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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빛 안에서 걷다

요한복음 김기석 목사............... 조회 수 245 추천 수 0 2020.10.17 22: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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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9-18 
설교자 : 김기석 목사 
참고 :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그 빛 안에서 걷다
요1:9-18
(2020/01/05, 성탄 후 제2주)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참 빛으로 오신 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새해가 밝아온 지 닷새가 되었습니다. 새해는 새뜻하다(새롭고 산뜻하다)는데 정말 그런가요?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을 보면 우리 기분도 울적해집니다. 청명한 하늘,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이 더욱 그립습니다. 시인 문태준의 새해 다짐을 보다가 공감이 되는 대목이 있어 소개합니다.

“마음을 졸렬하게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구애됨이 없이 살겠다는 의지도 세워본다. 마음은 부리기 나름 아니던가. 마음은 본래 큰 것으로 말하자면 세상을 품고, 작은 것으로 말하자면 바늘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음의 장광長廣을 대해大海처럼 설원雪原처럼 가져볼 요량이다. 설령 피로와 고통이 거센 파도처럼, 눈보라처럼 내게 밀려오더라도.”(문태준,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마음의숲, 2019년, p.47)

우리 마음이 이렇게 크고 맑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 빛이 있었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빛이면 빛이지 참 빛은 뭔가요? 참을 뜻하는 헬라어 알레씨노스alethinos는 이름과 실제가 일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명실상부名實相符하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굳이 ‘참 빛’이라 말하는 까닭은 세상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탄도 빛의 천사를 가장”(고후11:14)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진실과 거짓,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뒤섞어서 사람들을 혼돈에 빠뜨립니다. 거짓이 일상이 되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곧이 듣지 않습니다. 조롱, 저주, 혐오, 거친 말들이 사정없이 우리를 휘몰아칩니다. 어느 분은 우리 시대를 가리켜 ‘영적인 블랙아웃’(spiritual blackout) 시대라 했습니다. 블랙아웃이란 대규모 정전 혹은 일시적인 의식 상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참 빛이신 주님을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요한은 참 빛이 오셔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빛은 자기 욕심에 매몰되어 더 큰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 큰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 빛은 차별 없는 사랑입니다. 그 빛은 피부색, 인종, 국적, 종교로 갈라져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싸우는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 속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코스모스의 번역인데, 코스모스는 본래 조화로운 배치 혹은 구성을 뜻합니다. 혼돈의 반댓말인 셈이지요. 그러나 그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등 돌린 사람들, 그리스도의 뜻에 적대적인 이들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알아볼 생각도 뜻도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두려워합니다. 자기의 벌거벗음이 드러나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1:11). 슬픈 이야기입니다. 맞아들인다는 것은 그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등을 돌린 채 맞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삶과 지향을 우리 것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영접하는 사람들
그러나 모두가 그를 배척한 것은 아닙니다. 영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 말입니다. ‘믿음’이란 일단은 참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그에게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알제리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피살된 샤를 드 푸꼬의 기도는 많은 믿는 이들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좋으실 대로 하십시오./저를 어떻게 하시든지/감사드릴 뿐./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더 큰 행복과 선으로 이끌어주시리라 믿기에 그는 이렇게 기도를 마칩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기에/끝없이 믿으며/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세란 특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힘 혹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 믿음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종교적으로 치장하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 가운데 인종주의, 편협한 민족주의, 이기심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습니다. 열매를 보아야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법입니다. 폭력, 조롱, 혐오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과 무관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겸손, 자비, 연합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외아들의 영광
예수님은 말씀의 육화 그 자체이십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이 구현된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용된 단어가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대신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육신을 뜻하는 헬라어 사륵스sarx는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육체적 본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분이 욕망을 가진 존재, 그렇기에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존재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말할 때 등장한 스케나오skenoo는 장막을 치다 혹은 장막에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장막이라는 단어는 탈출 공동체가 만들었던 성막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요한은 그가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확신을 품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나중에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고백하면서, 성령이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독생자’ 혹은 ‘외아들’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외아들이라는 말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타내기 위한 은유입니다. 예수는 온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삶으로 오롯이 입증하여 보였다는 의미에서 외아들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외아들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로 나타납니다. 은혜를 뜻하는 단어 카리스charis는 기쁨, 즐거움, 달콤함, 사랑스러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은혜에 충만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동일한 선물을 안겨줍니다.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빛이 맑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도 저절로 맑아집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얼굴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면서 그 얼굴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가슴이 그저 시원한,/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얼굴’ 부분)

아마 예수님의 얼굴이 이러할 겁니다. 그 얼굴과 만나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확연히 알게 되고, 또 그렇게 살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얼굴 말입니다. 요한은 그 주님 안에 진리가 충만하였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뜻하는 ‘알레테이아aletheia‘라는 단어 속에는 망각을 뜻하는 ‘레테’가 들어 있습니다. 알레테이아는 망각을 깨뜨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욕망을 따라 사느라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것, 곧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이십니다.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음
세례자 요한은 그런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 말합니다. 생년월일이 자기보다 앞선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깊이 맞닿아 있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얼마 전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 건기가 찾아오면 동물들은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물을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초목도 다 말라버리기 때문에 먹을 것도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영장류들은 풀뿌리를 뽑아 흙을 털어낸 후에 먹기도 합니다. 기린이나 다른 초식 동물들은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나무 열매를 조심스레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렇게 변한 초원에서 홀로 푸른 잎을 내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아카시아 종류였는데, 이 나무는 건기에 오히려 활동적이었습니다. 뿌리를 아주 깊게 내리기 때문에 깊은 곳에 숨겨진 물을 끌어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물들은 그 나무 아래 모여들어 바닥에 떨어지는 열매를 먹으며 그 어려운 시기를 견뎠습니다.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린 우기에 열매를 맺는다면 동물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먹을 것이 없는 건기에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동물들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나무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그 나무의 씨는 껍질이 아주 두꺼워서 자연상태에서는 거의 발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물의 소화액에 적당히 녹은 채 배설되면 그 자리에서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무의 지혜로운 생존전략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일 때 인생의 가뭄을 견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계셨기 때문에 인생의 가뭄이 찾아와도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곤고한 이들을 도우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1:16)는 세례자 요한의 고백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을 강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을 잘 지켜야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발성이 없는 관행은 우리를 딱딱하게 굳은 사람으로 만들거나 위선적인 태도를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비판하고 심판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외적 강제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려 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세계에는 강제가 없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 속에 묻혀 있던 거룩함의 불씨, 따뜻함의 불씨를 휘저어 우리로 하여금 다시 타오르게 만듭니다. 그 불은 더러움을 태우는 정화의 불, 마음이 스산한 이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고마운 불, 길을 잃은 이들에게 방향을 가리키는 봉홧불이 되기도 합니다. 이 빛을 간직한 채 한 해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알려주는 삶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삶으로 우리가 주님께 속한 사람임을 입증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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