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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가 되려 하지 말라]
(이사야 24:14-23)
1. 남은 자들
심판을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
살아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기뻐 외칠 것이고
주님의 크신 위엄을 말할 것이다.
(사 24:14-15, 새번역) [14] 살아 남은 사람들은 소리를 높이고, 기뻐서 외칠 것이다. 서쪽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의 크신 위엄을 말하고, [15] 동쪽에서는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바다의 모든 섬에서는 사람들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
'의로우신 분께 영광을 돌리세!'
라고 외치며 찬양하는 소리도 들릴 것이다.(16절)
살아 남은 사람들로서는 당연하고 마땅한 반응이겠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제다.
'남은 자'는 모든 멸망 후에 살아 남아
주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그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모습이다.
2. 예상을 뒤엎는 모습
(사 24:16, 새번역)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 "의로우신 분께 영광을 돌리세!" 하는 찬양을 우리가 들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나는 절망에 사로잡혔다. 이런 변이 있나! 이런 변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에게 재앙이 닥쳤구나! 약탈자들이 약탈한다. 약탈자들이 마구 약탈한다.
"의로우신 분께 영광을 돌리세!"라고
노래하는 '살아 남은 자'들에게
재앙이 닥치고 약탈자들이 약탈하고
함정에 빠지고 올가미에 빠지는 일이 발생한다.
'남은 자 사상'이 선지서 곳곳에 나타나는 중요한 사상인데,
남은 자는 새로운 세상을 이루어
다윗의 영원한 언약을 이루며 살아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살아 남은 자들에게 또 이런 재앙이 닥치는 것일까?
3. '남은 자'에 대한 오해
'남은 자 사상'에 있어서
'남은 자'가 누구일까는 매우 중요하다.
누가 남은 자일까?
선지서 곳곳에서 말하는 '남은 자'는
그냥 우연히 '살아 남은 사람들'을 뜻하지 않는다.
온 세상이 다 멸망하는 중에
우연히 살아남아서 그 우연이 너무 신기하고 기뻐서
하나님을 목청껏 찬양한다 해도
그들에게는 곧 새로운 심판이 닥칠 것이다.
'남은 자'는 '살아 남은 자'가 아니다.
온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노래하는 사람도 아니다.
남은 자와 '살아 남은 자'는 엄연히 다르다.
우연히 살아 남거나
결과적으로 살아 남는 자들이 아니라면
누가 '남은 자'일까?
4. '남은 자'란?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는 누구일까?
힌트가 나온다.
(사 24:20, 새번역) 땅이 술 취한 자처럼 몹시 비틀거린다. 폭풍 속의 오두막처럼 흔들린다. 세상은 자기가 지은 죄의 무게에 짓눌릴 것이니,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땅도 술취한 자처럼 비틀거릴 것이다.
'남은 자'는 없다.
죄에 무게에 짓눌려 모든 사람이 멸망할 때,
우연히 살아 남아 보아도 그건 '남은 자'가 아니다.
우연히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다시 더 심판 멸망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은 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써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건 참으로 뻘짓에 불과하다.
그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사 24:23, 새번역) 만군의 주님께서 왕이 되실 터이니, 달은 볼 낯이 없어 하고, 해는 부끄러워할 것이다. 주님께서 시온 산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다스릴 것이며, 장로들은 그 영광을 볼 것이다.
신자는 그저 하나님의 만군의 주님이시요 만왕의 왕이심을,
그래서 시온 산에서 예루살렘을 다스리심을 알아야 한다.
그의 영광을 보고 경험하고 누려야 한다.
자신의 죄에 짓눌린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심판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래서 자신의 죄에 짓눌린 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면
그는 세상이 망할 때 함께 망할 것이다.
스스로 노력해서 될 수 있는 '남은 자'란 없다.
온 세상이 죄에 짓눌려 살아가다 멸망할 때,
신자는 자신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멸망할 존재임을,
결코 참된 신자일 수 없음을,
더더욱 '남은 자'는 될 수 없음을 온전히 알고 깨달아
그저 주님의 왕되심 앞에 엎드려
주의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참 신자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박하게 노래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감히 그 영광을 입으로 말하기도 두려워
고개 숙이고 주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신자의 참 모습이다.
그렇게 주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을
주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모든 심판 가운데에서 긍휼을 베푸셔서
남겨주실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되려고 애써서는,
'남은 자'가 무엇인지 열심히 연구해서
기필코 '남은 자'가 되려 해서는
결코 '남은 자'가 될 수 없다.
'남은 자'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죄에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절망하여
그저 주의 긍휼을 구하며 엎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이 남겨 주셔야 '남은 자'가 된다.
5. 나는?
기독교가 타락했고
대형교회가 타락했고
대형교회 목사들이 타락했다고 말하면
득달같이 싸우자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다.
'너만 잘났냐?'
'왜 목사가 목사 욕을 하느냐?'
'왜 목사가 교회 욕을 하느냐?'
등의 말들을 참으로 예의 없이 남긴다.
기독교가, 목사가, 대형교회가 타락했다고 말하는 것은
나만 잘났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내가 섬기는 교회만 좋은 교회라고 말하는 것도 전혀 아니고,
나와 우리 교회가 '남은 자'가 될 것이라는 말도 전혀 아니다.
그들의 타락을 분별하지 못하고서는
나도 그들의 타락을 본받아서 닮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나도, 내가 섬기는 교회도
함께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할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에
나는 기독교의 타락을, 대형교회들의 타락을,
목사들의 타락을 말하고 또 말한다.
그럼 내가 섬기는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라서 안전하고
나는 다른 목사와 달라서 안전할까?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나도 죄에 짓눌려 살았던 죄인이고
지금도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아니고
앞으로도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안다.
그래서 '남은 자'라는 단어가 감히 나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또는 내가 섬기는 교회에 해당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의 죄인 됨을 잘 알기에
주의 긍휼을 구할 뿐이다.
내가 섬기는 교회로 모인 성도들도
나와 똑같은 죄인들임을 알기에,
그저 함께 주의 긍휼을 구하자고 말할 뿐이다.
주의 긍휼을 구하지 않아서 교만하고 타락하고
재정 비리와 성적인 타락과 온갖 모습의 타락에 빠진
목사들과 교회들처럼 되지는 말자고 말할 뿐이다.
그 모든 것을 위해 말씀에 삶을 걸고 살아가자고 말할 뿐인데,
말씀에 삶을 건다는 것은,
말씀을 매일 묵상하면서
말씀이 비춰주는 자신의 죄인의 모습을 매일 새롭게 발견하고,
그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임을 깨닫고
주의 긍휼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남은 자'가 되자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종교적인 오류는 범하게 되어서
또 다른 교만한 사람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남은 자는 스스로 될 수 없으니,
남은 자가 되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헛된 교만으로 빠져드는 삶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무언가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심지어는 '남은 자'가 될 생각도 버리고,
말씀에 삶을 걸고 매일을 살아가는,
말씀을 통해 깨닫고 발견하는 자신의 죄인됨을 부둥켜 안고,
오직 주의 긍휼을 구하며 겸손히 살아가는
나와 성도들의 매일의 삶이 되기만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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