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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이사야 28:1-13)
1. 술 취하여 교만함...
(사 28:1, 새번역) 술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인 너 사마리아야,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술에 빠진 주정꾼의 도성, 기름진 평야의 높은 언덕에, 화려한 왕관처럼 우뚝 솟은 사마리아야, 시들어 가는 꽃 같은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에브라임' 또는 '사마리아'는 모두 북 이스라엘을 말한다.
정결하고 겸손하게 살아가야 할 그들이 교만했다.
그 이유는 '술 취해서'였다.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술,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술,
탐욕과 욕망대로 살겠다는 술에 마음껏 취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껏 교만해졌다.
그 결과는 재앙을 만나는 것이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그렇다 치고, 남 왕국 유다는 어떨까?
(사 28:7, 새번역) 유다 사람이 포도주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린다. 제사장과 예언자가 독한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포도주 항아리에 빠졌다.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리니, 환상을 제대로 못 보며, 판결을 올바로 하지 못한다.
다윗 왕국을 이어받았다는 유다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도 독한 술에 취해서 비틀거렸다.
세상의 가치관, 욕망과 탐욕, 성공이라는 술에
마음껏 취해 버린 유다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2.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독한 술에 취한 유다의 모습에서
중요한 표현이 등장한다.
(사 28:9-10, 새번역) [9] 제사장들이 나에게 빈정거린다. "저 자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가? 저 자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젖뗀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젖을 먹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10] 저 자는 우리에게, <한 자 한 자, 한 절 한 절, 한 장 한 장 가르치려고 한다.">
이 본문에서 '한 자 한 자, 한 절, 한 절, 한 장, 한 장 가르치려고 한다.'
라는 구절은 히브리어로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이다.
이 히브리어는 뜻이 불확실하다.
예언자의 말을 흉내내는 뜻없는 소리일 수도 있고,
개역개적에서 번역한 것처럼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또는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등의 뜻일 수도 있다.
새번역에서 번역한 것처럼 '한 자 한 자, 한 절 한 절,
한 장 한 장 가르치려고 한다.'라는 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 자체가 한 단어가 가진 의미가
워낙 여러가지라서 정확한 뜻을 알기가 어려운 구절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자체가 가지는 어감으로 볼 때,
자칭 율법 전문가인 제사장들이 볼 때 이사야의 선포는
어린 아이들에게 알파벳이나 가르치기에 적당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언제나 비슷비슷한 소리로,
때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저렇게 말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즉 어린 아이에게 알파벳 가르치는 소리 좀 그만하라는 조롱이다.
이사야의 고발과 그가 선포한 심판의 예언은
거듭 반복해서 선포했기 때문에,
게다가 심판만 줄기차게 외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구원의 말씀도 선포했기 때문에,
제사장들의 조롱이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영적인 눈을 뜨고 있는 제사장이었다면
반복적 선포가 그들의 교만과 완악함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이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반증해주는 것임을 알아야 했다.
3. 조롱의 결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이사야의 예언을 조롱한 결과는 무엇일까?
(사 28:11,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씨와 다른 나라 말로 이 백성을 가르치실 것이다.
예언자의 선포를 웅얼거리는 소리로 듣는
유다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이제
'알아듣지 못할 말씨와 다른 나라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즉 포로로 잡혀가서 알아듣지 못할 말,
다른 나라 말을 듣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조롱하는 그 말 그대로가
그들에게 심판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안식의 길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선포를
옹알이 정도로 취급한 자들은,
포로됨의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떠드는
낯선 정복자들의 소리를 듣는 괴로움을
심판으로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하지 않는다면,
말씀을 들을 기회마저 없어지는 시련의 때가 올 것이다.
제사장의 조롱의 소리에 공감하고 동참할 것인지,
이사야의 경고와 심판의 소리에 반응할 것인지를
유다 백성들은 선택해야 했다.
4. 이 시대는?
'기독교'라는 이름 안에 포함된
완전히 상반된 목사와 교회들이 존재하는 시대다.
기독교 라는 이름 안에 있으면서
온갖 패악질과 몰상식한 짓을
마음껏 일삼는 자들이 있다.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짓을
마구 저지르면서 온갖 거짓말을 다 하고 다닌다.
코로나를 재확산시키는데
그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몰상식의 대명사 전광훈이 목회하는 사랑제일교회와
타락한 기복주의와 은사주의에 몰두하는
소에스더가 목회하는 우리제일교회가 그 대표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린아이의 옹알이처럼 취급하고
마음대로 모이고 마스크 제대로 착용하지 않고
공동식사도 마음껏 해서
수 백명의 확진자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집회를 광화문에서 열어서
수많은 사람이 모이게 해서
코로나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할까 염려하도록 만들었다.
반면에 방역수칙을 잘 지키고
이런 목사와 교회들을 비판하는 신자와 목사들도 있다.
그리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올바른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와 목사들도 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미 잘못된 길을 선택해서
몰상식한 신앙의 삶에 깊이 빠진 사람들도 많겠지만,
돌이킬 기회가 아직은 있다.
상식적이고 성경적인 가치관을 전하는
올바른 메시지를 옹알이로 취급해 버리고,
조롱하는 말을 마음대로 남발하면서
그것을 설교라고 하는 자들의 말에 넘어가
욕망과 탐욕을 붙들고 살아가다가
결국 하나님의 처절한 심판을 자초할 것인지,
상식적이고 올바른 말을
바르게 전하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돌이켜 새롭게 신앙의 삶을 시작할 것인지를
기독교 신자라면 이제 선택해야 한다.
코로나를 교회들이 확산시키는 지금의 모습을 보며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완전히 무시당할 것이 예상된다.
이것 자체가 타락한 기독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닐까 싶어서 두려운 마음이다.
세상의 술에 취해 교만하여 조롱하는 말을 마음껏 내뱉고
세상적인 유치한 복을 구하는 탐욕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패역함에서
이제라도 돌이켜야 그나마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다.
5. 작은 희망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사야의 내용 중에서
다소 뜬금없는 한 구절이 중간에 끼어 있다.
(사 28:5-6, 새번역) [5] 그 날이 오면, 만군의 주님께서 친히 주님의 남은 백성에게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시며, 영화로운 왕관이 되실 것이다. [6] 주님께서는 재판관이 된 사람들에게 공평의 영을 주시고, 용사들에게는 성읍 문으로 쳐들어온 적을 막는 용기를 주실 것이다.
앞뒤의 어느 구절들과도 어울리지 않는,
문맥과 연결이 잘 되지 않는
뜬금없는 구절이다.
북이스엘도 술에 취해 교만하고,
유다도 독주에 취해 예언자의 예언을 조롱하는데,
갑자기 그 날이 오면 아름답게 회복될 것을 예언하였다.
왜 이런 예언을 문맥에 맞지도 않게 한 것일까?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예언을 하니
제사장들에게 옹알이같은 예언이라고 놀림을 당한 것인데,
그런 조롱을 알면서도 이사야는 왜 이렇게 예언한 것일까?
이사야의 마음에 작은 희망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희망이지만 사실은 큰 희망이어서
이사야는 이 희망을 붙들고
모든 조롱을 견디면서 계속 예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은 희망은 언제나 '남은 자'들에게 있다.
절대 다수가 타락하고 술에 취해 교만하여
정신이 비틀거리며 바른 시각을 다 잃어 버린 시대라도,
하나님 나라의 희망은 언제나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무리에게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작지만 큰 희망이 된다.
6. 나는?
속이 뒤집어진다.
무례한 자들이 목사가 되고
술취한 듯 교만하여 헛소리들을 하면서
욕망과 탐욕을 부추기며 교회를 키워가는 것을 보면서,
결국은 엄청난 숫자의 코로나 확진자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을 보면서 정말 화가 난다.
방역수칙을 잘 지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현장 예배 없이 온라인예배만
계속 드려온 우리 교회로서는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런데 조금 냉정하게 현실을 본다.
언제는 그러지 않았나?
언제는 교회와 목사들이 무례하지 않았나?
그러지 않은 적이 사실 거의 없었다.
심방 한 번에 수천만원을 받는다는
전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교회의 목사,
교단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기이코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고야 만 대형교회의 목사,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다른 교회 세워서
여전히 목회하는 목사,
재정비리를 저지르고도 문제 없이 정년을 다 채우고 은퇴하고서
다시 교회를 개척한다는 목사 등,
전광훈과 소에스더 뿐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많은 목사들이 이미 술취한 듯
범죄하고 악을 행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이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안타깝게도 눈에 명백히 보이는 이런 죄와 악들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행해
'너는 잘 났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더 악한 것이다.
기독교와 목사는 스스로 비판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자정'의 능력은 없애지 말아야
조금의 희망이라도 남게 되는 것인데,
그런 비판에 대해서 '너만 잘났냐?'라고 반응하면
기독교 전체가 다 함께 망하고 죽자는 말이다.
그런데 비판하면서 조심해야 한다.
비판하는 사람이 틀리지 않았음은
비판하는 자체로 증명되지 않는다.
비판은 비판대로 하되,
자신의 신앙의 길을 바르게 걷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목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나는 '설교'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설교가 중요하긴 하지만,
목사 스스로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매일 맺는 것,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묵상하는
매일의 시간을 갖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패역한 소리들에 속아 넘어가는 것일까?
스스로 말씀을 읽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을 하지 않고
그저 목사 말은 무조건 옳다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
매일 말씀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말씀의 인도는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로서, 아니 한 사람의 신자로서
말씀이 주는 힘을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동일하게 감사한 것은
신자로서 성도 한 분 한 분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가고 계시는 것을 보는 것이다.
성도 한 분의 묵상을 읽으면서 참 기뻤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에서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다음의 내용은 그 묵상글의 일부다.
"자녀들을 내 맘대로 통제 하려니 수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런데 요즘은 엄마가 많이 변했다는 말을 듣는다.
남편을 늘 답답해 했었는데
돌이켜보니 내 욕심이 컸던거지
남편은 더 할수 없이 좋은 사람이다.
내게 과분한 사람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너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임을 먼저 보게되고,
내가 변하는 것이 네가 변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묶이지 않게 되었고
혹 묶이더라도 그 시간이 짧아진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점점 마음이 넓어지는 것 같고, 그렇게 천국을 누린다."
이런 소소하지만 본질적인 변화를
말씀 안에서 누려가는 것이
신자가 누려가야 할 작은 희망이 아닐까 싶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듯 보이고
교회와 목사와 신자들은 술 취한 듯 보이는
이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말씀으로 인하여 작지만 큰 희망을 가지고
착잡한 마음을 극복한다.
현장예배를 드리려고 하다가
교회들이 쏟아내는 확진자로 인하여
온라인 예배로 급하게 전환한 주일이지만,
오직 말씀 하나로 세워져가는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서
작은 위로를 얻는다.
시대는 언제나 아프고 슬펐다.
지금의 상황이 좀 심각하긴 하지만
신자로서 또는 목사로서 말씀 안에 거하기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성도들도 말씀의 사람 되길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이 슬픈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도
근원적인 행복을 누려갈 수 있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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