예언자’에서 ‘어린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자 아이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어린이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알마스타파는 말했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의 아니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저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 뿐 너희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는 하나 너희의 소유는 아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은 저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너희의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너희가 아이들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너희같이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너희는 활이요, 그 활에서 너희의 아이들은 살아있는 화살처럼 날아간다.
그래서 활써시는 이가 무한(無限)의 길에 놓인 과녁을 겨누고, 그 화살이 빠르고 멀리 나가도록 온 힘을 다하여 너희를 당겨 구부리시는 것이다.
너희는 활쏘시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분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이 또 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시기에.
칼린 지브란이 노래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다.” 이 대목이 참 좋습니다. 아이들의 생명은 영원에서부터 와서 영원으로 갑니다. 산과 숲과 들판을 통하여 흐르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들이니’ 그들은 태초(太初)로부터 왔습니다.
칼릴 자브란의 어린이에 대한 통찰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어린이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도전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혜안과 통찰입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어 우리의 아이들을 이렇게 대하고 길러가면 우리의 자녀들은 반드시 위대한 영혼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어른된 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공동번역, 마태오복음 18장 2-4절)
열쇠말은 ‘생각을 바꾸어’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돌이켜’로, 가톨릭번역에서는 ‘회개하여’, 새번역에서는 ‘돌이켜서’로 번역했습니다. 식성대로 실천하십시오.
세상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돌이켜 생각을 바꾸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기 곧 하면 문이 활짝 열립니다.
저 옛날 하느님의 말씀이 예례미아에게 내렸습니다.
“내가 너를 한 처음부터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웠다!”
그러자 예례미아가 즉시 아룁니다.
“아! 하느님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아아, 나는 이 대답이 참 좋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일’은 시방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루어 집니다. 거꾸로 말한다면 그대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 까닭은 그대가 시방 하느님 앞에서 있다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영원한 아이다.”
이 깨달음으로 하느님의 소명(召命)을 새롭게 받들게 될 때 자기 자신과 세상과 역사가 새로 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 앞에서)영원한 아이입니다!” (민)
北山편지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형제 여러분.
우리는 시방 부활절 다섯째 주일을 입하(立夏) 절기와 함께 맞이합니다. 우리는 시방 207년 여름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록(新綠)의 계절 5월을 살고 있습니다.
5월은 입하(立夏) - 소만(小滿) 절기에 해당합니다. 입하는 말 그대로 여름에 들어섰다는 절기이지만 아직 봄과 여름이 공존하는 때입니다. 소만(小滿)은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작은 가득참’입니다. ‘작은 가득참’이란 형용모순의 이름인 소만은 ‘5월의 신록(新綠)을 두고 생긴 말이겠습니다.
5월의 신록을 좀 보십시오. 잎이 다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요즘은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인하여 2-30년전 보다 절기 현상이 일찍 나타나고 있죠?) 그러나 5월 신록의 숲은 한여름에 잎이 충분히 나와서 나무와 숲을 꽉 채운 색깔보다 더 진하고, 더 생명력 있고, 더 신선하고, 더 감동적입니다. 실상 공간의 대부분은 비어 있지만 그 공간이 창조와 은총의 빛으로 꽉 차 있습니다. 사람들이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을 아십니까? 나는 확신하는 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우리 하느님께서 신록 가운데 ‘텅 빈 충만’으로 현현하시는 은총 덕분이라고 봅니다.
신록의 계절 5월에 우리는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그리고 승천 주일, 성령강림절을 지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공동번역, 마르코 복음서 10장 13-16절)
어른들이 시방 굉장히 중요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들이란 참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귀찮게 구는 겁니까? “아이들 데리고 저리 비키세요.” “아이들은 가라!” 제자들의 이런 처신은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오히려 화를 내셨습니다. 당신을 배반한 제자들에게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에게도 내지 않은 화를 당신을 찾아와 귀찮게 구는 아이들을 쫓아내려는 제자들에게 내셨던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화를 내신 예수 스승이 참 좋습니다. 무조건 좋습니다. 이 예수 스승을 새삼스럽게 좋아하면서 ‘어린이와 같은 사람’,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이 그의 ‘예언자’에서 ‘어린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자 아이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에게 어린이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알마스타파는 말했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의 아니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저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 뿐 너희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는 하나 너희의 소유는 아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은 저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너희의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너희가 아이들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너희같이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너희는 활이요, 그 활에서 너희의 아이들은 살아있는 화살처럼 날아간다.
그래서 활써시는 이가 무한(無限)의 길에 놓인 과녁을 겨누고, 그 화살이 빠르고 멀리 나가도록 온 힘을 다하여 너희를 당겨 구부리시는 것이다.
너희는 활쏘시는 이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분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이 또 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시기에.
칼린 지브란이 노래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다.” 이 대목이 참 좋습니다. 아이들의 생명은 영원에서부터 와서 영원으로 갑니다. 산과 숲과 들판을 통하여 흐르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들이니’ 그들은 태초(太初)로부터 왔습니다.
칼릴 자브란의 어린이에 대한 통찰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어린이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도전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혜안과 통찰입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어 우리의 아이들을 이렇게 대하고 길러가면 우리의 자녀들은 반드시 위대한 영혼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어른된 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공동번역, 마태오복음 18장 2-4절)
열쇠말은 ‘생각을 바꾸어’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돌이켜’로, 가톨릭번역에서는 ‘회개하여’, 새번역에서는 ‘돌이켜서’로 번역했습니다. 식성대로 실천하십시오.
세상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돌이켜 생각을 바꾸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기 곧 하면 문이 활짝 열립니다.
저 옛날 하느님의 말씀이 예례미아에게 내렸습니다.
“내가 너를 한 처음부터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웠다!”
그러자 예례미아가 즉시 아룁니다.
“아! 하느님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아아, 나는 이 대답이 참 좋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일’은 시방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루어 집니다. 거꾸로 말한다면 그대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 까닭은 그대가 시방 하느님 앞에서 있다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영원한 아이다.”
이 깨달음으로 하느님의 소명(召命)을 새롭게 받들게 될 때 자기 자신과 세상과 역사가 새로 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 앞에서)영원한 아이입니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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