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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1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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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17절-23절.
17절: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께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퍼져나갔습니다. 어떤 소문이요? 앞에 뭐라 그랬지요? 나인성 누구? 과부의 아들이 어떻다고요? 세상은 살리지를 못해요. 예, 사람은 아담 하와 이후 출생에서부터 하나님은 없고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인간 누구든지 출생 이후 사망하기까지 공동묘지에 들어가기까지 그렇게 사람은 살고 있더라.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저주받고 타락된 삶이거든요. 하나님이 없는 삶이라. 아무리 잘 살아도 하나님이 없는 삶은 그건 타락된 삶이고 사망적인 삶이라. 이해됐습니까? 아무리 그 쪽 길로 가도 죽는 거밖에 없어.
그런데 우리가 믿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구원의 예수, 성경에 보니까 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이 있더라. 그러니까 죽은 자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고. 부양꾼이 있단 말이요. 뒤따라가면서 울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두 무리가 있다. 지금도 있다. 예수님 없이 사망으로 사망권 안에서 사는 자들. 아무리 존귀영광을 얻어도 그 존귀영광성은 신령세계 하늘나라에 해당이 안 돼.
그런데 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서 예수님은 살리시는 일을 하시는구나. 우리의 육신은 시간 되면 어차피 죽지만 그 동안에 살리는 운동을 하는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지혜지식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리는 일을 하는구나. 이게 성령님의 일이요 주님의 일이요. 우리가 또 이 예수님을 믿고 뒤따라야 산다. 희망이 있다.
우리가 아까 신명기를 읽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 믿는 이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바울로 통해서 그 유럽으로 그 유구라파로 해서 미국으로 해서 일본으로 해서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그 미국사람들은 서양사람들은 야벳의 후손으로 보고 있지요. 그리고 기독교를 우리보다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가 6. 25를 만났을 때에도 그래도 기독교 국가에서 많은 협조를 했다. 이해갑니까? 6.25를 겪은 사람은 알 거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아까 신명기를 읽었는데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리라. 꾸어줄지라도. 꾸어줘도.’ 그런데 우리는 얻어먹으면서 왜 그렇게 싸웠나? 그 나라에는 정치를 해도 기독교 정신으로, 대통령 선서를 해도 성경을 들고 하더라. 역사적으로도 보여주는데도 이래도 모르겠냐?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역사로 보여주는데도 육신의 눈을 가지고 보고도 이래도 모르겠냐? 육신의 눈으로 보고도 모르면 참 비참하고 망할 수밖에 없는 거다. 딴 도리가 없다 하나님은 억지로 안 하신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성경문자를 토대로 하고 예, 그 다음에 더 올라가서 하나님의 인격의 사람으로, 사람 중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교훈으로 들어가야 되는 건데 이 마지막 시대에 거짓 종들의 교훈을 보면 ‘예수 믿어 세상부자로 살자. 세상을 차지하고 살자.’ 세상은 어차피 불에 탈 텐데, 불에 태운다고 그랬는데. 그러니 교회서부터 그런 짓이 나오니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사람 못 살고 사람 고통스럽고 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돈이 아니라 부자가 아니라 사람이란 말이요. 사람 머리통. 맞잖아요?
사람 머리통이 잘못돼 놓으면 돈이 많으니까 그냥 죄를 짓고 들어가고, 아무리 공부 많이 해도 머리통이 잘못되면 나라 팔아먹고 세금 뜯어먹고 남 해치고 고통주고 전쟁 일으키고. 머리통이야. 그래도 모르겠냐? 그래도 모르겠냐? 가정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 자기 몸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 사회적 고통이라든지 국가적 세계적 고통이라든지 사람이다. 사람. 문제는 사람이다.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다. 사람.
한 동안 산돼지들이 막 도시로 내려온다고? 아파트로? 그 산돼지 나무랄 것 아니다. 아니, 산돼지 먹을 걸 사람들이 다 어떻게 해버렸으니 산돼지가 인간 쪽으로 공격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골프 친다고 나무 다 잘라버렸지, 그렇게 짐승 잡지 말라고 해도 몰래 짐승 잡아서 고와먹고 삶아먹고 어떻게 해먹고. 문제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살리시는 일이라고요, 죽이는 일이라고요? 살리는 일.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니 사해바다로 죽음의 바다로 흐르던 그 요단강물이 섰지 않았어요? 섰단 말이요. 죽음의 세력을 스톱을 시켜. 그게 예수 믿는 거다.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 믿으면서 헛 믿지 마라. 제발 좀. 자기 속에서 살아나는 생각이 있고 살아나는 지식이 있고 살아나는 지혜가 있고 살아나는 사랑과 도덕성이 있어야지 왜 헛 믿어. 교회 헌금 갖다 주고 왜 헛 믿느냐 그 말이요. 사람 되는, 만들어지는 공부가 교회밖에 없는 건데 교회 가도 이상한 교회 가가지고 홀딱 다 빼앗기고 몸도 빼앗기고 재산 다 빼앗기고. 머리통이 잘못됐다. 성경을 왜 갖고 다니나? 적으나마 성경을 보면 그래도 나을 텐데.
우리교회 특히 이 진리 받는 사람들, 집에서 별 볼일 없으면 성경 보세요. 성경 안 보고 이 말씀 못 들어요. 어렵기만 하지. ‘무슨 말인가’ 하고 졸다 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역사를 시인할 줄 알아야 된다. 부정하지 마라. 부정하면 너는 미련한 자가 된다. 눈에 안 보이는 건 모른다 할지라도 눈에 보이는 역사까지 네가 부정을 하려고 드냐? 그럼 너는 미련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어쩔 도리가 없다.
‘예수께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퍼지니라’: 세상에서는 나쁜 소문이든 좋은 소문이든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잘 펴져나갑니다. 예, 소문 퍼지는 것이 세상이라. 오늘날 자기의 소문이 어떻게 퍼졌을까요? 소문은 다 퍼지기 마련이요. 자기의 소문이 어떻게 퍼졌을까? ‘아무개는 참 부지런하더라. 아무개는 게으름뱅이더라. 아무개는 참 성격이 더럽더라. 아무개는 남의 돈 떼먹고 달아났다더라. 자기 얼굴에 분칠은 잘하고 다니면서 집구석은 이거는 완전히 쓰레기통이더라. 남에게는 잘해주는데 자기 집 식구들하고는 왜 그렇게 싸우는지?’ 그런 소문 안 나갈까요? 다 나가요. 은연중에 인간이란다면 소문 다 나간다. 개도요 사람 잘 따르는 개는 ‘아니, 아무 집 개가 참 순하더라. 아이고, 누구 집 개는 사람 막 물어뜯으려고 그러는데 그 집 가지마라.’ 개도 소문이 나더라. 자기의 소문이 다 나간다. 은연중에 나간다.
예수께 대한 소문은 어떤 소문으로 퍼져나갔을까? 행하신 일에 대해서? 아니면 예수님의 모양과 생김새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에 어떤 면을 빼고 전했을까, 아니면 더 붙여서 전했을까, 아니면 예수님의 소문을 그대로 전했을까? 자기가 본 것대로만 전했을까, 자기의 생각 자기의 느낌대로만 전했을까? 전할 때 앞뒤가 맞지 않는 의문투성이로 전했을까, 확실하게 믿어지도록, 이제 그건 예언적 성격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선지자처럼 전해졌을까? 확실하게 전하는 것은 그런 성질로 들어가 있다 그 말이요. 예수님의 소문을 그냥 막 그냥 후벼 파서 전했다면 요건 마귀적인 그런 성격 성질로 전한 거고. 예, 시기질투로 전했으면.
온 유대는 모세오경을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입니다. 그들은 어느 신앙노선이 살리는 노선이며 어느 길이 죽는 길이며 어느 길이 살리는 길인지? 예수 믿는 이 신앙도 교회 가는 것도 이거 모르면 속기 마련인데,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보면서 ‘하나님, 예수 믿는 거 헛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로 인도해 주옵소서’ 이러면 성령님의 인도가 있을 텐데 ‘어느 건물이 크고 번쩍하나? 어느 십자가가 크고 더 높이 달렸나?’ 그거보고 간다든지, 그 동네 아줌마 또는 형제들 중에 이거 뭐요? 다단계판매 잘 돌아다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아줌마 소리 듣고 가면 이거 큰일 난다. 다 그럴까마는. 왜냐? 장사꾼들은 사람 많은 데로 가거든요. 맞지요? 그래요.
이웃에 살아도 예수 믿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느끼질 않고 그냥 교회에 사람 많은 거 보고 가는 것. 이웃사람들도 가만 보면 내가 목사인데 말하자면 딴 데로 가버리더라. 딴 교회로 가버리더라. 그럼 가는 거 어떻게 해요? 두 다리가 달렸으니 알아서 하는 거지. 근데 내가 전할 때는 잘 안 들으려고 그러고 잘 안 나오고 피해 가고. 그런데 그런 교회 갈 때는 또 잘 가고. 참 이상하다. 그래서 이게 가만히 우리 입장에서 성령의 눈과 성령의 생각으로 가만히 보면 ‘사람이 참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그런 느낌.
참 이게 사람을 깨닫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돈 잡으러 가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깨닫는 것 참 중요해요. 정말 이 사람 때문에 사람 잘못 만나서 이게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몰라. 교회 잘못 만나서 고통 받는 교인이 참 많아요.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들이 성경을 통해서 보면 어느 신앙노선이 살리는 노선인지 어느 신앙노선이 죽이는 노선인지, 어느 교회가 영적 면을 죽이는 교회인지 어느 교회가 살리는 교회인지 이걸 모르더라. 필연적으로 알아야 하는 건데 모르더라.
이게 분별이 들어가면 이게 매사에 조심되고 사람이 속지를 않을 텐데 모르고 들어갔으니 그 교회에서 하는 게 전부 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시키는 줄 알고 그냥 한단 말이요. 이러니 사람이 그 머리통이 귀신이 다 들어가는 수밖에 없는 거지. 말세시대에 사람 속에, 특히 세상에 속한 교인들 머릿속에 귀신이 더 잘 들어가요. 알겠어요? 세상 한 번 들어봐요. 세상바람에 제 멋대로 날아다녀. 주일이고 뭐고 없어.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모두 언행심사가 있으니 무엇이라고 소문이 나가고 있을까? 우리교회도 소문이 나가는 거요. 그리고 우리교인들이 주일날인데 홈플러스나 밀리오레나 또 이마트나 구멍가게나 뭐 사들고 다녀 봐요. 우리교회 얼굴은 깎인다. 그리고 그 교회 목사도 얼굴이 깎이는 거다. 그 분명히 알아라.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면 주일날 똑바로 지켜라. 집사이면서 지킬 줄도 모르고.
교회뿐만 아니고 일반사회, 어떤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 거 한 번 생각해봐요. 말없이 빠져버리고, 온다 간다 말없이 휙 하면 목 안 잘려요? 일반사회에서 목 안 잘려요? 왜 그렇게 살까? 사람이 교회에서 모든 사고방식이 반듯하게 돼야 일반사회에서도 일하는 그 면이 건전하고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날 수가 있지 안 그러면 모든 이 자기의 생활은 교회에서부터 좀 더 들어가면 자기 가정에서부터 하나님 앞에서부터 문제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가 제 멋대로요. 제멋대로. 우리교회는 별로 그런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그러나 있기는 또 있어. 참 한심하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잘 봐달라고? 응답 없다. 성경에 있지요? ‘네가 인내의 말씀을 붙잡고 지켰은즉 내가 너를 어떻게 지키겠다.’ 하나님 앞에 죽느냐 사느냐 그거밖에 없어요. 잘못했으면 회개밖에 없고 잘할수록 또 앞으로 뛰어나가는 그 면으로 이게 되어있어야지 별 것도 아닌데 흐물흐물해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이기려고 그러나?
남에게는 잘해주는데 왜 집에 와서는 잘 싸울까? 왜 그럴까요? 교회 와서는 잘 어울리지를 못하는데 세상 바깥으로 나갈 때는 고삐 풀린 송아지마냥 왜 그렇게 뛰어다닐까? 참 예수 믿는 게 좋아요. 그 청년들 젊은이들 성경이라고 하는 이게 소 콱 끼는 게 뭐요? 코뚜레. 그게 돼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못 잡아요. 가만 보면 예수 믿는 청년들은 다 코가 끼어있는데 자기는 끼인 줄 모르고 있을 거야. 모를 거야. 안 그러면 큰일 난다. 뿔나지. 그거 안 끼어있지. 그래서 소에게 낀 걸 보여주는 거요. 소를 볼 때마다 자기를 보라고요. 아닌 말로 성격 나쁜 자기가 소를 부리려 그럴 때 이거 안 낀 상태로서 부려지겠어요? 안 된다. 늘 떠받아 버린다. 그러니까 코뚜레가 있는 게 좋지요? 나빠요?
내 소문은 나쁘게 나갈까, 좋게 나갈까? 예수님께서 그 뜻을 행하실 때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대로, 인간을 만든 그 목적대로 예수님이 행해 나가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 소문이 아름답게 나가는 것을 보시고 기쁘게 여기실까, 슬프게 여기실까? 내가 예수 믿고 사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여기실까, 슬프게 여기실까? 아니면 분노하실까? 한 가정의 자녀가 아버지의 좋은 말씀대로 그대로 딱딱 해놓으면 시키는 대로 해놓으면 부모가 자기를 기쁘게 여기지요? 시키는 대로 안 해놓고 잠만 쿨쿨 자고 있고 딴 짓거리 하고 있으면 어때요? 슬프게 여기시지요. ‘꼴도 보기 싫다. 나가라’ 그러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시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셔요. 우리를 위해서 그러시는 거요. 우리를 위해서.
18절-23절: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제 그 말씀 들을 때에, 본문을 읽었을 때에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랬어요. 그럼 이 본문을, 특히 병자 고치고 문둥이 깨끗함 받고 죽은 자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육적으로 들었을까요, 영적으로 들었을까요? 예, 육적으로 들었다면 그 사람은 실족이다. 그게. 이제 간단히 말하면 그렇게 들어가는 거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가서 고했는데 무엇을 말했을까? 말하자면 세례요한이 믿을 수 있도록 확실히 말을 했을까? ‘가서 말하라’ 했으니까.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또 마침 그 때에 여러 병자들이 왔잖아요. ‘너희들이 봤지? 가서 이렇게 이렇게 말해라.’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가서 믿을 수 있도록 확실히 말이 전해졌을까, 들을수록 이게 궁금증만 자꾸 나오게 그렇게 말을 전했을까? 아니면 세례요한이 그 입장에서 그냥 지나가는 말로 들리도록 말했을까? ‘그만 말해라. 그만 말해라. 에이, 들으나마나’ 뭐 이런 식으로 들리도록 했을까 그 말이요. 아니면 더 말을 많이 붙여서 말을 많이 했을까, 아니면 말을 많이 빼버리고 말을 했을까?
전하는 자들이 스스로는 못 느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하신 일을 고하고 말하고 전한다고 하는 것은 자타의 구원에 그리고 대대로 큰 책임감이 들어있는 일들입니다. 큰 책임이 들어있어요. 목사님들은 그 면을 아주 뼛속 깊이 새겨야 돼요. 자기가 전하는 말을 교인들이 들을 거 아니요? 듣고서 정말 뼛속 깊이 박혀가지고 자녀에게 자자후손 자자후손 이렇게 내려가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게 그대로 생명적인 말씀으로 구원을 잘 이루는 말씀으로 내려갔다면 예수님 앞에 모일 때에 그게 다 드러날 텐데. 그런데 그 놀이할 때에 이쪽에서 말을 전했는데 저쪽에 가서 보면 전혀 딴판 말이 나오는 것도 있습니까? 말이 전혀 달라져 버립니까? 책임감이 들어있다. 우리가 성경보고 말을 할 때는 ‘영원히 자타의 구원에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말씀이 들어있다. 그거는 실상이다. 실제다. 실제.
19절-23절을 보면 세례요한은 제자들의 소리를 듣고 확인을 해야 합니다. 어림잡고 생각하거나 대충대충 넘어갈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입으로부터 확인을 해야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말을 보면 세례요한이 주님을 무척 기다렸다는 거지요. 그렇지요? 무척 기다렸어. 왜 그토록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을까? 이걸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졌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낸 겁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본문에서는 지금 이 대목에서는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말은 없지만 요게 지금 옥에 갇힌 상태란 말이요.
자, 그래서 문제 1번. 세례요한이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줄 줄 알고 학수고대하고 기다렸다는 말이다? 전도 열심히 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좀 하나님이 도와주셨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들듯이. 예,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는 자기를 예수님이 오셔서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뜻으로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릴까요’ 그 말인지? 두 번째, 세례요한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육 개월 먼저 왔지요. 다른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세례도 주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도 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이제 자기의 소명이 그 분이 오시면 끝나게 돼있어. 맞지요? 그 분이 오시면 끝나게 돼있어요. 말하자면 ‘이제 죽어도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뜻으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그 다음 세 번째, 확인을 하고 제자들을 보내기 위해서? 세례요한이 제자들이 있거든요. 예수님께 보내기 위해서. 확인을 하고 보내기 위해서. 그 제자들을 아무에게나 보낼 수 없는 처지거든. 생각을 해봐요. 신경이 쓰이는 거지. 만약의 경우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난 모르겠다’ 그렇게 말을 해버렸다면 제자들을 보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난 모른다’ 그래놓으면 세례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낼 수 있겠느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아무리 만능의 능력자라도 세례요한을 모르면 메시아가 아닌 거지요. 맞잖아요? 지금 말귀를 잘 모르겠어요? 세례요한을 누가 보냈어요? 예수님이 보냈지. 육 개월 먼저. 뱃속에서부터 세례요한이 춤을 췄잖아요. 뱃속에서 엄마뱃속에서 마리아 뱃속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지금 다 뭐 이치는 같습니다. 가령 교인들 중에 이제 그런 교인들 있으니까 ‘나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로 이렇게 가라고 합디다’ 그러면 목사님은 뭐라고 그래야 되겠어요? 목사님은? ‘아, 그렇습니까? 아이고, 잘 오셨습니다’ 그래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가만 계십시오. 나도 하나님께 좀 물어봐야 되겠습니다.’ 허허허. ‘당신을 우리교회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말인즉 그래야 맞는 말이거든요?
지금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 참 그 중풍이 걸렸는지 어떻게 됐는지? 하여튼 모르겠어. 내가 잘 아는 청년이 있었는데 나팔을 좀 불었어. 늘 나팔을 불었기 때문에, 학교 다니면서 늘 악대부에 들어가서 불었다. 내 생각은 청년 때부터 그런 거 배우지 말고 그 때 기장교회 다녔으니까 제발 성경 좀 보고, 내 입장에서는 나를 잘 따랐어요. 청년들을 가르쳤으니까. ‘좀 이게 하나님의 종이 됐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지요.
그런데 내가 없어진 후에는 이게 뭐 그런 그룹들이 있어요. 딴따라라 하나? 술집에 가서도 불어주고 하는 이거. 난 아주 참 못 봐주거든요. 기독자들이 그런데 가서 그런 짓하면 못 써요. 근데 사회 나와서 똑부러지게 할 일이 없고 나팔을 부니 딴따라 클럽을 이루어서 불고 다니고. 이렇게 하면 교회고 신앙이고 뭐고 없어요. 신앙은 못 지켜요. 뭐가 되겠어요? 이제?
그렇게 이제 막 학교졸업을 하고도 갈증을 일으키더니 저기 어디요? 청평에?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유명한 기도원? 뭐요? 한얼산 기도원에 가서, 아마 거기 크잖아요? 그 때 이천석목사님이 아마 부흥회 했을 거요. 거기 가서 ‘나와서 부시오’ 그렇게 안 해도 자기가 불 줄 아니까 그냥 찬송할 때 불면 되거든. 그 불었더니 저 시골 촌에서 올라온 아가씨가 이게 또 참 문제라. 교회서 도대체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게 아가씨가 귀신이 들려가지고 기도원에 턱 앉아가지고 그 모양으로, 그 아가씨가 끝마치고 만나서 ‘응답에 하나님께서 당신하고 결혼을 하라 그러더라’고.
근데 그 청년이 나를 잘 아니까 내가 그 때 목회를 하고 있었는지? 스승목사님 교훈 받고. 근데 이제 나한테 묻더라고. ‘이 결혼을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하지마라고 그랬어. 나 그런 거 싫어하니까 이제 내 생각을 가지고 하지마라. 그래서 또 ‘스승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고 스승목사님한테 가서 물었어. 내가 직접 가서 물었어. ‘이런 이런 일이 있는데 나는 하지 말라 그랬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승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그래? 그러면 그 청년보고 나도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아야 되겠다. 응답받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 응답이 올 리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 아가씨는 할망구가 돼서 죽으면 죽는 거고 딴 데 시집가면 가는 거지.
성경에 보면 고넬료 백부장에게도 하나님의 역사가 왔고, 또 누구요? 베드로에게도 왔거든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꼭 아셔야 돼요. 구약성경에 보면 젊은 선지자에게 가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말하고 돌아오라고 했는데 늙은 선지자가 그걸 알고 ‘나에게도 말했다’ 이러면서 젊은 선지자 데려다 그 집에서 밥 먹고 아침에 어떻게 됐지요? 어떻게 죽었어요? 그냥 죽었어요? 그래, 반드시 그게 있어야 돼요. 함부로 말 듣지 말아요. 근데 성경을 안 보니까.
근데 이 청년이 내가 ‘스승목사님이 그러더라’ 그러지 않고 ‘가지마라.’ 그런 여자들하고 갔다가는 이게 가정 파괴가 돼요. 그런데 그 사이에 이 청년이 아가씨한테 돈을 얻었던 모양이야. 이래놓으니 꼼짝없이 코가 끼었어. 어느 날 보니까 했데. 결혼을 했데. 결혼을 하고서 이거 뭐 편안할 리가 있나요? 어떻게 소란스러운지? 애를 낳고도. 참 지금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 저번에 작년인가 전화하니까 말하자면 ‘목사님 소리 안 듣다가 하나님한테 징계 받았다고 벌 받았다’고. 어떻게 됐냐? 뭐 머리가 어떻고 하여튼 교통사고가 났는지? 하여튼 사고는 난 거 같아. 돌아다니다가 사고가 난 건지 중풍으로 걸린 건지?
이 참 미국까지 가서 이게 또 불어주고. 미국에서 갈릴리 선교단인가? 하여튼 모르겠어. 그 청년이 나를 잘 아니까 거시서 ‘대한민국에 어려운 교회가 있으면 말하라.’ 그런데 그래도 조국이 그리워서 조국의 향수가 나고 그래서, 그것도 도시교회 말고 시골교회. 그 때 내가 어디 있었는가 하니 서산 해미에 읍성이 있어. 배우들이 거기 와서 사진을 잘 찍지. 영화 만드느라고. 어느 날 달러돈이 왔어. 백 불인가, 이백불인가? 백 불이면 얼마요? 십만 원. 갑자기 날아오니까 ‘이게 도대체가 간첩이 보냈나?’ 허허. 그 청년이 말을 해서 해미 나한테 왔다. 그래서 내가 도로 물었어. 돈 안 쓰고. 미국에 선교하는 그 쪽으로. ‘이게 무슨 돈입니까? 당신의 소속은 어디며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하고 쭉 편지를 써서 보냈어. 거기서 답장이 왔어. 아, 그러냐고.
그 돈이 시골구석에서 바꿔지나요? 그 돈 바꾸려면 용산까지 와야 돼 . 세 시간 버스타고. 용산 시외버스가 있었어요. 그것도 차를 잘 타야지 안 그러면 홍성을 거쳐서 홍성에서 예산으로, 이렇게 천안으로 해서 올라와야 돼. 그러니까 세 시간 족히 걸려요. 몇 번 왔지? 아마? 올 때마다 내가 영수증을 딱 해서 보냈어요. 보내니까 거기서 ‘세상에’ 아마 그랬던 모양이요. ‘이런 분이 이때까지 없었다. 계속 대한민국 시골로 보냈는데 이렇게 해주는 목사가 없었다. 도대체 이 분이 어떤 분인가’ 하고 미국에서 한국에 볼일 있는 겸 내가 있는 교회로 찾아왔어. 그 아주머니가. 그 선교단 아주머니겠지요. 여전도회하고 있어요. 돕느라고 찾아왔어. 이만저만 얘기를 해줬지.
근데 이제 내가 청주로 이사를 갔어. 교인들은 거의 다 서울 쪽으로 떠나고 스승목사님 교회로 가기도 하니까 자녀들이 다 나가지요. 시골에서는 다 나가요. 그러니까 어쩔 도리가 없어. 청주로 갔어. 청주로 가니까 거기가 그래도 도시라고 선교후원금이 딱 끊어졌어요. 그런 일도 있었어. 이런 얘기하면 조는 사람이 없어. 이상하게. 점심때는 다 됐는데 점심 먹고 합시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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