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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박해인가!
1.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의 생명이다. 그 사랑에는 배고픈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를 마시우고 외로운 자를 찾아가고 추운 자를 입혀주고 아픈 자를 돌보는 행위들이 있다. 기독교의 생존은 이런 사랑에 의존한다. 기독교의 숨통을 위협하는 것은 행정적인 명령이 아니라 교회의 사랑 없음이다.
2. 지금 교회는 바이러스 확산의 주범이다. 특정인과 특정교회 끊어내기, 비판하기 신공을 발휘해도 여전히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발생된 국가의 막대한 행정력과 국민의 위기감과 실질적인 피해에 대해 교회는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해야 한다. 나 같은 소인이 사죄해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싶지만, 동포 앞에 사죄한다.
...3. 자연재해, 전염병, 바이러스 같은 흉물들은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약하고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자라면 누구든지 올라타서 짓밟고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야비한 양아치와 같다. 이러한 양아치가 활개를 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야고보가 밝힌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이런 경건이 요청된다.
4. 국가는 이런 양아치를 퇴치하기 위해 국민이 허락한 공권력을 적법하게 행사해야 한다. 다른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코로나 확진자가 나온 교회의 대면예배 금지령은 교회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정상적인 기능이다. 이것을 교회에 대한 핍박 혹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위헌적인 행정으로 보는 것은 터무니 없는 해석이다.
5.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이해한다. 식민지와 전쟁의 아픔이 아득해진 한국에서 기독교는 너무 편안하고 풍요롭다. 그래서 핍박의 개념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만 보더라도 핍박의 시대에는 순교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 발목까지 차올랐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짐승의 밥이 되고 톱으로 잘리고 불태움을 당하고 사지가 찢기고 온 가족이 생매장을 당하는 시대였다.
6. 그때에는 비록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도 복음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보다 더 고귀했다. 사망은 나에게 역사하고 이를 통하여 생명은 이웃에게 역사하는 십자가의 길을 당연한 인생으로 여기며 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는 생명이 역사하고 이득과 권력과 명예가 역사하고 세상에는 사망이 역사하길 교회가 소원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성찰해야 한다.
7. 교회가 덩치를 키우고 건물을 올리고 당회장 자리를 세습하고 정계와 재계의 거물급 인사들과 겸상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설교와 기도에 곰팡이가 피어도 세속의 온갖 쾌락용 취미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고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 사안에 논쟁의 핏대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발전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학자놀이, 총수놀이, 회장놀이, 대표놀이 속에 빠진 목회자들! 지금 우리는 세상의 티가 아니라 교회의 무수한 들보들을 제거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8.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처절한 멸망도, 예루살렘 성전의 철저한 파괴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으신다. 지금 교회가 처한 상황은 주님께서 선을 이루시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 의사도 표시하지 못하는 멸망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파괴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상황이다.
9.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진리의 선포로 1,500세가 넘은 유대인의 안식일 전통을 심하게 흔드셨다. 주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적인 예배이며 주일성수 개념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그분 아는 것을 더 원하신다.
10. 코로나 사태를 전 세계에서 가장 잘 관리하고 감염도 무료로 치료하고 생활비도 지원하는 대한민국, 나는 정말 자랑스럽고 미안하다. 방역수칙,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중하고 준수하자. 신학도 없고 사랑도 없는 비루한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의 향기를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풍기는 기독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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