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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6:3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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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39절-42절.
39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그 말씀이 맞습니까? 일반적으로 맞고 영적으로 보면 영원한 소경은 영원히 인도를 못한다. 그렇게 들어가겠지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없다. 왜? 둘 다 구덩이에 빠져버린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분명히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데 거짓된 인도자들은 둘 다 구덩이에 안 빠진다고 교회를 인도한다고 하는 꼬락서니지요. 맞잖아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영적 소경의 의미를 모르고 교회를 양적 부피로 종교적 사업적으로 크게 벌린 것은 소경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는 셈이다. 맞지요?
영적인 면에 소경인 두 사람이 의논하기를 ‘우리 절대로 구덩이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생명 길 좁은 길로 가자’ 그렇게 말하면 그 길로 가게 되는 겁니까? 말을 그렇게 하면 그 길로 가게 되는 것이냐 그 말이요. 소경 둘이서 믿음으로 사명감으로 한다고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급 면류관을 받게 됩니까? 소경이 둘뿐만 아니고 열 명이 모여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면류관을 주시겠지요? 소경된 인도자가 교인이 많으면 신바람이 나서 생명 길로 잘 인도하겠습니까?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소경된 부모가 자기 아이를 잘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부모가 아이에게 ‘책 펴라. 내가 가르쳐주마’ 하면서 가르치면 잘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그 말이요.
소경된 자가 무엇을 자기 스스로 활동을 할 수 있겠느냐? 무엇을 자기 스스로 활동을 할 수 있겠느냐? 소경 둘이서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어디서 출발했지?’ 하고 묻는다면 눈 뜬 자가 아는 것처럼 ‘어느 지역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가 있을까? ‘목적지는 어떻게 가지?’ 그 생각을 하면 알 수 있을까요? 소경이 방향감각에서 동서남북 중에서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까요? 자기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가고 있는지, 해 지는 쪽을 향하여 가고 있는지 알고 있겠느냐? 소경이 사람을 분별하고 알겠느냐? 외모모양이나 피부색깔이나 눈코의 형태를 알 수 없듯이. 알 수 없지요?
영적 소경이 사람의 심령상태 영적 상태 신앙의 질적인 면에서 영에 속한 건지 육에 속한 건지 알 수 있겠느냐? 소경이 길을 가는데 평지로 가는지 산으로 가는지 웅덩이 쪽으로 가고 있는지 절벽 쪽으로 가고 있는지 얼음 비탈길로 가고 있는지 건너뛰어야 하는 건지 비켜가야 할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서 자기 머리 위로 소나기가 몰려오는지 안 오는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영의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앙사상을 모르고 어떻게 사람을 온전한 길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소경이 한 사람을 가르치면 구덩이에 빠지고 소경이 천 명을 가르치면 999명은 안 빠지고 한 명만 빠지겠지요? 그럴까요? 천 명을 가르치면 신이 나서 생명 길 좁은 길로 잘 인도하겠지요? 사람을 인도하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즉,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아야 할 것이고, 사람 중에 기준 아닙니까? 자기의 타락적 기존적 이 성격 성질도 기존적 성격 성질 타락적인 기존적인 성격 성질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나쁜 고집이니 진리의 사람으로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좋게 보이더라도 쉬운 예를 들자면 공자나 석가나 일반사람들이 볼 때는 최고로 높이지요. 하나님 앞에 그것을 가지고 ‘의다 선이다 자비롭다’ 고집을 하게 되면 그건 하나님 앞에 나쁜 고집이다. 맞잖아요?
40절: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선생이 높습니까, 제자가 높습니까? 선생이 높습니다. 높으니까 제자들을 가르치고, 제자들은 배울 게 있으니까 선생을 삼고 따르지요. 일반적으로 먼저 태어나면 먼저 배우지요. 먼저 배우고 아는 것이 이게 선생입니다. 그렇지요? 또 나이가 아무리 작아도 전문적으로 남보다 먼저 알고 있으면 그 면에 대해서 선생이 되더라. 맞지요? 혹시 알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않고 모르고 깨닫지도 못했는데 선생 된 자가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있다고 한다면 이는 거짓 선생이요. 예, 교회로 말하자면 이건 또 거짓 종이다.
배우는 자가 제자이고 가르치면 선생이고, 배우지 않겠다고 하면 이는 제자가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땅의 복음, 세상복음이 아닌 천국복음 하늘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배우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지요. 안 그래요? 사명자라고 하면서 세상 것을 자랑하고 가르친다면 이는 거짓된 사단 마귀의 종이지 주님이 보낸 참 종은 아니더라 그 말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것이 아닌 것으로 교회부흥을 부르짖는 종이라면 아무리 부흥이 되었더라도 이는 불타질 것으로 꽈리처럼 소다를 넣은 것처럼 부풀어 오른 겁니다. 일 크게 잘했다고 하는 상이 아니라 심판받아 멸망을 받을 상이 되는 거지요. 맞지요?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천국복음을 전하시면서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신 것은 모든 면에서, 인격 면에서 성품 면에서 속성 면에서 기능과 지능 면에서 예수 당신처럼 성품이 온전케 되는 것을 가르치고 가셨습니다. 일반세상 선생은 세상살이 잘하는 학문이나 기술 활동 등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보면 많은 사고들이 일어나지요? 주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의 삶의 목적인 구원 즉 원인 동기 목적이 뚜렷합니다. 너를 인간으로 만든 목적이 뚜렷하다. 그럼 예수 믿는 자기도 예수를 바로 믿고 바른 가르침을 받았다면 세상 사는 목적이 뚜렷해야 될 거다. 그건 구원이다. 구원이 뭐냐? 하나님의 속 성품으로 닮는 것.
온 우주 세상만물은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고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고 돌아가고 있다. 그 움직이고 돌아가고 있는 모든 과학적 법칙이나 물질적 이치나 전부는 인간 너를 영특하게 만드는 그런 면으로 다 돌아가고 있다. 미련한 것은 자기 미련으로 자기가 어리석어서 죽더라. 세상 속화된 거짓 인도자들 선생은 말하자면 인간을 만드신 이 삶의 목적이 없습니다. 그것만큼은 알아둬라. 원인 동기 목적이 뚜렷하지 못하고 희미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수 년 수 십 년을 믿어왔어도 성격 성질 하나 바로 고치지 못하고 말씀도 깨달음도 하나도 없고 나이 먹은 거만 자랑하고 어른이란답시고 밥 먹고 일하고 살아온 그것밖에 더 있냐? 사람이면서 사람 되게 만든 것은 있느냐? 자기도 못 만들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연관을 짓지 못하고. 그럼 뭐요? 돈 벌어서 먹고 마시고 입고 똥 싸고 오줌 싸고 큰집 지니고 산 것밖에 더 있느냐? 이게 사람 가치요? 누가복음 18장인가? 그런 부자를 알아줬습니까? 알아줬느냐고요? 알아주지 못한 그 부자를 여전히 돋보고 부러워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하지. 그럼 성경을 찢어내 버려야지. 안 그래요? 맞잖아요?
불속에 들어가 있는 부자와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는 거지 둘 중에 선택을 하란다면 어느 쪽을 선택합니까? 자기가? 왜 자신들을 속여요? 자신들을 속이면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여 주여’ 할 수 있을까요? 살아도 은혜를 못 받는다. 교회를 다녀도 은혜를 못 받아. 바로 믿는다면 가치판단이 바로 들어간다. 가치판단도 바로 못 들어가고 ‘주여’ 하면 믿음이 들어갑니까? 내일 모레 넘어질 값에 오늘 바로 들어가는 말씀의 지식이 자기에게 바로 심겨져야지요.
들으면서 ‘아이고, 그럼 사람이 어떻게 살지?’ 그래, 잘 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럼 너는 그렇게 안 하고 살았어? 그럼 너는 얼마나 잘 사냐? 비교 안 돼요? 잘 사는 사람이 온 세상 걱정 근심을 다 가지고 있고, 좀 못 살더라도 온 걱정 세상 근심을 다 내버리고. 어느 쪽이 훨씬 나아요? 지식을 갖더라도 사람이 바로 되는 쪽으로 지식을 가져야지, 판단을 그렇게 내려야지 ‘어떻게 그렇게 삶을 살 수 있냐?’ 그래, 너는 그렇게 잘 사냐?
일반 세상선생은 세상살이 잘하는 학문이나 기술 활동 등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온전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참 사람 되는 건 없다 그 말이요. 맞아요, 틀려요? 세상 속화된 거짓 인도자들은 그런 가르침이 없다. 죽으라고 배워도 그런 가르침은 없다. 교회 안에서 주님이 세우지 않은 거짓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 주님이 세우지 않은 거짓 종이란 뭘 말하는 거요? 그것도 바로 알아야 돼요. 주님이 세우지 않은 거짓 종은, 주님이 세우지 않았다 하는 것은 신학교도 안 나오고 목사안수도 안 받았다 그 말인지? 아무리 신학 나오고 어디 미국 물을 먹었어도 외국물을 먹었어도 가르치는 말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면 그건 주님이 세우지 않았다. 예, 설령 신학교를 안 나왔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르치면서, 그 열두 신학교지요. 열두 제자 신학교지요. 붙인다면? 그러나 당시의 바리새교인들이 볼 때에 그게 신학교입니까? 이단자들이지요. 그 중에 가룟유다가 나왔으니 얼마나 이게 또 그들의 미끼가 되는 놀림감이 되겠어.
바리새교인들이 볼 때에 무슨 예수님 따라다니는 제자들 신학이라고 봅니까? 안 보지요?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내어보내신 그 제자들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교훈을 깨닫고 따라가는 겁니까? 그럼 다 이단자들이지. 안 그래요? 잘 생각을 해요. 이치적으로 좀 따져요. 좀 따져. 자기 기존적 지식가지고 감정적으로 생각을 하지 말고. 분별해서 속지 말고 거짓된 곳으로 따라가지 말아야 되겠지요.
이 마지막 시대에 오늘날 사명 받은 주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그 일을 하지 않는 자칭 주의 종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서도 자칭 예수쟁이가 많아요. 자칭. 그 성격 성질상 신앙의 정신을 보면 자칭이구나. 왜? 예수님 앞에 신용등급제로 말하자면 아주 저 밑에 있는데, 딴 데 가서 ‘당신 교회 다닙니까?’ ‘예수 믿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다 장로고 목사고 그런데요’ 그렇게 말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 앞에는 자칭이요. 실속적으로 껍데기요. 껍데기. 이 목사자식들 집사자식들 조심해요.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부분적으로 한 가지만이라도 본질적으로 선생과 같은 것이면 즉, 예를 들자면 백점이 아니더라도 하나가 정확하게 맞았으면 그건 맞는 답이다. 맞잖아요? 전체적으로 같아진다면 그 사람은 선생의 위치로 올라가는 거지요. 말하자면 가르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요. 수 년 수 십 년을 믿어도 모르면 못 가르치는 거고. 하늘나라 천국복음은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가르치면 가르침을 받겠느냐? 못 받아요. 왜 그러냐? 소원 목적부터 갈아치워야 됩니다. 소원 목적부터 갈아치우려면 지식부터 이게 바로 들어가야 돼. 이제. 그렇지 않고서는 이게 믿음 안 들어가. 소귀에 경 읽기다. 그거. 천국복음을 알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만이 가르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가르침을 받아 또 계속 바통을 받아 가르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교회에서 졸업하는 사람들은 다 가르칠 수가 있어야 돼. 바보멍청이가 있으면 안 돼. 할머니 할아버지더라도 안 믿는 사람 있으면 ‘사람 사는 건 이런 거다. 사람은 이런 거다’ 하고 가르칠 수가 있어야 된다. 믿는 아버지라면 자식에게 ‘사람은 이렇게 사는 거다’ 이렇게 말할 때에 자식이 하는 말이 ‘아이고, 아버지나 잘 하시오’ 그러면 그 집안 똥 되는 거다. 그러니까 평소에 좀 잘 믿어. 모든 언행심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적중성으로 들어가야지 예수 믿는 게 어떻게 자기 감정이야? 나오기 싫으면 안 나와도 되고? 성경 안 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문자적으로도 안 보는 사람이다. 보는 사람의 태도는 그렇지 않아.
학교는 가야 돼요, 말아야 돼요? 돈은 냈는데? 가야 돼요, 말아야 돼요? 죽어도 가야 돼요? 그럼 교회는? 돈을 안 냈으니까 안 가도 되고 가도 되고 그런 거지요? 참 잘 한다. 그 사상과 정신이 자기 일생을 지배하는 거요. 하나님이 모르실까요? ‘네가 그 정도밖에 안 되냐?’ 하나님께서 그 정도밖에 안 되게 자기에게 모든 것을 만들어 놓는 거요. 만물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자기 말 안 들어. 인간 자기 말 듣는 게 아니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순종하고 바로 만들어져 갈 때에 만물이 그 사람의 차원대로 대우를 하는 거요. 이게 하나님의 명령이요.
사람이 씨를 심되 백 배의 열매도 안 열리고, 사람이 씨를 심되 먹을 수 없는 씨를 심을 수는 없지요? 그렇잖아요? 돈이 되는 씨는 심겠지. 점점 하늘의 것으로 확장되고 성장될 수 있는 씨를 심는 것이 주님께서 주신 천국복음이라. 겨자씨 한 알만한 씨. 생명이 강하단 말이요. 확장될 수 있는 생명의 요소가 그 지극히 적은 거 속에 있어. 그 씨가 얼마나 작은가 하니 그 채송화 씨처럼 그렇게 적어요. 그 나무가 커서 새들이 깃들이는 건데 그 씨가 그렇게 적어.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보기에 적게 보이지요? 바른 것이고 옳게 심어졌다면 그 사람은 자기 성장이 되고 확대가 되는 거다. 예수 믿어도 그렇게 예수를 믿어야지 자기 쪼그랑망탱이 되는 예수를 믿어요? 자기 쪼그랑망탱이 되는 말씀을 들어요?
어떤 교회 교인은 축복 안수 안 해준다고 교회를 안 나오는 그런 권사도 있고 집사도 있데요. 참말로. 지금 살아있어. 그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안 되어있고 저주받을 사람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렇게 돼있는데 복을 빌어주면, 그 사람은 물질적 복이지요? 부자도 엄청난 부자요. 땅이 엄청나게 많고 아마 재산이 몇 백억이 되는지 모르겠어. 근데 축복기도 안 해준다고 안 나온 데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을까?
41절-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맞지요? 틀린 말이 있어요? 백 번 읽어도 백 번 맞고 한 번 읽어도 한 번 맞고. 맞아요. 일반적으로 사람의 눈 속에 티가 들어가면 눈이 아프고 눈물 나고 전 신경이 눈으로 가서 멈춰 섭니다. 눈으로 가서 멈춰있어. 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맞지요? 이 눈 쪽 입 쪽이 아프면 이게 온 머리가 들썩거리지요? 귀가 아파도 온 머리가 들썩거리고 잠을 잘 못 자요. 딴 데 보다도 머리는 더 그래요. 아주 극심해요. 그 아픔이. 말하자면 자기와 별로 상관이 없는 남의 실수에까지 그렇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 눈에 티가 들어가서 고통이 돼 있는 것처럼 남의 실수에까지 그렇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많이 있고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람을 보는 면에서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첫째는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일반지식으로 사람을 교육하여 사람을 세우고자 하는 그런 지식이 있지요. 이 지식의 눈은 외모나 외형이나 언행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사람을 고통을 주고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원수 시 하더라. 이 지식의 눈을 가지고 사람을 교육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운 사람은 창세 이후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그 지식가지고 아무리 훌륭한 공부를 해서 학박사 장이 몇 개라도 그것가지고 창세 이후로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창세 이후로.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거다. 안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잖아요. 가만 보면. 당신이 안 와도 사람을 하나님 앞에 ‘오케이, 합격’이라고 세울 수 있다면 예수님이 왜 오시겠어요?
두 번째, 또 하나의 눈은 진리지식의 눈입니다. 이 눈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사람을 보고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이나 사상이나 인격이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이 진리지식의 눈. 그런데 무엇이 문제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눈을 뜨지 못한 소경인도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주님이 보낸 종이라 하면서, 왜 주님이 보낸 종이라? 이름 있는 신학교 나왔다 그 말이지. 주님이 보낸 종이라 하면서 사명자라 하면서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고 하면서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것을 예수님께 고하여 이루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 마지막 때에 교회로 하여금 눈을 못 뜨게 하고 영의 눈을 못 뜨게 하고 하나님의 불심판을 받게 하려고 하는 마귀의 최후의 발악이다.
아무리 종교적인 활동을 눈부시게 하여도 일반종교적 개념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해됐습니까? 그 말에? 아무 데고 거짓된 종들이나 사기꾼들이나 기도원이나 어디든지 ‘예수 예수’ 안 하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근데 예수소리를 왜 해요? 부르는 자는 자기의 소원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살이 편하게 이루기 위해서 들어달라 그러지. 들어주는 예수.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도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네가 살아라.’ 교인은 ‘아니올시다. 내 것부터 들어주시면 내가 배부르고 돈 많이 있으면 그렇게 살겠습니다.’ 살아질까요? 인간의 타락된 지식가지고 예수님을 설득을 시키려고 그래. 마귀에게도 안 넘어갔는데, 마귀의 설득도 예수님에게는 안 먹혀 들어갔는데 마귀의 수법을 가지고 인간 자기가 예수님을 자꾸 설득을 시키려고 그래. 어떻게? 울고 짜고 밥 안 먹고 ‘안 들어주면 나 교회 안 간다. 안 믿겠다’ 그러고. 그 어린애들하고 똑같지요? 이거 되게 얻어맞아야지요? 맞아도 팔다리가 부러지도록 맞아야지.
진리지식 없이 사람을 보는 눈은 남의 티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조차도 내가 다른 사람의 일반적인 티가 자꾸 거슬린단 말이요. 행동이라든지 말이라든지 ‘재는 왜 저러냐? 참 건방지다. 왜 저렇게 생겼냐? 참말로 주는 것 없이 밉게 생겼구나.’ 이런 게 다 티지요? 맞지요? ‘재는 왜 안경을 두 개나 쓰고 있다지? 재는 나이는 젊은데 왜 머리가 희다지? 난 저런 신랑감 얻지 않는다. 재는 왜 몸이 그렇고 목소리가 저렇다지?’ 고런 사람을 가만 봐 봐요. 뭐가 제대로 하나 생겼나? 맞을 거요.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 있습니까? 그 왜 그래요? 왜 주는 것 없이 밉데요? 아는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데요? 그거? 누구 눈이 비뚤어진 거요? 그거? 누구 눈에 들보만한 게 들어있어? 그래, 미운 건 하나 봤어. 사람이 무슨 말이냐? 어린이 재롱잔치 하는데 사진기 앞에서 선생 궁둥이인지 아가씨 궁둥이인지 아줌마 엉덩이인지 참 보기가 그렇다. 본인들도 모를 거야. 아가씨들 옷 좀 똑바로 입어. 요즘은 까만 게 그게 짝 달라붙는 게 스타킹이요? 레깅스? 쭉 올라가면 어디까지 올라가요? 배꼽까지? 그런 옷을 입으면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어야지. 옷은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반영을 하는 거다.
예배드리러 올 때 슬리퍼 질질 끌고 오면 어때요? 잠옷 바람으로? 그것도 옷은 옷이고 슬리퍼도 신발이지요? 맞지요? 근데 보기 싫어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고렇게 보는 눈은, 왜 내 눈에 그렇게 들보가 있는지 몰라. 그런 걸 좋게 보고 칭찬을 하면 내 눈에 들보는 없어지겠지요? 안 그래요? 그걸 지적하고 이러면 그게 들보지요? 안 그래요? 자기 좋아서 그렇게 입는 건데. 이게 지금 소돔 고모라 연출하느라 그러는 거야. 총각들 정신 바짝 차려? 그런 걸 늘씬하다 좋다 매력 있다고 봤다가는 너는 그 날로 큰 코 다친다. 모든 옷 입은 태도는 그 사람을 말하고 있어.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과 인격을 말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냐? 나이 먹었어도 수준이 낮다거나 사회적 공동체적 어떤 그런 면에 도덕성이 결여가 되었거나.
예수님이 태어난 그 나라에는 옷이 다 길어요. 예, 옷이 다 길어요. 근데 예수님이 좀 옷을 짧게 입는 나라로 왔더라면 예수님은 어떻게 옷을 입으셨을까? 짧게 입고 ‘계속 그렇게 나는 입으련다. 예수님이고 뭐고 내 자유인데’ 그런 사람은 우리교회 안 나와도 돼요. 그런 걸 환영하는 그런 교회 가면 총각들이 다리를 만져주면서 ‘아이고, 날씬하다. 오 예’ 하면서. 뭐 그런 데로 가라고요.
처음에는 사람이 모르지요. 근데 말씀을 듣다보면 자기 내적인 면에 교양과 덕을 쌓아야 되거든요? 내적으로? 그래야 사람이 아름다워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는 거지요. 젊은이들, 옷이 그거 밖에 없다 하거들랑 왜 구태여 그런 옷을 입어야 돼요? 엄마 아버지 옷도 입어요. 만들어 입으면 바느질 솜씨 늘지. 자꾸 만들어 입다보면 수선집이 되지. 아, 저절로 돈 벌지.
옷 만드는 사람 별 것 아니더라고요. ‘유행이다’ 하고 이리 찢고 저리 찢고 다 해놨는데 뭐 나도 그렇게 만들겠어. 아, 자루처럼 밀가루 포대처럼 이렇게 옷을 만들어가지고 구멍만 딱 뚫어놓으면 그것도 옷이요. 사람이 입으면 옷이요. 그래가지고 밀가루 포대 이거 미역귀 같은 거 여러 개 달아놓으면 그것도 유행이 되는 거요. 그렇게 하다보면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다보면, 자르고 붙이고 만들다보면 원래 밀가루 포대 형태는 완전히 없어지겠지요. 내 말 듣고 한 번 해봐요. 유행 탈 테니까. 돈을 억수로 벌 테니까.
기독교 신앙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짐과 동시에 내 자신이 죄인인 것이 먼저 보이는 겁니다. 주님 만나게 되면 ‘내가 죄인이로구나’ 하는 그 ‘죄인이다’ 하는 것은 주님과 같지 못하다는 것이 신앙양심 속에서 증거를 한단 말이요. 그러고 나서 주님의 것이 욕심나고, 욕심내는 것처럼 주님의 것으로 서서히 서서히 이제 성령님의 역사가 되고 채워진다 그 말이요. 이것이 아니고 남의 허물부터, 허물 남 잘못한 게 먼저 보인다면 이는 교만한 자요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사람이 된다.
주님의 종 교회 인도자들은 영의 눈 뜨임을 받아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 목적 곧,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너의 구원. 각자 자기의 구원 알아요? 예? 자기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하는 이것을 아주 어린 신앙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그냥 그렇게만 하고 있는데 우리입장에서 재해석이 또 들어가는 것은 ‘예수 믿으면 주님의 사람으로 닮아진다. 이것이 내 구원이다’ 그러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으로 닮아지는 것이 내 구원이고, 그 구원은 영원 전서부터 하나님의 마음의중에 들어있었다 그 말이요. 이해갑니까? 이해 안 가요?
남의 허물부터 먼저 보인다면 이는 교만한 자요 하나님 징계를 받게 된다. 먼저 예수 믿으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자기의 구원 이걸 먼저 알아야 된다. 이 설교 속에 이것이 늘 나가는 거다. 그러니까 다른 것이란 다면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너의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정신이나 사상이나 마음이나 소원이나 목적이나 고칠 수가 없다. 못 고치면 구원이 안 된다. 성장이 안 된다. 실력이 안 되고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말이요.
예, 그러니까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받을 필요가 없고 안 들어도 되고 그런 예수는 믿지 말라 그 말이요. 그러나 이 구원되는 정신사상 정신 소원 목적을 알려줄 때는 자기 속에 지적이 되면 고쳐야 된다. 그래야 너에게 구원이 된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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