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
[내가 내 힘으로]
(이사야 10:5-19)
1. 앗시리아 왕의 생각...
앗시리아 왕은 세계를 정복할 생각을 품었고
그 생각대로 실행에 옮겨서 전쟁을 시작했다.
세계 곳곳으로 가서 치른 정복전쟁들에서
앗시리아 군대는 승승장구했다.
그 때 앗시리아 왕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 10:13-14, 쉬운) [13] 앗시리아 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힘으로 이런 일들을 했다. 내 지혜와 모략으로 많은 나라를 무찔렀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고,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14] 새의 둥지에 손을 대듯, 내가 민족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어미새가 버린 알들을 모아들이듯, 내가 온 땅을 차지했다. 아무도 손을 들어 내게 대들지 못했고, 입을 열어 나를 비난하지 못했다.”
자신의 힘과 지혜와 모략으로
수많은 정복전쟁에서 승리를 얻었고,
엄청난 재산을 빼앗고 엄청난 숫자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왔고,
그래서 아무도 자신에게 대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복전쟁을 치르면서 대제국이 되었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해 보인다.
대제국의 왕이 되었으니 스스로도
자신의 힘과 지혜가 이토록 엄청나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2. 하나님의 평가
앗시리아 왕의 생각은 옳을까?
정당하고 온당한 생각일까?
앗시리아 왕이 자신의 힘과 지혜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대제국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평가하셨다.
(사 10:15, 쉬운) 도끼가 도끼를 휘두르는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없으며, 톱이 톱을 켜는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없는 법이다. 막대기가 어찌 막대기 든 사람을 잡을 수 있겠으며, 몽둥이가 어찌 몽둥이 든 사람을 들어 올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들어 범죄하고 타락한 나라들을 심판하셨고,
앗시리아는 심판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구인 도끼에 불과한 앗시리아가
도끼를 휘두르는 사람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힘과 지혜와 모략을 자랑한 것이다.
도끼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룬 것처럼 착각한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심판하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사 10:16, 쉬운)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앗시리아의 군인들에게 무서운 질병을 보내실 것이다. 앗시리아의 힘이 다 빠지게 되고, 모든 것이 없어질 때까지 타 버릴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들을 정복했다고 믿는
그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는
질병과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3. 내 힘으로 이룬 것들?
인생에서 무언가를 얻고 이룰 때가 있다.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공부를 탁월하게 잘 하기도 하고
자신이 진행한 프로젝트가 성공적인 성과를 내가도 한다.
게다가 자식들까지 훌륭하게 잘 자라고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서
부모로서 제법 자식을 잘 키운 것 같은 뿌듯함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때,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너무 잘 되었는데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자신이 사용한 힘과 노력과
온갖 지혜와 모략들이 효과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 같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명백한 오류다.
내가 내 힘과 지혜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생각은
자신의 오해요 착각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동안
무수한 우연들이 작용했는데
그 우연의 순간들을 기억한다면
자신의 힘 때문이라고 전혀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이 넘어져야 할 상황들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서
그 위기들을 넘어갔을 것이다.
자신의 지나온 여정을 정직하게 돌아볼수록
자신의 힘과 지혜나 모략 때문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믿지 않는 사람조차도 건전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성공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그 운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삶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모든 성공은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일이다.
모든 상황과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에서 교만이 없어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내가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생각만큼
사람에게 큰 교만이 없다.
그 교만은 반드시 그 사람을 망하게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이다.
4. 나는?
나는 성공을 거두었을까?
과거에 아주 작은 성공을 거둔 적이 있었다.
부산에서 학원 강사로 살아가다가
학원을 설립한 적이 있었다.
'자기주도학습'을 학생들에게 훈련시키는
나름 공부에 대한 신선한 철학을 가진
프랜차이즈 학원이었다.
그런 학원이 전혀 없을 때
부산에서 처음 시도한 학원이었는데,
학원의 가치관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아 학원을 세웠다.
처음 몇개월간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정원이 마감되기 시작했다.
그 작은 성공을 거두면서 내가 경험한 일은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여전히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기에
이 모든 성공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묵상 글과 말로는 고백하고 있었지만,
정작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가치를 알아본 나의 식견'과
'그 가치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든 나의 용기'와
'나름 인격적으로 직원들을 대한 나의 너그러움' 등이
작은 성공의 원인이라고 은근한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긍정적인 자부심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교만이었다.
나는 어느새 교만해졌고 마음이 느슨해졌고
사태를 너무 긍정적으로만 보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았다.
어려움이 찾아왔고
우여곡절 끝에 학원을 다른 분에게 넘겨주고
다시 강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사람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사실을
작은 성공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깊이 깨달은
귀한 경험이었다고 생각된다.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가 없어질 뻔한 어려움을 겪고
거의 기적과 같은 과정으로 교회가 다시 세워졌다.
행복하게 잘 가고 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6개월이나 현장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온라인으로만 예배하는 예배를 통해서
오히려 성도 몇 분이 등록을 하는 일도 생겼다.
이건 교회의 작은 성공, 목회의 작은 성공일까?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의 성공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고,
목회의 성공이라는 말도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세속적이어서
내가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개념을
그 속에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설교하는 '성도'로서
그리고 말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누리고 있을 뿐이다.
성도들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앙이 조금씩 자라가는 것을 보는 기쁨을
같은 성도로서 감사하며 누려갈 뿐이다.
교회의 성공? 목회의 성공?
나는 그런 것들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일반 신자였을 때
교회를 위해 성도들이 존재하는 듯 한
교회들의 행태 속에서 나도 너무 힘들었다.
목사의 '성공적인 목회'를 위해서
성도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부흥'시켰기 때문에,
그 부흥이 자신의 힘과 지혜 때문이라고,
은퇴할 때 지나친 보상까지 받아서 은퇴하는
너무나 악한 모습도 적나라하게 보고 들었다.
교회의 '성공'이나 목회의 '성공'이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다.
세상 사람 거의 모두가 바라는 성공을 향한 욕망을
방향만 바꾸어서 목회로, 교회 부흥으로 돌린 것이
교회의 성공이라 목회의 성공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도와 손에 달렸음을 믿는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단순한 도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서
겸손히 바르게 잘 사용되기만 소망한다.
목회적 비전, 꿈 따위가 나는 없다.
비전, 꿈이라고 말할 만한 것들이 있다면
모두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목회가 끝나는 날까지 타락하지 않는 것,
나의 삶의 끝날까지 예수 바르게 잘 믿는 것,
말씀의 사람이 되길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등이다.
나 자신이 아닌, 목회나 교회에 대한 비전이나 꿈이라면
'말씀에 삶을 거는 사람 10명 세우는 것'이다.
이것들도 내가 나의 힘으로 이루려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말씀에 삶을 걸고
가능하면 행복하게 살아가려 한다.
그리고 성도들도 오직 말씀에만 삶을 걸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바랄 뿐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맡긴다.
나는 전혀 능하지 못하고 어설프고 비루하기 때문에,
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나의 힘이 아니라 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나의 삶과 나의 목회적 운명을 다 맡기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단순하고 담담하게
말씀 앞에 선다.
말씀으로 인하여 행복을 누리는 이 아침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다.
(이사야 10:5-19)
1. 앗시리아 왕의 생각...
앗시리아 왕은 세계를 정복할 생각을 품었고
그 생각대로 실행에 옮겨서 전쟁을 시작했다.
세계 곳곳으로 가서 치른 정복전쟁들에서
앗시리아 군대는 승승장구했다.
그 때 앗시리아 왕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 10:13-14, 쉬운) [13] 앗시리아 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힘으로 이런 일들을 했다. 내 지혜와 모략으로 많은 나라를 무찔렀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고,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14] 새의 둥지에 손을 대듯, 내가 민족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어미새가 버린 알들을 모아들이듯, 내가 온 땅을 차지했다. 아무도 손을 들어 내게 대들지 못했고, 입을 열어 나를 비난하지 못했다.”
자신의 힘과 지혜와 모략으로
수많은 정복전쟁에서 승리를 얻었고,
엄청난 재산을 빼앗고 엄청난 숫자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왔고,
그래서 아무도 자신에게 대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복전쟁을 치르면서 대제국이 되었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해 보인다.
대제국의 왕이 되었으니 스스로도
자신의 힘과 지혜가 이토록 엄청나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2. 하나님의 평가
앗시리아 왕의 생각은 옳을까?
정당하고 온당한 생각일까?
앗시리아 왕이 자신의 힘과 지혜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대제국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평가하셨다.
(사 10:15, 쉬운) 도끼가 도끼를 휘두르는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없으며, 톱이 톱을 켜는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없는 법이다. 막대기가 어찌 막대기 든 사람을 잡을 수 있겠으며, 몽둥이가 어찌 몽둥이 든 사람을 들어 올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들어 범죄하고 타락한 나라들을 심판하셨고,
앗시리아는 심판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구인 도끼에 불과한 앗시리아가
도끼를 휘두르는 사람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힘과 지혜와 모략을 자랑한 것이다.
도끼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룬 것처럼 착각한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심판하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사 10:16, 쉬운)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앗시리아의 군인들에게 무서운 질병을 보내실 것이다. 앗시리아의 힘이 다 빠지게 되고, 모든 것이 없어질 때까지 타 버릴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들을 정복했다고 믿는
그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는
질병과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3. 내 힘으로 이룬 것들?
인생에서 무언가를 얻고 이룰 때가 있다.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공부를 탁월하게 잘 하기도 하고
자신이 진행한 프로젝트가 성공적인 성과를 내가도 한다.
게다가 자식들까지 훌륭하게 잘 자라고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서
부모로서 제법 자식을 잘 키운 것 같은 뿌듯함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때,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너무 잘 되었는데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자신이 사용한 힘과 노력과
온갖 지혜와 모략들이 효과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 같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명백한 오류다.
내가 내 힘과 지혜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생각은
자신의 오해요 착각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동안
무수한 우연들이 작용했는데
그 우연의 순간들을 기억한다면
자신의 힘 때문이라고 전혀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이 넘어져야 할 상황들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서
그 위기들을 넘어갔을 것이다.
자신의 지나온 여정을 정직하게 돌아볼수록
자신의 힘과 지혜나 모략 때문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믿지 않는 사람조차도 건전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성공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그 운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삶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모든 성공은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일이다.
모든 상황과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에서 교만이 없어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내가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생각만큼
사람에게 큰 교만이 없다.
그 교만은 반드시 그 사람을 망하게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이다.
4. 나는?
나는 성공을 거두었을까?
과거에 아주 작은 성공을 거둔 적이 있었다.
부산에서 학원 강사로 살아가다가
학원을 설립한 적이 있었다.
'자기주도학습'을 학생들에게 훈련시키는
나름 공부에 대한 신선한 철학을 가진
프랜차이즈 학원이었다.
그런 학원이 전혀 없을 때
부산에서 처음 시도한 학원이었는데,
학원의 가치관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아 학원을 세웠다.
처음 몇개월간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정원이 마감되기 시작했다.
그 작은 성공을 거두면서 내가 경험한 일은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여전히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기에
이 모든 성공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묵상 글과 말로는 고백하고 있었지만,
정작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가치를 알아본 나의 식견'과
'그 가치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든 나의 용기'와
'나름 인격적으로 직원들을 대한 나의 너그러움' 등이
작은 성공의 원인이라고 은근한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긍정적인 자부심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교만이었다.
나는 어느새 교만해졌고 마음이 느슨해졌고
사태를 너무 긍정적으로만 보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았다.
어려움이 찾아왔고
우여곡절 끝에 학원을 다른 분에게 넘겨주고
다시 강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사람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사실을
작은 성공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깊이 깨달은
귀한 경험이었다고 생각된다.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가 없어질 뻔한 어려움을 겪고
거의 기적과 같은 과정으로 교회가 다시 세워졌다.
행복하게 잘 가고 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6개월이나 현장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온라인으로만 예배하는 예배를 통해서
오히려 성도 몇 분이 등록을 하는 일도 생겼다.
이건 교회의 작은 성공, 목회의 작은 성공일까?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의 성공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고,
목회의 성공이라는 말도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세속적이어서
내가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개념을
그 속에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설교하는 '성도'로서
그리고 말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누리고 있을 뿐이다.
성도들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앙이 조금씩 자라가는 것을 보는 기쁨을
같은 성도로서 감사하며 누려갈 뿐이다.
교회의 성공? 목회의 성공?
나는 그런 것들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일반 신자였을 때
교회를 위해 성도들이 존재하는 듯 한
교회들의 행태 속에서 나도 너무 힘들었다.
목사의 '성공적인 목회'를 위해서
성도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부흥'시켰기 때문에,
그 부흥이 자신의 힘과 지혜 때문이라고,
은퇴할 때 지나친 보상까지 받아서 은퇴하는
너무나 악한 모습도 적나라하게 보고 들었다.
교회의 '성공'이나 목회의 '성공'이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다.
세상 사람 거의 모두가 바라는 성공을 향한 욕망을
방향만 바꾸어서 목회로, 교회 부흥으로 돌린 것이
교회의 성공이라 목회의 성공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도와 손에 달렸음을 믿는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단순한 도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서
겸손히 바르게 잘 사용되기만 소망한다.
목회적 비전, 꿈 따위가 나는 없다.
비전, 꿈이라고 말할 만한 것들이 있다면
모두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목회가 끝나는 날까지 타락하지 않는 것,
나의 삶의 끝날까지 예수 바르게 잘 믿는 것,
말씀의 사람이 되길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등이다.
나 자신이 아닌, 목회나 교회에 대한 비전이나 꿈이라면
'말씀에 삶을 거는 사람 10명 세우는 것'이다.
이것들도 내가 나의 힘으로 이루려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말씀에 삶을 걸고
가능하면 행복하게 살아가려 한다.
그리고 성도들도 오직 말씀에만 삶을 걸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바랄 뿐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맡긴다.
나는 전혀 능하지 못하고 어설프고 비루하기 때문에,
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나의 힘이 아니라 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나의 삶과 나의 목회적 운명을 다 맡기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단순하고 담담하게
말씀 앞에 선다.
말씀으로 인하여 행복을 누리는 이 아침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다.
윤용 목사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