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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산 없는 오랜 싸움](시편 18:30-50)
1. 승산 없는 오랜 싸움
사울의 집안과 다윗 사이에 오랜 싸움이 있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다윗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쫓기고
박해를 당하고 도망다녔다.
누가 봐도 힘과 권력과 군사력을 가진 사울이
힘 없고 배경 없고 군사력도 없는 다윗을
결국은 잡아서 죽이는 것으로 끝날 것 같은
싸움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승산이 제로인 원치 않는 싸움에
다윗이 휘말린 것이었다.
그저 도망다니고 피해 다니고 숨어 살아가야 했고,
심지어 몰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어도
자신의 힘으로 사울을 죽이지도 못한 (않은)
말도 안 되는 싸움을 아주 오랫동안 싸운 다윗이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
게다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싸움 속에서
다윗은 무엇을 했을까?
2. 승산 없는 싸움 중에 다윗이 한 일
그렇게 승산이 없는 싸움 중에서
다윗은 무슨 일을 했을까?
다윗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갔을까?
다윗이 한 일이 있었다.
(시 18:30-31, 새번역) [30]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흠도 없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티도 없다. 주님께로 피하여 오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31] 주님 밖에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밖에 그 어느 누가 구원의 반석인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믿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구원의 되심을 믿는 것이었다.
다윗은 힘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수한 전쟁에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 이라는
백성들의 환호성을 들을 만큼
장수로서 전쟁의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지혜와 힘을 가지고 사울과 제대로 싸웠다면
승산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숨고 도망다니다가 우연히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기까지 했으니,
자신의 힘을 믿었다면 훨씬 일찍 승리를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구원의 반석이심을 믿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힘과 지혜가 있지만,
그 힘과 지혜는 유한하고 흠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하셔야 흠이 없고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티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힘과 지혜와 능력이 있지만
자신의 유한하고 흠이 분명한 힘을 의지하다가는
잠시 승리를 얻을지 몰라도 결국은 망할 뿐임을 알았고,
흠이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할 때에야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3. 참된 찬양
참된 찬양은 언제 터져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참된 찬양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참된 찬양은 언제 터져 나올까?
승산 없는 싸움에서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흠이 없음을 믿고
하나님만 의지한 결과로 승리를 얻게 되었을 때
신자의 마음과 입에서는 참된 찬양이 터져나온다.
(시편 18:46-50, 새번역) [46] 주님은 살아 계신다! 나의 반석이신 주님을 찬양하여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높여라. [47] 하나님께서 나의 원수를 갚아 주시고, 뭇 백성을 나의 발 아래 굴복시켜 주셨습니다. [48] 주님은 원수들에게서 나를 구하여 주셨습니다.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보다 나를 더욱 높이셔서, 포악한 자들에게서도 나를 건지셨습니다. [49] 그러므로 주님, 뭇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50] 주님은 손수 세우신 왕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시는 분이시다. 손수 기름을 부어 세우신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영원무궁 하도록 베푸시는 분이시다.
둘째, 헛된 찬양과 구별되는 참된 찬양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런데 공허한 찬양과 참된 찬양의 특징을 가르는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주님은 살아계신다'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정보에 대해 찬양하는 것에
결코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고 나서는
반드시 그 하나님의 속성이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속성이 자신의 삶과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셨는지가 있어야
참된 찬양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객관적으로 많이 알고
그 객관적인 지식들에 근거해서 아무리 많은 찬양을 한다 해도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찬양은
참된 찬양이라 말하기 어렵다.
흠이 없고 티가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온 맘으로 고백하는 찬양이 진정한 찬양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4. 나는?
젊은 날 말씀을 묵상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적용'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말씀 자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글을 읽는 것'이니 그럭저럭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파악된 그 말씀들을
나의 삶에 적용하려고 하니,
적용의 원리들을 아무리 공부해도
실제적으로 정용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말씀묵상을 하다가 말다가 했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그런 이유로 말씀 묵상을 중단했다가도
헐떡이는 갈망을 가지고 말씀으로 다시 돌아올 때가 많았다.
말씀과 멀어졌다가도 다시 말씀으로 돌아온 이유는
인생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나의 삶은 흠 투성이요
내 주변 사람들의 삶도 티 투성이였는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 만은 흠도 티도 없음을 확인해서였다.
흠과 티로 충만한 내가 살아날,
구원의 길로 걸어갈 유일한 방법이
흠도 티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 뿐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결국 말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말씀에서 멀어졌다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서 나의 묵상에서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적용'이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발견한 '적용'은 간단했다.
어떤 행동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억지 적용이 아니라,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러면 나는?' 이라고 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그 때 이미 나는 수많은 아픔과 실패와
좌절과 절망들을 겪은 때였기에,
'그러면 나는?'이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말씀이 나의 내면과 삶을 만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슴 깊이 말씀이 파고 들어와서
울고 또 울면서 묵상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나의 내면으로 파고 드는 묵상은
나의 삶과 괴리가 적어지기 시작했고,
말씀 묵상이 주는 그 힘을 경험하면서
말씀 묵상이 더 이상은 지루한 의무가 되지 않았다.
목사로 살아가면서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까?
설교일까? 목회일까? 성도들을 돕고 섬기는 것일까?
그 모든 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아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이 내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파악하고 나서
그 말씀에 대해서 '그러면 나는?'이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 말씀이 나의 내면과 삶에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누려가는 것을,
신자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과정이 없다면 나는 목사로서
목사다운 삶을 전혀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적용되지 않은 말씀을 전하면서
공허한 소리만 남발하는 헛된 삶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는 살기 싫다.
그렇게 살려고 목사가 된 것이 전혀 아니다.
나는 나의 내면과 삶을 통과한 말씀을 전하여
성도들의 내면과 삶에도 말씀이 통과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기 때문에 목사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목사'이기 이전에 '신자'라는 사실이
나의 정체성을 더 분명하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사실 목사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일반신자인 듯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목사인 나 자신을 '설교하는 성도'라고
스스로 정의할 때가 많다.
성도가 아니라면, 신자가 아니라면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거짓과 사기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할 수 없는 내가
이토록 행복한 목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나는 흠과 티로 충만하지만,
하나님은 흠이 없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티가 없음을
삶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매일 말씀 묵상을 통해서 알고 경험하고 누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남은 인생 전체 동안,
나의 내면과 삶을 통과한 말씀을
행복하고 감사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나누면서 살아가는 삶이길 간절히 소원하는 아침이다.
윤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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