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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벧전4:1-6, 롬7:2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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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장규 목사 |
참고 : | 고전교회 |
벧전4:1-6, 롬7:22-8:4(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자)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죄가 없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많은 이 세상으로 인해,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1절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도,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1절에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도에게도 고난이 있으니, 마치 군인이 전쟁을 대비하여 갑옷을 입듯이, 예수님처럼 고난 받을 것을 대비하여 정신 무장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1.
그렇다면 왜 성도에게는 고난이 있을까요?
왜냐하면 1절에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중에서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는 성도가 되었지만, '죄가 우리에게 그쳤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됩니다.
물론 예수 믿는다고 핍박 당하고 조롱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이것은 불신의 죄를 그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시기, 질투, 정욕, 분노, 미움들로 인하여,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죄가 그쳤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갈등으로 인한 괴롭고 답답한 마음은 우리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와 똑같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롬7:22-24절을 볼까요?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런 점에서 볼 때 “죄가 그쳤다”는 의미는, 단지 '죄를 느끼지 않는 평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그쳤다”는 올바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에 노예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죄에 노예상태가 되어서, 죄에 파묻혀 살고, 죄와 더불어 살고, 죄를 따르며 살고, 심지어 죄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3절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2.
그러니 성도는 이제 죄에 노예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성도의 내부에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갈등을 통하여 결국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육신의 힘으로는 이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7:25절하에서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결론을 지으면서도,
바로 앞구절에서는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이런 인생의 비참한 현실가운데서도 이렇게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롬8:1-2절 말씀을 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즉 사도 바울 자신으로는 이런 갈등으로부터 헤어나올 수가 없는데, 알고보니까 이런 자신을 해방시켜줄 구세주가, 바로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하고 확신(자신이 믿음이 어릴 때는 이것을 인지하는 확신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제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니 이것을 인지하여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롬8:3-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우리의 육신의 갈등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그의 육신에 우리의 모든 육신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셔서], 우리를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인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의 법은 복음이고, 복음을 간략히 요약하면 대속과 부활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명의 성령의 법인 '대속과 부활'을 우리가 믿을 때, [죄는 대속으로 해결되어 정죄함을 당하지 않게 되고], [사망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부활로 해결되어 새생명을 얻게 되므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육신의 죄를 이기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갈5:16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사도 바울이 깨닫고 나니,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하)고 절망적인 고백을 하면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상)라고 하며 기뻐한 것입니다.
3.
그래서 이제 우리는 소망없는 육신에 미련을 두지 말고, 믿음으로 담대히 성령을 따라 행하므로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2절)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결단하게 되었으면, 이제 우리는 성령의 권세와 능력을 힘입기 위하여 성령충만을 사모하며 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성령의 빛으로 깨닫게 한 죄를 날마다 회개하여 심령의 그릇을 깨끗하게 하면서, 예배와 기도와 말씀에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온전히 세우는 한 몸의 지체속에 연합하여 자신의 은사로 다른 지체들을 섬겨주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 때,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바로 이렇게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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