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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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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4절-10절: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4절: 고을고을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오니 큰 무리를 이루게 됐다. 여기 오신 분들도 어느 도시 어느 촌에 어느 동네에 있었던 어떤 소문 듣고 고을고을에서 차를 타고 오던, 멀리서 오던 이 자리에까지 왔다. 그러면 무슨 소문을 들었느냐? 주일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 십만 원씩 준다고 하니까 온 것이냐? 우리 모두 왜 여기까지 왔느냐? 왜 여기에 앉았느냐? 자리를 채우려고 앉았느냐? 깨달으려고 앉았느냐? 그냥 주일이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와서 앉았느냐? 그걸 자기에게 자문자답해 봐라. 같이 앉아있어도 신앙의 성격과 성질은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만 오면 교회부흥이라고 착각을 하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각자마다 사람들의 목적도 취미도 다 다를 수 있고 지식의 수준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가는 목사라면 교회 안에 취미교실을 만들만도 하다. 교회 안에는 별의 별 재간꾼들이 다 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다. 취미 자체는 나쁜 건 아니다. 그런데 그 취미생활을 주격으로 시키면서 예수 믿는 것은 종교로써의 모임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엮어놓아서 그 안에서 각자마다 취미생활을 하는 게 교회의 할 일이고 목사들이 할 일이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나올 때는 무엇 때문에 나왔는지 그 이유를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우리 모두도 여기 앉아있지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앉아있는지 알고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눈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일반생활이나 경험에서 나온 것을 비유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보고 듣고 생활을 했으니 결정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
예수님의 교훈을 보면 이치적으로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그 이치를 들었을 때 자기가 그 이치를 가지고 다방면으로 사용을 잘 해 나가면 믿음생활도 잘 할 것이고 일반생활도 잘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치를 무시하면 일반생활도 엉터리가 된다.
5절: 농부가 씨를 왜 뿌리느냐? 더 많은 수확을 바라보고 씨를 뿌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치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일반 자연계시로 보여줘서 이치를 깨닫게 한다.
생명이 있는 콩을 한 알을 심으면 백배 이상 엄청나게 많이 열린다. 백배라고 해서 알맹이가 백 개라는 말이냐?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이 열린다는 뜻이다. 조를 한 알 심으면 몇 백배가 아니라 셀 수가 없이 많이 열린다. 감씨 하나를 심어서 큰 나무로 자라면 해마다 감이 엄청나게 열린다. 감나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열린다. 이런 면을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이런 이치들을 무시하면 네가 생각하는 그 꼴밖에 안 된다. 그걸 알아야 한다.
죽은 씨앗은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죽은 씨앗을 심는 사람은 없다. 심으면 그냥 썩어버린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흙을 뚫고 돌을 머리에 이고 밀어내고 새싹이 새 생명이 올라온다. 시적으로 표현을 한다면 이건 생명이 지구를 뚫고 올라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에게 신앙생명이 있다면 하늘마당을 뚫고 올라가야 한다. 솟구쳐야 한다.
산 신앙의 결과와 죽은 신앙의 결과는 이미 현재에서 판단이 나는 것이다. 그걸 알아라. 마라톤이나 수영을 할 때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예수 믿는 정신이 일반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 일반교인들처럼 믿으면 안 된다. 썩은 정신을 가지면 안 된다. 하나의 기독교인으로서 하나의 종교생활을 하지 말아라. 세상 속화된 교회는 하나의 종교인을 원하겠지만 우리교회에서는 그건 별로 쓸모가 없다. 그렇게 믿지 말아라. 네가 썩을 수가 있다.
세상 사는 것도 먹고 놀고, 하루 벌어 먹고 놀고 맨날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 몸이 항상 그럴 수가 있느냐? 큰 환난이 닥칠 줄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살 때 전쟁이 날 것도 알고, 땅 위에 있느니만큼 지진이 날 것도 알고, 비바람이 몰아쳐서 홍수가 날 것도 다 생각을 해야 한다. 바다에 나가는 사람이 수영을 못하면서 나갈 수 있느냐? 배가 파선되면 그냥 죽는 것이다.
5절: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은 씨는 그 씨가 어디에 떨어진 씨였느냐? 길가에 떨어진 씨다. 사실 농촌에서 보면 밭에 씨를 뿌리다가 바람에 의해서 씨가 길바닥에 툭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 말씀이 꼭 그런 것처럼 돼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길가 밭과 같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씨가 자기에게 떨어져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하는 식으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건 길가에 떨어진 씨다.
그러면 씨를 뿌리는 자가 일부러 길바닥에 뿌린 것이냐? 그런 농부는 없다. 그런데 이런 농부는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벼를 논에 그냥 갈아 엎어버리는 농부는 있다. 이건 안 될 일이다. 씨가 누구의 씨냐? 하나님이 주신 씨앗인데, 그 씨를 뿌려서 백배 천배가 나게 하라는 것은 ‘네가 수고했구나. 네가 많이 먹고 쓰고 팔아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잘 여무어질 때까지 비도 주고 햇볕도 내리고 바람도 불게 한 것인데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냥 갈아엎는다? 이건 악한 일이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다고 했는데 밭 가 바로 옆에 길이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씨가 길가에 떨어진 것이 농부의 잘못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씨가 길가에 떨어졌으니 오고 가는 사람의 발에 밟히다가 공중의 새가 그 씨를 보고 내려와서 홀딱 주워 먹었다는 것이니 이는 우리 마음 밭을 말하는 것이다. 말씀을 늘 받아도 그런 마음 밭이라면 이런 사람은 이미 마음 밭에 씨가 떨어졌지만 수입은 없다는 것이다. 너에게는 사람 되는 수입은 없다. 물질적으로 그렇게 키워서 자자손손 공부시켜 놓은들 사람이 되겠느냐?
만일에 길바닥에 떨어진 씨가 가치가 있다고 여긴 사람이 그 씨를 주워서 자기 밭에 심었다면 분명히 그만큼 큰 수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귀한 씨를 그냥 새가 주워 먹어버렸으니 생명이 있는 그 씨가 참 아깝다. 그 씨의 미래를 두고 생각해 볼 때 그 씨가 참 아깝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도 자라지 못한 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세월이 아깝고 나이가 아깝고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믿었으면 너보다 훨씬 앞섰겠다’ 하는 게 있다.
6절: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했는데 일반적으로 바위 위에 씨가 떨어지면 싹이 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났다가’ 하는 것을 보니 바위 위에 약간 움푹 파인 곳에 흙이 약간 있고 습기가 조금 있었던 듯하다. 그곳에 떨어진 씨가 싹이 조금 났으나 말라서 죽었다. 그 씨도 참 아깝다.
7절: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가 가시덤불과 함께 사이좋게 자랄 수 있느냐? 자라면서 얼마나 찔리고 찢어질까? 바람이 불적마다 부딪힐 것이다. 그 곡식은 끝까지 자랄 수가 없다.
잡초 속에서 곡식이 잘 자라는 법은 거의 없다. 이런 것은 상식적으로 잘 안다. 그래서 농약을 뿌리고 씨를 심기 전에 미리 비닐을 덮어 풀이 못 자라고 죽게 한다. 풀 입장에서 보면 너무한다고 하겠으나 그러나 농부의 입장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 그러니까 길바닥에다 씨를 뿌리는 사람도 없고, 바위 위에 씨를 뿌리는 사람도 없고,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있다. 길은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인데, 그 길을 가면 어떤 결과가 온다고 하는 것도 모른 채 사람들이 많이 가는 것을 보고 너도나도 덩달아 그곳으로 가는 사람이 많다. 세상 길 넓은 길은 사망 길이요 신앙이 자라지 못할 곳인데 바위 위에 올려주면 자기가 말라 죽는 것도 모른 채 기분이 좋듯이 직분을 주고 올려주면 신앙이 큰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많다.
물질 충성봉사 노력활동 충성봉사를 못한다고 그 사람을 가시처럼 늘 찌르면 그의 믿음이 어떻게 자랄 수가 있느냐? 그러면 안 찌르면 자랄 수 있느냐? 아예 못 자란다.
8절: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으니 잘 들었느냐? 생명이 강한 씨가 기름진 좋은 땅에 떨어지면 많은 결실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안 그런 게 이상한 거다. 길가에 떨어진 씨, 바위 위에 떨어진 씨,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 등과 비교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유익이란 엄청나다.
그런데 하신 말씀 끝에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하고 큰소리를 하셨다. ‘외치시되’ 그랬다. 큰소리로 외치시는 그 분의 심정을 헤아려 봐라. 당연히 이해되고 알고 있는 사실들을 왜 큰소리로 외치실까? 큰소리로 말씀하신 그 분은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이다. 너를 만들었다. 지렁이처럼 송충이처럼 돌멩이처럼 나무처럼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신의 형상으로 1차적으로 만드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100% 당신처럼 질적으로 만들려고 하신다. 바로 나를 그렇게 만들려고 하신다.
큰 소리로 외치시는 것은 인간 모두에겐 자기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 네 마음 밭에 따라서 영원히 존귀 영광과 멸망이 판가름이 날 것이므로 이게 안타까워서 제발 좀 알아들으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신 것이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잘 따져보고 영원히 후회가 없는 인생으로 살다가 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큰소리를 해도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마음속에 아무 반응이 없을 것이고, 백배 천배 만배의 결실이 있을 것이라도 해도 그게 나와는 관계가 없다는 식이다. 주님이 일반 이치를 들어서 아무리 큰소리로 외쳐도 세상 종교적인, 거짓된, 육적인 비진리, 마귀적인 세상, 종교적인 세상, 넓은 길을 가는 정신 사상을 가진 사람은 이 말씀이 이단소리로 들릴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백배의 결실을 보기 위해 마음부터 바로 놓이게 된다. 듣는 마음이 하나님 쪽으로 반응이 일어나면 말씀에 순종이 된다. 여기서 자기가 예수를 바로 믿었는지 잘 못 믿었는지, 영원한 성공이 되는 건지 영원한 실패가 되는 건지 결정이 나는 거다. 말씀이 자기 마음 밭에 떨어질 때 자기 마음의 반응에 의해 그게 결정이 된다.
9절-10절: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물었다. 우리는 안 물어도 되느냐? 예수님께서 이때까지 하신 말씀을 알아들었느냐? 제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 앞에 인생의 승리자로 똑바로 살려면 물을 필요가 있는 건데 무리들은 묻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누가 물었느냐?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물었다.
자기는 무리 속에 든 신앙의 태도인지, 제자의 신앙의 태도인지 알려고 하는 건지? 안 알아도 되는 마음인지? 먹을 거 있고, 집 있고, 자동차 있고, 은행에 돈푼 꽤나 있고 하니까 안 물어도 되는 건지? 그런 게 있으니 안 묻는다고 치다. 그러면 그러지도 못한 사람은 안 물어도 되는 거냐? 우리 모두는 자기 처지를 잘 안다. 부자든 가난하던 자기 마음 밭의 처지를 잘 알 것이다.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말씀이 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자기에게 일어날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필히 비유의 뜻을 묻는구나. 그러면 제자가 아니라면 물을 필요도 없는 거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필요가 없는가? 비유의 뜻을 묻지 않아도 되는 건지? 왜? 다 아니까? 안다면 분명한 자기의 삶의 태도가 나와야 한다. 그 태도가 교회 중에서도 나와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바로 나와야 하는데 그게 없다면 알면 뭐하느냐? 그게 아는 거냐?
길가도 알고 바위도 알고 가시덤불도 알고, 안다고 하지만 신앙정신이 아니라면 모르는 거다. 그리고 그곳에 씨가 떨어지면 어떻게 된다는 것도 일반 상식적으로도 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예수를 안 믿어도 안다. 가르치는 목사나 교인이나 안 믿는 사람도 다 알지만 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마음 밭이 이 네 가지 밭 중에 어느 밭인지를 모르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면 알겠는데 이걸 자기에게로 가지고 들어와서 사람의 마음 밭을 보면 그만 모른다. 자기의 마음 밭을 알라고 농부들이 농사짓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건 알지 못하면서 자기는 좋은 밭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위안제 마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자기 마음들이 좋다고 여기느냐? 자기는 욕심도 없고, 시기 질투도 없고, 욕하고 원망하는 것도 없고, 한숨 쉬는 것도 없고, 걱정 근신도 없느냐? 이건 다 좋은 마음이 아니다. 이건 다 세상 마음이다.
10절: 얼른 들으면 이 말에는 모순이 있다. 불공평하다 그 말이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고, 왜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길 싫어하고 비유로 말씀을 하시느냐?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사실 제자들도 무리들도 예수님으로부터 네 가지 밭의 비유를 한 날에 같은 시간에 같은 지역에서 확실히 들었다. 이 비유를 들을 때 무리들 중에 ‘그 네 가지 비유는 나도 안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지금도 그렇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만 있자. 다 아는 네 가지 밭을 왜 새삼 비유로 말씀하실까’ 하며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라고 하는 것을 한 번 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역사적으로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가 있다. 두 번째는 숫자적으로는 열두 제자 안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질적인 면에서 제자 된 신앙이 있다.
마음속에서 주님께 왜 묻느냐? 순종하여 백배의 결실을 보고자 묻는 것이다. 이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께 묻고자 하는 것도 보면 첫째는, 꼬투리를 잡으려고 묻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아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묻는 자가 있다. 세 번째는 인간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숨겨놓고 ‘예수께서도 자기처럼 똑같이 알고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묻는 자가 있다. 이 경우 예수님의 말씀이 인간 자기의 답에 맞으면 자기는 예수님과 동등시 되는 거냐? ‘예수님,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 알고 있는데 틀렸으면 정답을 알려주십시오’ 하는 뜻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답은 숨겨놓고 예수님께 묻는 것은 예수님을 시험을 치는 것이다. 이건 인간 자기 기준에서 예수님을 옳다고 하는 식이 되는 거다. 인간 자기 기준을 두고 예수님에게 ‘예수님,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게 목사들 속에 너무나도 많다.
참고로, 배우는 입장에서 자기의 주장을 스승에게 내세우거나 스승을 깎으려고 하지를 말아라. 이것은 배우는 태도가 아니다. 교만하고 건방지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사람은 얼마 안 가서 반기를 들게 된다. 훗날에 자기가 가르칠 때는 자기의 옳음을 말해도 된다. 자기를 먼저 살핀 후에 말하는 게 말에 힘이 있는 거다.
배우는 위치에서 가르치는 분에게서 자기와 다른 주장이 강하게 나올 때는 다른 곳으로 가던지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자기 교회를 가르치던지 해야 한다. 마음에 안 맞는데 계속 그곳에 버티고 있다면 결국 이상한 사람으로 찍히게 된다. 분쟁을 일으키고자 그곳에 계속 있는 것이냐? 배우겠다면 끝까지 배우다가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는 자기가 가르치면 되는 거다.
그런데 목사님들 세계에서 스승에게서 배울 것은 다 배우면서 왜 그 스승을 욕을 하느냐? 이건 인간성이 되게 못돼 먹었다. 스승 것을 다 써먹으면서 스승을 욕을 하고 관계성을 다 끊고, 말하자면 스승으로부터 물질적인 혜택도 받고 했는데 그러고 있다면 이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셔야 할 일이다. 정말 이런 일은 교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일반세상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야단이 날 일이다.
어디를 가든지 배우는 자의 태도가 말썽을 일으키면 안 된다. 이건 상식이다. 옳다고 생각이 되면 마음을 같이 하고, 아니라고 생각이 되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바른 태도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다른 곳에 가기도 마땅찮고, 더 좋은 곳이 나타날 때까지 붙어있자고 하는 것은 육의 생각이고 옳은 태도가 아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따로 혼자 나가 있는 것이 훨씬 편하다.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려고 하느냐?
하나님 앞에 신앙의 태도가 분명해야지 영원히 후회할 짓을 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도 않으면서 말씀을 써먹는 것은 예수를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하는 가룟유다의 영을 가진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만 그쳤고 제자들을 향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허락이 되었다’ 했다. 어째서 그럴까? 이는 너희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독차지 하고 있으므로 그 뜻을 알려주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제자인 것이다.
무리적인 세상사상적 세속화된 신앙은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하나의 상식적 비유적으로만 들리지 현재 자기 마음 밭의 상태적 실상을 전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비유로만 알았지 자기의 실상을 모르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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