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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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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벽쪽으로
(이사야 38장)
1. 절망적인 선고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이 사건은
36-37장의 사건보다 앞선 사건이다.
병에 걸린 히스기야에게 이사야가 찾아와서
히스기야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절망적인 선언이었다.
앗수르에게 나라가 망할지도 모를 정도로
두렵고 혼란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상황인데,
자신의 목숨마저 끝나게 되었으니
히스기야의 마음은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오늘날만큼 절망적인 때가 또 있었을까?
코로나 19라는 조용하고 무서운 바이러스가
이 나라 뿐 아니라 온 세상을 뒤덮고 있고,
수많은 사람이 병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이단인 신천지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주범인가 싶었더니,
도리어 목사도 아닌 목사라는 자가 중심이 된
기독교인이라는 자들이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바이러스 때문에 당분간 대면예배를 금해 달라는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다.
윗 권세에 복종하라는 성경말씀까지 인용하면서
독재시대에는 정부에게 잘도 복종하더니,
이런 위중한 때에 정부의 정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지독한 이기심의 발로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사회가 위기에 처했고,
기독교는 이기적인 종교,
혐오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 동안 이보다 더 절망적인 때는 없지 싶다.
2. 무엇을 해야 할까?
이렇게 절망적일 때 히스기야는 무엇을 했을까?
(사 38:2-3, 새번역) [2] 이 말을 듣고서 히스기야는, 그의 얼굴을 벽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여, [3]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 빕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온 것과,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과, 주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 한 것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히스기야는 한참 동안 흐느껴 울었다.
그의 얼굴을 벽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런데 기도 내용은 조금 뻔뻔해 보인다.
과거 이집트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배반했던 적이 있었건만,
그 말을 하지 않고, 그 이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옳게 행했던 것에 대해
하나님이 봐주시고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다.
뻔뻔했지만, 뻔뻔함만은 아니었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간 시간들이 있기에,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자랑할 건 아니지만,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할 수는 있는 내용이었다.
히스기야는 얼굴을 앗시리아나 백성들이나 이사야에게로 향하지 않고,
외부의 어떤 것도 볼 수 없도록 벽을 향했다.
가장 절망적일 때에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의 어떤 것이나 의지할 다른 것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향한 시선을 차단하고
오직 하나님만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이 무서운 상황에 대해서
끊임없이 뉴스를 쳐다 보고
폰으로 계속 날아오는 안전문자를 보며 걱정해 본들,
그리고 확진자가 발생시킨 부주의함에 대해서 원망해 본들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다.
처음에 코로나를 전파한 신천지를 비난할 수도 있겠고,
광화문에서 코로나를 퍼트리고
심지어 코로나 검사 자체를 거부하는 패역한 자들을 욕할 수도 있겠고,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목사들과 교회들을 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건 그저 감정 해소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을 해도 괜찮지만,
그 모든 것들보도 최우선적으로 한 가지를 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을 하는 것이 쓸데 없는 짓들이 되고 만다.
그 한 가지는 '얼굴을 벽쪽으로 향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진짜 벽을 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향한 시선을 잠시 차단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하루에 1시간 이상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장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지 않고서
뉴스를 아무리 많이 보고
패역하고 악한 자들을 아무리 원망해본들
그것이 나와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참된 생명의 길은 뉴스에서 찾을 수 없고,
안전문자에서도 찾을 수 없다.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욕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뉴스도 봐야 하고 안전문자의 내용도 숙지해야 하고,
패역하고 악한 놈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욕도 해야 하지만,
신자라면 그 모든 것 이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모든 것을 차단하고 벽쪽을 향하는 것'
즉 '모든 것을 차단하고 오직 말씀을 펼쳐서 하나님과만 교제하는 시간'을 꼭 갖는 것이다.
3. 결과
히스기야가 절망의 순간에 얼굴을 벽쪽으로 향하고
통곡하고 날이 샐 때까지 구슬피 울며 기도한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사 38:4-6, 새번역) [4] 그 때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5] "너는 되돌아가서, 히스기야에게 일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6]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고,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목숨이 15년 연장되었고,
나라가 앗시리아에게서 구원받는 것이었다.
분명 아무런 해결책이 없을 것 같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저 벽을 향했고 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무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 같았던 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셨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왜 벽을 향하고 기도해야 할까?
왜 다른 곳을 향한 모든 시선을 차단하고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왜 이런 혼란 가운데에서 말씀을 펼쳐 읽고 묵상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목숨도, 적군의 침입도,
코로나 19도, 타락한 목사와 교회들의 문제도
나의 힘으로는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일하셔야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몇 백 명이 코로나 확진자가 되는 이 상황에서,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대면예배를 금지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주일인 오늘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이 땅 곳곳에 있을 이런 절망적인 기독교의 상황에서,
신자인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 모든 쪽을 향하는 시선을 잠시 차단하고
말씀을 펼쳐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의 긍휼을 구하며 주의 뜻을 구하는 시간을 매일 갖는 것이리라.
4. 나는?
분통이 터지고 울분이 쌓인다.
광화문 집회를 강행해서 바이러스를 퍼트린 자들과
같은 종교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그 이후에 대면예배를 금지해 달라는 정부의 방침에
반기를 들고 대면예배를 강행하려는 자들과 같은 종교인이라는 사실이 절망스럽다.
그들이 보는 성경과 내가 보는 성경이 같은 것이 맞나 싶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보길래
이런 패역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 참으로 화가 난다.
그들로 인하여 코로나 바이러스가 더 퍼진다면
교회는 이제 몰락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는 사회의 암적 존재로 완전히 낙인이 찍힐 것 같다.
그래서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지만,
내가 집중하는 일은 다른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는 것,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것,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찾는 것이다.
매일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다른 나에게
아내가 아침에 묻는다.
"여보. 당신은 몇시에 알람을 맞추고 자나요?"
나는 매일 알람 시간을 다르게 설정하고 잠자리에 든다.
조금 일찍 잠 들 때는 조금 일찍 알람을 설정하고,
조금 늦게 잠 들 때는 조금 늦게 알람을 설정한다.
왜 일정한 시간으로 설정하지 않을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최적의 컨디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잠이 모자라서 비몽사몽간에 묵상의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함이다.
나에게는 매일의 묵상의 시간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시간이요,
이 시간을 통해서 하루의 삶을 살아갈 에너지와 힘을 받고,
이 시간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시각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이 시간을 흐리멍텅한 상태로 맞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제 온라인 주일 예배를 준비하면서
기도 순서인 성도의 기도문을 받았다.
그 기도문을 읽으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흘러나왔다.
그 기도문의 일부다.
"주님, 성도들에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무모함을 믿음이라 말하지 않게 하시고, 완악함을 신앙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성도 각자가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맺어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광화문에 나가서 마이크 들고 떠드는 자칭 목사라는 자와,
대면예배를 강행하겠다고 성명서를 내는 목사라는 자들보다
일반 신자인 자매가 신앙적인 개념이 더 바르게 서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그 어떤 신앙적인 직분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매일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점점 세속에 물들고 자기 이익 외에는 관심이 없는
패역하고 악한 자가 될 뿐이다.
그렇게 패역하고 악한 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목사이고 장로이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차고 넘치기에
한국 교회가 온 세상에게 욕을 먹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 결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 시대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시민에 불과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끝까지 예수 잘 믿고 싶다.
예수를 바르게 믿다 가고 싶다.
목사답게 살고 싶고,
그 이전에 신자답게 살고 싶고,
그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종교인'이 되라는 것이 전혀 아니라
신자다워지라는 것, 사람다워지라는 것이다.
나와 성도들이 종교성을 더 강화하는 어리석은 삶이 되기 않길,
오직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길 힘쓰는
올바른 신자의 삶이 되길,
따뜻하고 겸손하고 배려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이사야 38장)
1. 절망적인 선고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이 사건은
36-37장의 사건보다 앞선 사건이다.
병에 걸린 히스기야에게 이사야가 찾아와서
히스기야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절망적인 선언이었다.
앗수르에게 나라가 망할지도 모를 정도로
두렵고 혼란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상황인데,
자신의 목숨마저 끝나게 되었으니
히스기야의 마음은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오늘날만큼 절망적인 때가 또 있었을까?
코로나 19라는 조용하고 무서운 바이러스가
이 나라 뿐 아니라 온 세상을 뒤덮고 있고,
수많은 사람이 병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이단인 신천지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주범인가 싶었더니,
도리어 목사도 아닌 목사라는 자가 중심이 된
기독교인이라는 자들이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바이러스 때문에 당분간 대면예배를 금해 달라는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다.
윗 권세에 복종하라는 성경말씀까지 인용하면서
독재시대에는 정부에게 잘도 복종하더니,
이런 위중한 때에 정부의 정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지독한 이기심의 발로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사회가 위기에 처했고,
기독교는 이기적인 종교,
혐오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 동안 이보다 더 절망적인 때는 없지 싶다.
2. 무엇을 해야 할까?
이렇게 절망적일 때 히스기야는 무엇을 했을까?
(사 38:2-3, 새번역) [2] 이 말을 듣고서 히스기야는, 그의 얼굴을 벽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여, [3]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 빕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온 것과,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과, 주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 한 것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히스기야는 한참 동안 흐느껴 울었다.
그의 얼굴을 벽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런데 기도 내용은 조금 뻔뻔해 보인다.
과거 이집트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배반했던 적이 있었건만,
그 말을 하지 않고, 그 이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옳게 행했던 것에 대해
하나님이 봐주시고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다.
뻔뻔했지만, 뻔뻔함만은 아니었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간 시간들이 있기에,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자랑할 건 아니지만,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할 수는 있는 내용이었다.
히스기야는 얼굴을 앗시리아나 백성들이나 이사야에게로 향하지 않고,
외부의 어떤 것도 볼 수 없도록 벽을 향했다.
가장 절망적일 때에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의 어떤 것이나 의지할 다른 것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향한 시선을 차단하고
오직 하나님만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이 무서운 상황에 대해서
끊임없이 뉴스를 쳐다 보고
폰으로 계속 날아오는 안전문자를 보며 걱정해 본들,
그리고 확진자가 발생시킨 부주의함에 대해서 원망해 본들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다.
처음에 코로나를 전파한 신천지를 비난할 수도 있겠고,
광화문에서 코로나를 퍼트리고
심지어 코로나 검사 자체를 거부하는 패역한 자들을 욕할 수도 있겠고,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목사들과 교회들을 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건 그저 감정 해소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을 해도 괜찮지만,
그 모든 것들보도 최우선적으로 한 가지를 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을 하는 것이 쓸데 없는 짓들이 되고 만다.
그 한 가지는 '얼굴을 벽쪽으로 향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진짜 벽을 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향한 시선을 잠시 차단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하루에 1시간 이상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장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지 않고서
뉴스를 아무리 많이 보고
패역하고 악한 자들을 아무리 원망해본들
그것이 나와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참된 생명의 길은 뉴스에서 찾을 수 없고,
안전문자에서도 찾을 수 없다.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욕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뉴스도 봐야 하고 안전문자의 내용도 숙지해야 하고,
패역하고 악한 놈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욕도 해야 하지만,
신자라면 그 모든 것 이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모든 것을 차단하고 벽쪽을 향하는 것'
즉 '모든 것을 차단하고 오직 말씀을 펼쳐서 하나님과만 교제하는 시간'을 꼭 갖는 것이다.
3. 결과
히스기야가 절망의 순간에 얼굴을 벽쪽으로 향하고
통곡하고 날이 샐 때까지 구슬피 울며 기도한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사 38:4-6, 새번역) [4] 그 때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5] "너는 되돌아가서, 히스기야에게 일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6]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고,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목숨이 15년 연장되었고,
나라가 앗시리아에게서 구원받는 것이었다.
분명 아무런 해결책이 없을 것 같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저 벽을 향했고 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무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 같았던 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셨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왜 벽을 향하고 기도해야 할까?
왜 다른 곳을 향한 모든 시선을 차단하고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왜 이런 혼란 가운데에서 말씀을 펼쳐 읽고 묵상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목숨도, 적군의 침입도,
코로나 19도, 타락한 목사와 교회들의 문제도
나의 힘으로는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일하셔야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몇 백 명이 코로나 확진자가 되는 이 상황에서,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대면예배를 금지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주일인 오늘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이 땅 곳곳에 있을 이런 절망적인 기독교의 상황에서,
신자인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 모든 쪽을 향하는 시선을 잠시 차단하고
말씀을 펼쳐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의 긍휼을 구하며 주의 뜻을 구하는 시간을 매일 갖는 것이리라.
4. 나는?
분통이 터지고 울분이 쌓인다.
광화문 집회를 강행해서 바이러스를 퍼트린 자들과
같은 종교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그 이후에 대면예배를 금지해 달라는 정부의 방침에
반기를 들고 대면예배를 강행하려는 자들과 같은 종교인이라는 사실이 절망스럽다.
그들이 보는 성경과 내가 보는 성경이 같은 것이 맞나 싶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보길래
이런 패역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 참으로 화가 난다.
그들로 인하여 코로나 바이러스가 더 퍼진다면
교회는 이제 몰락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는 사회의 암적 존재로 완전히 낙인이 찍힐 것 같다.
그래서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지만,
내가 집중하는 일은 다른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는 것,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것,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찾는 것이다.
매일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다른 나에게
아내가 아침에 묻는다.
"여보. 당신은 몇시에 알람을 맞추고 자나요?"
나는 매일 알람 시간을 다르게 설정하고 잠자리에 든다.
조금 일찍 잠 들 때는 조금 일찍 알람을 설정하고,
조금 늦게 잠 들 때는 조금 늦게 알람을 설정한다.
왜 일정한 시간으로 설정하지 않을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최적의 컨디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잠이 모자라서 비몽사몽간에 묵상의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함이다.
나에게는 매일의 묵상의 시간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시간이요,
이 시간을 통해서 하루의 삶을 살아갈 에너지와 힘을 받고,
이 시간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시각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이 시간을 흐리멍텅한 상태로 맞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제 온라인 주일 예배를 준비하면서
기도 순서인 성도의 기도문을 받았다.
그 기도문을 읽으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흘러나왔다.
그 기도문의 일부다.
"주님, 성도들에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무모함을 믿음이라 말하지 않게 하시고, 완악함을 신앙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성도 각자가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맺어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광화문에 나가서 마이크 들고 떠드는 자칭 목사라는 자와,
대면예배를 강행하겠다고 성명서를 내는 목사라는 자들보다
일반 신자인 자매가 신앙적인 개념이 더 바르게 서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그 어떤 신앙적인 직분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매일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점점 세속에 물들고 자기 이익 외에는 관심이 없는
패역하고 악한 자가 될 뿐이다.
그렇게 패역하고 악한 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목사이고 장로이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차고 넘치기에
한국 교회가 온 세상에게 욕을 먹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 결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 시대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시민에 불과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끝까지 예수 잘 믿고 싶다.
예수를 바르게 믿다 가고 싶다.
목사답게 살고 싶고,
그 이전에 신자답게 살고 싶고,
그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종교인'이 되라는 것이 전혀 아니라
신자다워지라는 것, 사람다워지라는 것이다.
나와 성도들이 종교성을 더 강화하는 어리석은 삶이 되기 않길,
오직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길 힘쓰는
올바른 신자의 삶이 되길,
따뜻하고 겸손하고 배려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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