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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신 vs. 보이지 않는 신
(창세기 41:1-16)
1. 보이는 신
이집트의 바로는 신이었다.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신이었다.
그의 행동은 우상이 되고 그의 말은 법이 되었다.
대제국을 이끄는 왕은 언제나 신이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행동과 말을 통해 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그야말로 신인 존재가 대제국의 왕이었다.
현대에도 신이 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존재,
말만 하면 법이 되는 존재,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존재가 있다.
권력을 가지고 돈을 가지고 있는 자들,
권력과 돈을 등에 업고 법을 주무르는 자들,
그리고 언론을 가지고 권력과 돈에 빌붙는 자들이다.
그리고 대놓고 신의 이름을 도용하여
신적 권위를 스스로 부여하는 자들이다.
그들 모두가 '보이는 신들'이다.
스스로를 신과 비슷한 전능함을 자랑한다.
죄 없는 자도 죄인으로 만들고,
가짜 뉴스를 진짜처럼 알려버리고,
큰 죄인도 죄인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모든 것의 배후에는 '돈'이 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보이는 신'은
다름 아닌 '돈'이다.
2. '보이는 신'의 한계
'보이는 신'이었던 이집트의 바로가 꿈을 꾸었다.
(창 41:1, 새번역) 그로부터 만 이 년이 지나서, 바로가 꿈을 꾸었다. 그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두 개의 꿈을 꾸었는데,
두 개의 내용이 비슷한 것이었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대제국의 왕이었지만
자신의 꿈은 통제하지 못했고,
뒤숭숭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국 내에서 꿈을 해석할 만한 사람을 불렀으나,
아무도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
(창 41:8, 새번역) 아침에 그는 마음이 뒤숭숭하여, 사람을 보내어서 이집트의 마술사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그가 꾼 꿈 이야기를 그들에게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그 꿈을 해몽하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신'이라고 할만큼
자신의 제국 내에 마술사도 많았고 현인들도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꿈을 해석할 수 없었다.
보이는 신은 그렇게 한계를 드러내어서
불안함과 두려움과 초조함에 떨게 되었다.
제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스스로도, 타인들도 생각할지라도,
자신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나게 된다.
권력과 법을 다루는 자들과 언론을 다루는 자들이
마치 신인 듯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상황을 거짓으로 다 통제하는 듯 보여도,
그 배후의 돈이 신인 듯 보이는 상황들이 계속된다 하여도,
그들이 결코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보이는 신'은 언제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끝이 너무나 분명한 존재가 '보이는 신'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신'은 결국 가짜 신이기 때문이다.
3. 보이지 않는 신
초조한 대제국의 왕에게 한 신하가
꿈을 제대로 해석한 요셉에 대해 말했다.
(창 41:13, 새번역) 그리고 그가 해몽한 대로, 꼭 그대로 되어서, 저는 복직되고, 그 사람은 처형되었습니다
통제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만난 바로는
불안하고 초조해서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데려왔고,
꿈을 풀어달라고 요셉에게 말했다.
요셉이 대답했다.
그런데 요셉의 대답은 제국의 왕의 말과 달랐고
제국의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제국의 가치에 맞게 사는 자들은
가능하면 자신들 드러내어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그렇게 해야 제국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제국 안에서 특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의 대답은 완전히 달랐다.
(창 41:16, 새번역)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높이거나 드러내려 몸부림치지 않았고
담백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무능을 알렸다.
대신 하나님을 높였다.
꿈의 해석을 하나님께 받긴 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입으로 말하게 될 것이니,
자기가 해석해주겠다고 말해도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 한계를 분명히 그은 것이다.
자신은 무능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존재임을 선포하고
참된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신앙인도 어쩔 수 없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제국이라 말할 수 있는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참 신자는 결코 자본주의의 가치에 종속되지 않는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자신의 가치를 가능하면 더 크게 보이게 만들고
그래서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해서 힘과 돈을 가지려는 것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다.
그러나 참 신자는 반대로 살아간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일을 감당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분이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낸다.
4.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법
요셉이 살아가던 시대에는
하나님을 입으로 먼저 말해야 하는 시대였다.
제국의 왕이라는 '보이는 신' 외에 어떤 신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참 신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하고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을 그렇게 드러내어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이미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말 많은 사람들'이라고.
'말쟁이들'이라고 알려지더니,
급기야 '거짓말쟁이들', '이기주의자들', '사기꾼 같은 자들'
이라는 인식까지 있다는 조사가 나왔다.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하지만,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한다.
이 시대는 결코 말을 먼저 앞세울 시대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신뢰를 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이 시대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보이는 신'인 돈과 권력과 각종 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 살아가면서,
'보이는 신'은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신'이신 하나님을 드러내가 위해
'보이는 신'인 돈을 조금 양보하고,
나의 이익과 편리도 조금 양보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섬기는
'행동'이 필요한 때다.
삶으로 '보이지 않는 신'이 계심을 보여주어야 할 텐데,
무너진 인식을 바꾸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제법 오랜 시간동안 말은 줄이고
신자답게, 성경의 가치대로
그저 담담히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인 듯 하다.
5. 나는?
아내가 말한다.
지나가는 길에 어떤 차에서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가 들여와서
눈살을 찌푸리며 보았는데,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소리였다고 한다.
아내가 그 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아저씨! 너무 시끄러워요. 그 소리 좀 줄이세요!"라고.
차가 움직이고 있었고 확성기 소리가 너무 커서
그 차 운전자는 아내의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고 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기독교가 사회에 덕을 끼치지 못해서
온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데,
더 욕을 못 먹어서 안달이 난 것 같다.
그 차 한대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무조건 '말'로, 아니 '큰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만이 전도라고 믿는
그 무지하고 이러석고 야만적인 생각을
아직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교인들의 모습이 슬프다.
나는 무능하고 나는 죄인이고
나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못한 존재이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말이 아니라 내면과 삶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참 신자일 수가 없음을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새롭게 알고 새겨야 할 것 같다.
교회를 개척하고 5년이 지나서 6년으로 가고 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과감하게도 '전도하지 마세요.'라고
성도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말로 하는 전도, 무조건 교회로 사람들을 데려오는 전도라면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
교인이라고 하는데, 장로라고 하는데,
심지어 목사라고 하는데,
말만 무성하고 삶은 엉망인 사람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그런 사람들이 된다면
너무 괴롭고 슬플 것 같았다.
그래서 '말로 하는 전도'는 좀 멈추고,
예수 믿는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게 돕고 싶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삶을 거는 것을
모든 성도들의 모토로 삼으며 지금까지 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좀 아쉽다.
갑자기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생겨버렸고,
온 세상이 얼어붙고 있는 상황이 되자,
지나간 시간동안 조금 더 열심히 했어야 하나 싶어서다.
말씀에 삶을 거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세우기 위해서
더 최선을 다해 뛰었어야 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요즘들어서 생긴다.
성도들도 한 분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말씀에 삶을 온전히 걸도록
내가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 것 아닌지
하는 아쉬움과 죄송함이 마음에 있다.
코로나 시대로 인해 기독교의 민낯이 다 드러나고 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어서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가짜 뉴스의 온상이 되어 버렸음을,
온 세상에게 다 보여주고 말았다.
기독교의 위상이 땅바닥에 쳐박히고 말았는데,
정작 그런 짓을 한 자들은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런 시대에 나와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어떻게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 할수록 대답은 한 가지로 압축된다.
신자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깨닫고,
그 말씀에 삶을 걸고 살아가는 것.
그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펜데믹 시대에 이 삶을 겸손히 잘 살아가는
나와 성도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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