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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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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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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로 쓰는 최완택목사의 민들레교회 이야기 제 633호 중에서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형제 여러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안녕하시지요?
민들레이야기를 한번 쉬었더니 어느새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霜降)에 들게 되었습니다.
상강은 말 그대로 ‘서리(霜)를 내리는(降)) 절기’입니다. 상강에 내리는 서리는 겨울의 전령입니다. 백로(白露)에 ‘흰 이슬’로 내리셔서 가을을 아름답게 하신 하느님이 한로(寒露)에는 ‘찬 이슬’로 내리셔서 온갖, 열매를 영글게 하시고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상강(霜降)에 ‘서리의 은총’으로 내리시면서 ‘이제 가을은 끝이다. 서둘러 겨울을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강의 하늘은 대개 상쾌하도록 맑습니다. 일년 가운데 상강의 하늘은 ‘쾌청’(快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정도로 상쾌하도록 맑고 공기 역시 쾌적(快適)합니다.
상강의 가을은 자유(自由)를 배우는 계절입니다. 절기가 상강에 이르러 풀과 나무들이 서리를 맞으면 봄, 여름, 가을 내내 입었던 옷들을 벗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벌거숭이로 거듭나게 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옷을 다 벗은 나무들은 벌거벗고 나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영글게 해야 한다는, 소위 성장을 위한 수고로부터 풀려나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나무들은 그림자조차 투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참 자유는 숨기는 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벌거숭이로 거듭나 숨기는 게 없게 되면 거기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춥고 배고픈 듯 하지만, 도무지 거칠 것이 없는 삶!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상강에 이르러 나무로부터 배우는 자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벌거벗고 가진 것 없는 나무들로 하여금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품고 서리・눈 내리고 얼음 얼고 찬바람만 매섭게 부는 언덕에 서서 겨울을 살게 하십니다.
참 짓궂은 하느님! 그러나 나무들은 상강 이후부터는 겨우내 ‘하느님이라는 옷’을 입고 자유혼을 사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
위의 글은 제가 1996년 상강 절기에 북산편지에서 ‘자유의 몸으로 살아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옮긴 것인데, 해마다 상강에 다시 읽으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상강의 때는 인생의 때로 본다면 대개 노년(老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는 건 순서가 있겠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건 순서가 없다고 하니까 시방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이 상강의 절기에 누구나 다 엄숙하게 자기 인생을 살필 필요가 있겠습니다.
시방 그대는 자유롭습니까?
시방 그대는 그리스도가 주신 진리 안에서 자유롭습니까?
시방 그대는 자유혼(自由魂)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남에게 결코 구속을 받거나 얽매이지 아니하고 제대로 말하고 행동합니까?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일찍이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유인’(自由人)으로 선고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혼(自由魂)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나는 참 오랫동안 이런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 자유혼을 가진 자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자신이 자유혼의 사람이라는 이 인식이야 말로, 이 인식을 기억하고 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은 자유인이라고 믿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 31-32절)
아아, 나는 참 오랫동안 예수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고 살지만 하면 저절로 자유혼을 지닌 자유인이라고 믿고 살아온 못난이였습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기까지 나는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고, 너무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집안 식구들에게, 교우들에게, 심지어 민들레교회 이야기 식구들에게까지 ‘너무 외롭다’느니, ‘너무 마음이 무겁다’느니 하면서 투정을 심하게 부렸습니다. 돌이켜보니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40여일만에 길을 찾았습니다. 길은 늘 거기 있었지만, 사람들이 오랫동안 잘 다니질 않아서 흐릿했습니다. 그 길은 사도 베드로가 말씀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신”(베드로전서 2장 21절) 길입니다.
예수의 생애와 말씀, 특히 십자가의 길이 다 그 길이 됩니다만, 이번에 제게 감동을 준 대목은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공동번역)
공동번역에서 “극진(極盡)히 사랑해 주셨다”고 한 대목을 다른 번역에서는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다”(개역, 새번역, 가톨릭번역)로 번역되면서 ‘끝까지’를 강조하는 듯 합니다. 나는 한자이긴 하지만 ‘극진’이 더 좋은 표현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극진(極盡)이란 말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애를 쓰는 것이 매우 지극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셔서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의 몸이 된 자유혼”(갈라디아 5장 1절)은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발을 씻어 주신 세족례(洗足禮)를 사랑으로 실천할 때 자유의 하늘을 향해 드높이 날아 오르게 됩니다.
우리는 시방 상강의 절기로 갑니다. 상강(霜降)절기는 자유를 배우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사랑과 만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배우는 상강 절기는 동시에 사랑을 실천하는 절기입니다.
아아, 우리 주님 예수처럼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갈 때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욱 극진히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부터 사람이나 사물 또는 사건을 건성으로 대하지 말고 통찰력(洞察力)을 키워서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극진히 사랑하면서 삽시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먼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에베소 5장 1-2절) (민)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형제 여러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안녕하시지요?
민들레이야기를 한번 쉬었더니 어느새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霜降)에 들게 되었습니다.
상강은 말 그대로 ‘서리(霜)를 내리는(降)) 절기’입니다. 상강에 내리는 서리는 겨울의 전령입니다. 백로(白露)에 ‘흰 이슬’로 내리셔서 가을을 아름답게 하신 하느님이 한로(寒露)에는 ‘찬 이슬’로 내리셔서 온갖, 열매를 영글게 하시고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상강(霜降)에 ‘서리의 은총’으로 내리시면서 ‘이제 가을은 끝이다. 서둘러 겨울을 준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강의 하늘은 대개 상쾌하도록 맑습니다. 일년 가운데 상강의 하늘은 ‘쾌청’(快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정도로 상쾌하도록 맑고 공기 역시 쾌적(快適)합니다.
상강의 가을은 자유(自由)를 배우는 계절입니다. 절기가 상강에 이르러 풀과 나무들이 서리를 맞으면 봄, 여름, 가을 내내 입었던 옷들을 벗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벌거숭이로 거듭나게 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옷을 다 벗은 나무들은 벌거벗고 나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영글게 해야 한다는, 소위 성장을 위한 수고로부터 풀려나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나무들은 그림자조차 투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참 자유는 숨기는 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벌거숭이로 거듭나 숨기는 게 없게 되면 거기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춥고 배고픈 듯 하지만, 도무지 거칠 것이 없는 삶!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상강에 이르러 나무로부터 배우는 자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벌거벗고 가진 것 없는 나무들로 하여금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품고 서리・눈 내리고 얼음 얼고 찬바람만 매섭게 부는 언덕에 서서 겨울을 살게 하십니다.
참 짓궂은 하느님! 그러나 나무들은 상강 이후부터는 겨우내 ‘하느님이라는 옷’을 입고 자유혼을 사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
위의 글은 제가 1996년 상강 절기에 북산편지에서 ‘자유의 몸으로 살아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옮긴 것인데, 해마다 상강에 다시 읽으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상강의 때는 인생의 때로 본다면 대개 노년(老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는 건 순서가 있겠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건 순서가 없다고 하니까 시방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이 상강의 절기에 누구나 다 엄숙하게 자기 인생을 살필 필요가 있겠습니다.
시방 그대는 자유롭습니까?
시방 그대는 그리스도가 주신 진리 안에서 자유롭습니까?
시방 그대는 자유혼(自由魂)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남에게 결코 구속을 받거나 얽매이지 아니하고 제대로 말하고 행동합니까?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일찍이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유인’(自由人)으로 선고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혼(自由魂)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나는 참 오랫동안 이런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 자유혼을 가진 자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자신이 자유혼의 사람이라는 이 인식이야 말로, 이 인식을 기억하고 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은 자유인이라고 믿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 31-32절)
아아, 나는 참 오랫동안 예수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고 살지만 하면 저절로 자유혼을 지닌 자유인이라고 믿고 살아온 못난이였습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기까지 나는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고, 너무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집안 식구들에게, 교우들에게, 심지어 민들레교회 이야기 식구들에게까지 ‘너무 외롭다’느니, ‘너무 마음이 무겁다’느니 하면서 투정을 심하게 부렸습니다. 돌이켜보니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40여일만에 길을 찾았습니다. 길은 늘 거기 있었지만, 사람들이 오랫동안 잘 다니질 않아서 흐릿했습니다. 그 길은 사도 베드로가 말씀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신”(베드로전서 2장 21절) 길입니다.
예수의 생애와 말씀, 특히 십자가의 길이 다 그 길이 됩니다만, 이번에 제게 감동을 준 대목은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공동번역)
공동번역에서 “극진(極盡)히 사랑해 주셨다”고 한 대목을 다른 번역에서는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다”(개역, 새번역, 가톨릭번역)로 번역되면서 ‘끝까지’를 강조하는 듯 합니다. 나는 한자이긴 하지만 ‘극진’이 더 좋은 표현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극진(極盡)이란 말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애를 쓰는 것이 매우 지극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셔서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의 몸이 된 자유혼”(갈라디아 5장 1절)은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발을 씻어 주신 세족례(洗足禮)를 사랑으로 실천할 때 자유의 하늘을 향해 드높이 날아 오르게 됩니다.
우리는 시방 상강의 절기로 갑니다. 상강(霜降)절기는 자유를 배우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사랑과 만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배우는 상강 절기는 동시에 사랑을 실천하는 절기입니다.
아아, 우리 주님 예수처럼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갈 때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욱 극진히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부터 사람이나 사물 또는 사건을 건성으로 대하지 말고 통찰력(洞察力)을 키워서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극진히 사랑하면서 삽시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먼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에베소 5장 1-2절)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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