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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2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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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22절-23절.
2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오늘은 죽은 자가 살아나며. 오늘 각 교회마다 무슨 예배를 올리지요? 부활절? 우리는 예배시마다 부활의 생명이 들어가는 겁니다. 평소에는 세상 것을 사망의 것을 죽을 것을 구하다가 부활절 절기를 지킨다고 해서 자기 신앙생명이 살아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명이 살아나는 것은 부활한 생명의 이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주님의 살으심의 그 이치 그 가르심에는 죽은 것이 없고 죽은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고 언행심사가 전부는 산 것이라. 눈으로 보고 듣고 오각의 오감성 희로애락의 모든 자기의 감성 전부는 사망에서 영생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래서 우리도 예수 믿는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소원 목적이나 정신 사상이나 가치판단성이나 주님처럼 가져야 산다.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된다. 예수 믿는 도 속에는 그런 것이 들어있어요. 예수 믿는 것을 헛 믿지 말고 교회 괜히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예수 믿는 모든 성격이나 성질이 마음가짐의 그 태도가 자기 된 데로 들어가는 거요. 후회하고 통곡하고 눈물 흘리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
‘죽은 자가 살아나며’: 예수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고 일반사람들도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고 죽은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맞지요? 부둣가의 어판장에 가서도 산 고기를 원하지 죽은 고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식당에 가서도 뭐 꽃게 같은 거 음식을 사먹어도 죽은 꽃게의 맛과 산 꽃게의 맛은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죽고 썩고 냄새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창세 때 아담 하와로부터 영이 죽은 것을 잘 모릅니다. 일반사람들도 모르고.
일반사람들은 그 영이 죽은 상태로 지금까지 있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구속의 보혈로 십자가의 공로로 선악과 따먹고 죽은 그 영을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영이 중생이 되었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기독교 안에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 영이 죽어있는 상태로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예수 믿고 싶어도 그게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도 그게 얼른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고 교회 나올 마음도 없고. 그러나 지금 현재 상태가 자기가 교회 나오고 싶었던 어찌됐던 간 믿음이 있든 없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그러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중심 속에서 나온다면 그 사람은 영이 중생이 되었다 그렇게 보고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을 영이 죽었다고 그렇게 해놓으면 그건 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의 자녀로구나. 그렇게 일단은 깔고 들어가는 거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죽었던 영을,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을 살리셨고. 그런 걸 보니 살리시는 것을 원하는 분이시구나. 그 다음에 또 성령을 주시어서 성경을 깨닫도록 해서 예수 믿는 자기에게 이 영적 기능과 지능적인 면으로 하나님의 도덕성적인 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세상 염려걱정 근심이 자기 머리통 속에 마음속에 가득 있었던 것을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으로 원하게 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들어가게 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살게 하니 이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계속적으로 사는 역사를 우리 주님이 하도록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계속 아는 것으로 성장해 들어가고 깨닫는 것으로 성장해 들어가고 사람의 성격이 고쳐지고 성질이 고쳐지고 도둑질하던 사람이 고쳐져서 남에게 나누어줄 줄 알고 욕심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사랑이에요. 이제 아가페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거예요. 그게 살아나는 거예요. 이제.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세상소원 목적 땅의 것 아래 것 그것을 떠날 수가 없지만 예수를 믿게 되면 믿음이 차차 들어가고 깨달아지면 그 정신과 마음이 자꾸 하늘로 솟구치지요? 하늘 쪽을 향하게 되지요? 산 풀과 산 나무와 산 꽃들은 하늘을 향해가고 있지요? 하늘을 향해서 들지요? 하늘 쪽으로? 햇빛과 비를 받고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고. 그러나 죽은 나무 죽은 풀 죽은 꽃은 자꾸 시들어져서 땅으로 내려가지요. 결국은 썩지요. 자연물을 보고도 그 이치를 깨달아야 돼요.
깨닫는 사람은 산 사람이라 죽은 사람은 못 깨달아. 예수 믿으면서 깨달아 나가야지. 예수 믿는 자기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다듬어 나가야지요. 기품 있게 만들어 나가야지. 예수 믿으면서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후 수 년 수 십 년을 믿어나가도 예수 믿는 그 품성이 저질적이고 안 믿는 사람처럼 돼있다면 그 사람 어디 쓰겠느냐 그 말이요. 그 사람이 사람의 됨됨이가 쓰겠느냐? 그거.
우리 주님은 죽는 것을 원하지 않고 살아나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 부활. 나는 죽기 싫다 그 말이지. 안 그래요? 근데 모든 사람은 죽기 싫다 하는 데도 죽습니까? 그건 왜 그런 거냐? 죽는 것으로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근데 예수님은 죽고 썩고 죽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은 우리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역사가 그렇게 들어있단 말이요. 예,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하늘로부터 오실 필요가 없는 거지요. 이치가.
살아도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믿으면 죽어도 살고.’ 믿으면 죽어도 살고. 지금 믿으면. 언제든지 믿어도 죽어도 살고. 뭐가 죽어도? 육신이 죽어도 천국에서 변화 부활로 살고. 이해됐습니까?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건 또 뭐요? 살아서 믿은 사람도 죽은 사람이 많은데?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뭘 보고 말씀하시는 걸까? 예수 믿는 사람 속에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영 중생을 시켜놓은 거기에서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격 성질로 되어진 것은 이건 죽은 것은 아니다. 변화 부활할 때에 살아서 예수 믿으면서 살려놓은 그건 죄다 가져간다. 그것이 예수 믿는 인간 네 속에 있다. 우리 주님과 똑같은 지혜지식으로. 그 주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그 지식은 죽지는 않지요. 절대 정확하고.
하나님의 지혜지식으로 하나님의 선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거룩으로 하나님의 진실로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라도 살아난 것이 있느냐? 산 거다. 그거는 산 거다. 하나님의 것으로 된 것은 산 것이다.
그러면 자기에게 예수님을 믿는 그 날로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식으로나 하나님의 지혜로나 선 사랑 거룩 진실 의와 주권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적으로 살아난 것이 있느냐? 자기에게 예수 믿으면서 ‘요것은 주님의 것으로 바꿔진 게 아닌가?’ 확실히는 모르나. 확실히 안다면 더 좋고, 확실히는 모르나 그래도 느낌적으로 자기에게 있는 거거든. 뭔지도 모르게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 어디 손 한 번 들어봐요? 없어요? 없다면 이거 말이 안 되는데.
그게 없다면 뭐 ‘예수부활 하셨네’ 나와 무슨 상관이요? 예수님 부활 속에는 죽은 게 하나도 없어요. 기능 지능적으로 죽은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의 것으로. 매 주 설교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하나님의 것으로가 아니라면 ‘예수 믿어 부자 살고’ 하는 식이라면 여기에는 예수님의 것은 없다. 밥 먹고 똥만 싸고 부자로 살았다 이거뿐이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사람이 바꿔진 것이 있느냐? 없다면 이건 심각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우리 주님의 것으로 하나라도 닮은 것이 없다면 요건 인생 실패, 예수 믿는 실패, 가정교육의 실패, 먹고 살면서 실패. 전부 실패요. 성경이 증거를 하는 거요.
주님의 것으로 살아난 것은, 주님의 것으로 닮아진 것은 이건 모두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결이 돼있다. 전부. 변화 부활 때에 전부는 가져가는 것. 왜? 신령성으로 살아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들어간다. 예수 믿으면서 수 년 수 십 년 믿으면서 자기가 자기에게 이 예수님의 것으로 몇 가지나 살아난 것이 있느냐? 몇 가지나 살아난 것이 있느냐? 없다면 안 된다. 생각을 해봐요 여기 ‘죽은 자가 살아나며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아, 성경은 분명히 있는데. 공동묘지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그건 예수님이 오시는 날 심판의 부활로 영광의 부활로 다 나오는 거지요? 근데 우리가 현재 예수 믿으면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그 영은 예수님이 살렸다 그랬어요. 왜 그걸 살렸느냐? 그건 기본 터. 기본 기초로 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기 속에 죽었던 거, 옛날 풍속 습관 잘못된 습관이 예수님의 것으로 다 살아나야 된다. 아무렴 산 것이 좋지.
그런데 그 자기의 성격 성질 면에 성질이 돋아지면 자기 속에서 평소에는 잘 몰라요. 누가 건드렸다거나 무슨 자기에게 해롭게 했다 그러면 자기 속에서 뭐가 팍, 이게 평소에는 안 보이는데 올라오는 거 있습니까? 솟구치는 거? 그게 살아야 돼요, 죽어야 돼요? 그게 살아있거든? 그게 솟구치면 다른 사람들이 다 좋아해요, 다 싫어해요? 싫어하는데 그걸 자꾸 살려놓고 있거든. 예수 믿으면서 그런 게 자꾸 죽어야 될 텐데 그 말이요.
솟구치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이 나오고, 그러면 많이 죽여 놓으면 세상이 와서 ‘이런 놈은 살려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죽여 버리지요. 그런 사람은 그렇게 죽어도 사형으로 죽어도 그 정신은 안 죽었어. 맞잖아요? 그 정신이 죽고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하고 그게 죽어야 되겠는데 육신이 죽는 마당에 있으면서도 안 죽으려고 악을 바락바락 씁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며’ 했으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역사하신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직까지 이 땅에는 보혜사 성령님이 역사를 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는 거와 똑같아요. 그래서 예수 믿는 자기에게 죽은 것이 살아나야 된다.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나야 된다. 성격 면에 성질 면에 성분 면에 지식 면에 모든 면에서 살아나는 것일수록 그 사람은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하나님의 특별사랑을 입는 사람이다. 그렇게 들어간단 말이요.
그 다음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 말 그대로 보면 글자 그대로 보면 부자에게는 복음이 전파 안 된다는 말이지요? 글자 그대로 보면? 이것이 무슨 뜻을 가졌기에 이런 것이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그럼 가난이 아니면 복음이 전파가 안 된다 그 말이지. 부자에게는 복음이 전파 안 된다 그 말이지. 글자 그대로.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 영적인 뜻 이 하나님의 뜻은 세상 뜻이 아니고 영적인 뜻 하늘나라의 뜻으로 이걸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난도 가난 나름이고 부자도 부자 나름인데 어떤 가난한 자가 있고 어떤 부자가 있는가?
자, 그래서 첫째는 세상 것 물질의 것 물질에 속한 것이 없는 가난. 즉 돈이 없고 땅도 없고 집도 없고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 그건 쉽지요? 알 수 있지요? 집도 절도 없고 돈도 없고. 쉽게 말하면 거지. 이 거지가 죽으면 육신이 죽었으니까 육신의 가난은 죽음으로서 끝나버리지요. 그렇지요? 그 다음 두 번째, 천국의 것 영의 것 하나님의 말씀의 개달음이 없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가난성이 있어요. 이 가난성은 부자고 부자가 아니고 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깨닫지 못한 자는 그 가난성은 죽어도 영원히 가는 가난성이다 그 말이요. 육신의 가난성은 육신이 죽음으로서 끝나는 거고, 그 다음에 부자든 가난뱅이든 영적 면에서 하늘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자기 속에 가득 채우지 못한 이 가난성은 죽어도 영원히 가는 가난성이라 그 말이요. 이해가셨습니까?
자기가 어느 가난을 더 뼈아프게 느끼느냐에 따라서 복음이 전파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합니다. 자기에게.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자기가 어느 가난을 더 뼈아프게 느끼느냐에 따라서 자기에게 복음이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한다. 자기에게는 그렇다 그 말이요. 예를 들면 이 세상물질의 가난성을 자기가 가난하다 그러면 세상부요에 대한 그 욕심을 자꾸 부린단 말이요. 쉽게 말하면. 영적 면에 ‘아이고, 내가 밥은 먹고 살지만 영적 면에 가난하구나.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나님의 부요성을 원한다 그 말이요. 깨달음을 원한다 그 말이요.
천국 것에 대한 부자와 가난은 영원히 가는 성질이다. 이해됐어요? 하나님의 것으로 부자 된 것은 영원히 가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으로 가난성은 이것도 영원히 간다. 하나님의 것은 없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것이라야 영원히 가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이건 가난뱅이다 그 말이요.
예수님을 참 믿는 자는 참말로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기가 어느 면에서 더 가난인지 그 가난성을 안다 그 말이요.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예수 똑바로 믿는 사람은 자기가 어느 면에 더 가난한 건지 이거 똑바로 안다 그 말이요. 예수 믿으면서 그것도 판단 못 내리고 수 년 수십 년을 믿어도 그 모양이지. 어느 쪽 가난인지 자기의 행동이 나온다 말이요. 이제. ‘내가 이 면을 더 귀하게 여겨야 되겠구나. 이 면을 더 귀하게 여겨야 되겠구나’ 그게 나오지 않는가?
예수 믿으면서 가난하고 배가 고프면 주일날 까먹고 일터로 가는 거는 어느 면에 가난성을 느끼는 거요? 물질 면이 아닌가 그 말이요. 정신병자가 아니면 알 것이 아니냐 그 말이요. 사람이 살면서 예수 믿으면서 왜 생각을 못 해. 꼭 얻어맞고 저주를 받고 꼭 집안에 무슨 재앙이 터져야 그 때서야 ‘하나님’ 하고 부를 건가 그 말이요. 예수 잘 믿는 이치를 가르쳐줘도 왜 그렇게 사람이 교만해. 그런 교만으로 살아봐.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자는 다 좋아하고 가난한 것은 다 싫어합니다. 그렇지요? 맞지요? 이치가 틀렸으면 틀렸다고 그래요. 이치가 틀린 것은 복음이 아니니까. 복음 아닌 것은 들으면서 ‘아멘 아멘’은 잘도 하면서 이치 있는 말을 하면 듣기 싫어서.
자기의 참 가난이 어느 거냐? 영원히 가는 가난을 자기가 참 가난으로 느끼는지, 임시적으로 끝나는 가난을 이것을 참 가난으로 느끼는지? 자기의 참 가난을 알고 구한다면 구한다고 하는 거기에는 달라는 것이고, 그 달라함이 활동으로도 또 나타나게 돼있는 겁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그 입이 밥을 찾아가지 않아요. 활동이 나오게 돼있다 그 말이요.
자기의 참 가난을 알고 구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의 부자 천국의 것에 관해서 재산가가 될 가능성이 많구나. 하늘의 것으로 하늘의 것에 대한 재산이 많겠구나.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함은 천국의 것에 대한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지요. 어떤 가난한 자? 물질 가난한 자, 영원한 영의 것에 가난한 자? 그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더 잘 알지요? 사람은 잘 몰라도. ‘이 사람의 마음이 예수 믿어도 물질의 부를 자꾸 생각을 하는구나. 아, 이 사람은 남 보기에 예수로 가게 생겨도 이 사람은 천국에 대한 부요성을 간구를 하는구나’ 주님이 잘 아는 거지요. 그런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기쁜 소식은 이 하나님의 말씀뿐만이 아니고 다각적인 면에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걸 알아야 돼. 예수 믿게 한 것은 쉬운 얘기로 천국 것에 대해서 부자로 만들어줘야지. 이게 들어있단 말이요. 천국의 부자는 사람으로 돼있어요. 사람으로 들어가 있어. 사람 속으로 들어가 있어. 천국의 부자. 하나님처럼 돼있다 말이요. 그러니 자기 주위뿐만 아니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고 말하자면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땅에 편만하라 충만하라’ 하는 이것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거란 말이요. 그걸 알아야지?
사람이 돼먹지 못해놓고는 뭘 자꾸 달라고 그러면 줄줄 알아요? 예수 믿는 이치를 바로 알아야지. 집에 아이들 많으면 말 잘 듣는 아이에게는 뭐든지 자꾸 주고 싶습니까? 맞지요? 애 먹이고 싸우고 부모 것 슬슬 도둑질하는 그런 애에게는 부모가 주려고 그래요? 빼앗아 버리지. 하나님의 마음도 같아요. 이치적으로 말을 하자면. 사람이 안 된 사람에게 돈을 잔뜩 안겨줘 봐요. 그 돈 가지고 자기 죄짓고 남 죄짓게 만들고. 그 사람은 이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지. 죄만 지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치울 수밖에 없어. 그 사람을 이제. 사회적으로는 안 그런가? 직장적으로는 안 그래요? 가정적으로도 애만 먹이면 뭐라 그래요? 노골적으로 ‘너 나가서 죽어버려.’ 그런 저주의 말이 어디 있느냐 그 말이요. 왜 그렇게 살겠느냐 그 말이요. 왜 그렇게 사느냐? 그걸 아셔야 돼요.
솔직히 말해서 돈에다가 소원 목적적으로 예수 믿어도 그렇습니다. 돈에다가 욕심을 딱 품고 있는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늘어지는 이 사람이 결과적으로 성공이 들어가 있어요. 그걸 알아야 된다.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 놓치지 않는 그 사람은 성공이 들어가 있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살다가 그대로 죽는 거요. 죽어도 그건 값어치가 없어.
23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을 인해서 넘어질 자가 누굴까? 실족은 발은 헛디뎌서 넘어진다 그 말이지. 예수님 때문에 실족할 자가 누굴까?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되는데. 무슨 말이냐? 모든 병자 고쳐주고 죽은 자 살려주지, 누가 예수님 때문에 실족될 자가 있겠는가 그 말이요. 그 참 희한한 말이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넘어질 사람이 있다 그 말이지요? 맞잖아요?
그러니까 실족은 실수해서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주로 말을 하는 것인데 신앙 면으로 들어가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아가지고 마음이 상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말씀하는 거지요. 이게 지금. 예배시간에 가만히 보면 뭐 우리교회를 아주 그냥 자기 집처럼 정해놨으면 말썽을 일으키기 전에는 이게 잘 안 떨어지거든요? 근데 이제 오다 가다가 늦게 일어나서 자기 본 교회로 못 가서 하나님 앞에 인사는 해야 되겠고 해서 예배시간에 들어오는 그런 분들이 혹 있어요. 근데 이제 여기서는 재밌는 것이 별로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이게 딴 데하고 좀 뭔가 상당히 어렵고 딱딱한 느낌이 들고 뭐 이상한 느낌이 들거든요. ‘이단이 아닌가’ 하고 예배 보다가 휙 나가버리거든. 그 참 어디서 그런 버릇을 누가 그렇게 들려줬나? 어느 목사가 그렇게 들려줬나?
옳은 이치의 말씀은 자기가 듣기 싫어도 들어야 돼요. 맞잖아요? 자기 마음에 맞는 소리는 무슨 소리요? 노는 소리, 돈 버는 소리. 또 뭐요? 재밌는 옛날얘기. 대학생들에게 유치원 얘기해주면 어떻게 좋아해요? 유치원생들에게 대학공부를 이렇게 얘기하면 좋아해요? 전혀 다르지. 차원이 다른 세계인데. 교회가면 그저 뭐라고 떠들고 손뼉치고 그저 여기저기서 ‘아멘’ 하고 ‘주여’ 하면 좋은데 우리교회는 그렇게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기도할 때는 다 같이 아멘하고, 아멘 할 기도가 아니면 아멘하면 안 됩니다. 분명히 알아야 돼요.
자, 이제 예수님 때문에 말씀에 충격을 먹어가지고 떨어지는 자가 있다. 이거 참 이상하다. 그 왜 그럴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을 가지셨는데, 육적인 면에서 육신생활 면에서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자라 그 말이요. 말씀 한 마디로 만물을 창조를 하셨는데 만능의 능력자가 아니냐 그 말이요. 없는 가운데서도 그냥 있게 다 해버리고 있는 것도 싹 없애버릴 수 있는 만능의 능력자. 죽은 자를 살리면 만능의 능력자 아니요?
그 뭐요? 요술 마술하는데 난 아직도 모르겠어. 실질적으로 내가 안 봐서. 그냥 TV로 봐서 그런지 사람 딱 눕혀놓고 어떻게 이불홑청 같은 거 딱 씌워놓고 요렇게 요렇게 하니까 자꾸 뜨데요. 사람이. 동그란 걸 가지고 이렇게 끼워도 밑에서 들어 올린 거라면 털커덕 걸릴 거고, 위에서 줄을 잡아당긴다면 줄에 걸릴 텐데 그 어째 그래요? 그거. 이렇게 이렇게 해도 안 걸려. 그럼 어떻게 된 거냐? 원리가 어떻게 된 거요? 그 분명히 그냥 뜨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무슨 속임이 있는 거 같은데. 몰라요? 그냥 그거만 있는 거요? 참 이상하네. 나는 의문투성이던데. 참.
육신적인 생활면에서 자기를 안 도와준다든지 또는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았다든지 이를테면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것도 나쁜 소리를 한 게 아니고 주님보고 죽지마라고 그랬는데 ‘사단아, 물러가라’ 그랬으니 이게 얼마나 충격적이냐 그 말이요. 아마 여기서 우리교인들에게 충격적인 말을 하면 그 교인 안 나올 걸? 그러면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충격적인 말을 할 때는 ‘나 따라오지 마라’ 그 말입니까? 고쳐라 그 말이지요. 사고방식을 고쳐라. 하나님 쪽으로 고쳐라.
아무리 만능의 능력을 가졌다 해도 나를 안 도와준다면 다니실 필요가 없는 거지요? 주님이 아무리 만능의 능력을 가졌다 해도 육신생활에 나를 안 도와준다면 다니실 필요가 없는 거지요? 맞잖아요? 그래도 따라다니는 거요? 돈도 안 주고 쌀도 안 주고 부자도 안 만들어주는데? 혹시 교회 다니다가 살림 다 날리고 예수 믿으니까 이상하게 돈이 하루저녁 일어나면 어디로 가버리고 금은패물도 어디로 가버리고 이상하게 뭐 자꾸 이렇게 없어져서 가난뱅이가 되고 몸에 병들고 죽은 사람 몇이나 있습니까?
그런 말 혹 들어봤습니까? 금은패물 장롱 속에 다 넣어놨는데 교회 갔다 오니까 도선생이 싹 가져가 버렸어. 예수 믿으면 지켜줘야지. 근데 싹 가져가 버렸어. 그러니까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이 그거 모를까요? 모르느냐고요? 알지요. 그럼 안다고 했을 때 왜 가만 두느냐 그 말이지? 도선생이 훔쳐가도록 왜 가만히 두느냐 그 말이요. 마귀가 도선생을 보냈는데 하나님께서 그냥 가만 보고 계신 거지요? 그거 생각을 깊이 하면 자기의 그 생각을 고쳐야 됩니까? 어떻게 고칠까요? 어떻게 고쳐요? 그것도 몰라요? 스위스 은행에다 집어넣으면 되지. 그렇게 하라는 거지요? 예수님이 나의 실제생활에 안 도와주면, 그래서 보면 교회서들 ‘날 좀 도와주십시오. 부자 되게 해주면 하나님께 예배당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다’ 그런 기도 많이 하지요?
‘차라리 돈이나 벌고 살다가 죽든지 딴 데 가서 붙어서 재밌게 살든지 해야지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책망만 받으니 마음이 상해서 못 살겠다. 떠나가야지. 여기 아니면 없나? 바리새교인들에게나 가야지’ 하고 충격을 먹어 떨어질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 여기 무슨 어떤 사건 끝에 어떤 사람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 충격을 먹어가지고 떨어질 사람이 누구냐? 첫째,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이 지금 옥에 갇혀있는 거지요? 아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다.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아니다 예수 믿고 따르는 오늘날 모든 사람이다. 여기서 충격 먹어서 떨어질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얼른 얘기해 봐요. 얘기를 하고 점심을 먹어야 맛이 있지. 충격 먹은 사람이 누구요? 여기서? 각자 얘기해 봐요? 없어요?
‘누구든지’ 라고 하는 것은 다 들어있는 거요, 그 중에 하나요? 다 들어있습니까? 우리까지? 누구든지 실족될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실족되는 이 누군지에 속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영적 주격적인 개념으로 말씀을 하신 것인데 영적 면에 의도성을 두고 하신 말씀인데, 만일 어떤 사람들이 선악과 따먹었으면 그건 세상 쪽으로 내리게 돼요. 선악과 따먹은 육신적인 세상적인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사람은 전부는 실족된 사람들이다. 말씀의 의도성에서 이건 전부는 나가떨어졌다 그 말이요. 이해됩니까? 이해 안 됐어요? 아, 이거 다 실족 돼버렸구나. 허허허. 실족이 돼버렸어.
예수님께서 만능의 능력을 쓰시는 그 마음은 우리의 영인성장 면에 잘 되라고 눈으로 보이는 것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는 거란 말이요. 이게 참 이치적으로 말을 한다면, 성경대로 생각을 하세요. 육신적으로 오는 모든 잡병성은 마음으로부터. 외부로부터 오는 병도 있겠지만 자기 몸 안에서부터 마음병이 들어가지고 육신적으로 내뿜는 게 있어요. 이해가요? 마음 잘못 먹으면 육신적으로 바깥으로 솟아나는 게 있단 말이요. 그랬을 때에 사람이 마음과 정신부터 바로 잡아야 돼요. 이치가 그래요.
이제 실족되기 쉬운 처지에 놓인 사람은 누구며 예수님의 만능의 능력이 제일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예수님의 만능의 능력이 다 필요하지요? 필요 안 해요? 필요 안 하냐고요? 다 필요하지요. 근데 어느 면에서 필요한가? 그 면이 조금 이제 다른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만능의 능력을 나한테 요런 능력을 주셨으며 좋겠다.’ 아니면 ‘나한테 그 능력을 안 주시더라도 예수님의 당신의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나한테 요렇게 좀 써졌으면 좋겠다’ 그런 것도 있는 거거든요? 맞지요? 보나마다 병든 사람은 ‘예수님의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내 병 좀 고쳐주었으면 좋겠다.’ 맞잖아요? 가난한 사람은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든지 돈이 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뭐 그런 거라든지, 처녀들은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말 탄 왕자를 보내줬으면 좋겠다.’ 안 그래요? 솔직히 말해 봐요. 구체적으로 기도해 봐요. 허허허.
자, 예수님의 만능의 능력이 제일 필요한 사람? 이제 세례요한? 요한의 제자들?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 믿고 따르는 사람들? 자, 제일 필요한 사람? 이제 열거한 사람들 중에서 제일 필요한 사람이 누구지요? 열거한 사람들 중에서? 누군지 몰라요? 아이 참 점심생각만 하시는 모양인데? 허허. 세례요한입니다. 사건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이요. 선재적으로 계셨던 예수 당신이 세례요한을 6개월 먼저 보냈단 말이요. 6개월 먼저 와서 광야에서 자랐고, 제사장으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편안히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않고 광야에 나가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요단강 근방에서, 말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준비를 시키다가 헤롯왕에게 바른 말 하다가 고난을 이제 당하는 일이 생긴 거지요. 맞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한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만능의 능력으로 자기를 구해줄 것을 믿고 한 말이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맞는 말입니까? 맞는 말이요? 일반적으로는 그럴 법도 하다. 사장이 일꾼을 보내서 일을 시켰는데 그 일꾼이, 일반적으로 말이요. 그 일꾼이 그만 잡혀가버렸다 이랬을 때에 사장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하는 것처럼 꼭 이게 보면 그런 식으로 생각이 들어가기 쉽단 말이요. 그래서 그렇게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말이요. 근데 이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점심 먹고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말이요. 제 2편을 기대하시라. 점심 먹고 합시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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