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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6:1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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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석 목사 |
참고 : |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고전16:13-18
(2020/02/02, 주현 후 제4주)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스데바나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맺은 첫 열매요,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런 사람들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또 그들과 더불어 일하며 함께 수고하는 각 사람에게 순종하십시오. 나는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만나지 못해서 생긴 아쉬움을, 이 사람들이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지향을 잃지 말아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로 온 세계가 들끓고 있습니다. 감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는 모든 의료진과 방역 담당자들 그리고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와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한에 들어가 바이러스와 싸우는 의료진들과 우한 주민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특정한 나라나 지역 사람들에 대한 경계나 혐오로 나타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배제와 혐오는 바이러스보다 더 빠르게 전파됩니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대응이 필요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도 심각했지만 이번 주 제 관심을 끈 것은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발표한 ‘중동 평화안’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의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인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환호하고 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갈등의 뇌관이 될 것 같아 염려스럽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시기에 인류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런 때일수록 신앙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시대의 풍향에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지 않고, 반듯하게 서서 역사가 지향해야 할 곳을 가리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북극성이 옛 항해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역사가 나아가야 할 곳을 올곧게 가리킬 수 있어야 합니다.
∙타원형의 두 초점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도시 고린도는 그리스의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잘록한 허리 모양의 도시였기에 좌우편으로 이오니아해와 에개해에 면해 있었고, 항구가 발달한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아테네, 스파르타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도시를 찾는 이들은 19세기 말에 완공된 길이 6.3km, 너비 20m, 깊이 8m의 고린도 운하로 커다란 배가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운하 덕분에 화물선들은 먼 거리를 우회하지 않고 단거리로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를 거쳐 이곳에 찾아갔습니다. 그는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의 천막 공장에서 육체 노동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년 6개월을 머물렀으니 그가 얼마나 그곳에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강력한 소명 속에 살던 그는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고린도 교회가 파견한 사람들을 만나 교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듣고 깊은 우려에 사로잡힙니다.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고 해체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직접 갈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그는 긴급하게 고린도 교인들이 제기한 신학적, 실천적 문제들에 대한 충고를 담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계파에 따른 분열의 문제, 우상 앞에 드려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 혼인의 신성성을 해치는 무분별한 일탈 행위에 빠진 사람들의 처리 문제, 교인 간에 벌어진 송사 문제, 어떤 은사가 크냐를 두고 벌어진 불필요한 다툼들. 이런 문제 하나하나를 다 다룬 끝에 바울 사도가 기독교 윤리의 핵심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사랑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13장입니다. 금방 열거했던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그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를 들어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고전13:4-5)
방언이나 예언도 중요한 은사이지만 사랑이 더 핵심입니다. 사랑은 자기 초월의 능력입니다. 어느 것이 더 큰 은사냐를 가지고 다투는 이들에게 바울은 은사의 크기를 따지지 말고 “모든 일을 남에게 덕이 되게 하”(고전14:26)라고 말합니다. 이런 태도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이들은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없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이들은 허영과 다툼과 질투의 노예입니다. 바울은 조금의 유보도 없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15:50). 살과 피는 인간의 육체적 본성을 이르는 말입니다. 인간의 소명은 그것을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품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사랑장인 13장과 부활장인 15장은 마치 타원형의 두 초점처럼 복음의 핵심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16장에서 바울은 이제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홀가분하게 실제적인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교인들을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성심껏 준비해달라고 말합니다. 구제 헌금은 초대교회가 공교회로 성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 북부 지역을 거쳐 고린도에 갈 예정이라면서, 한 동안 머물다가 새로운 지역으로 선교의 지평을 넓힐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말합니다. 또 자기의 메신저로 가는 디모데를 얕보지 말고 세심히 돌봐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일상을 위하여
그리고 마치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몇 가지 짤막한 당부를 합니다. 첫째, ‘깨어 있으십시오.’ 이 말은 신약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언제라도 몽롱한 상태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원수인 사탄은 호시탐탐 사람들을 미혹할 기회를 엿봅니다. 사탄의 치명적인 무기는 둘입니다. 하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영혼은 다른 이의 아픔에 둔감하고, 다른 이들의 요청에 응답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영혼은 창조적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 속으로 자꾸 움츠러 들게 만듭니다. 사탄의 미혹을 이기려면 주님의 마음과 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믿음의 사람이라면 지금 여기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그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둘째,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믿음은 결단이고 모험입니다. 길 없는 곳에서 길을 보는 것이 믿음이고, 증오로 가득찬 세상에서 사랑을 견지하는 것이 믿음이고, 냉랭한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았으면 손해가 예기된다 해도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려움과 손해를 감수하려 할 때 믿음은 깊어집니다. 프랑스 조각가인 자코메티가 1949년에 제작한 ‘광장을 가로지르는 남자’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형태는 단순합니다. 깎아내고 또 깎아내 마치 선처럼 보이는 남자가 광장을 역동적으로 가로질러 걷는 모습입니다. 자코메티는 자기 작품에 이런 글을 덧붙였습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걷는다고 말합니다. 생명의 장엄함과 비애가 동시에 느껴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막연히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렇기에 상황이 어떠하든 그 길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셋째,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용감해야 합니다.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난폭한 세상,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상을 보면 자꾸만 우울한 느낌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하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희망하라고 부름 받은 이들입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지성으로는 비관주의자이지만 의지로는 낙관주의자이다”.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진정한 용기란 이런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수첩에 적어둔 말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말한다. ‘만약 ~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 그러나 믿음은 말한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Fear says ‘what if’ but faith says ‘even if’). 믿음의 사람들은 용감하면서도 거칠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기운을 북돋는 사람들
15절에서부터 바울은 동역자들을 귀히 여겨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스데바나(Stephanes) 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세례를 베푼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고전1:16). 그는 세례를 받은 그 순간부터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가정을 일러 ‘아가야에서 맺은 첫 열매’,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물심양면으로 성도들을 돌봤던 것 같습니다. 교회마다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이런 이들이 교회를 든든히 세워갑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불청우不請友’라는 게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청함을 받지 않은 친구라는 뜻이지만, 불청객과는 좀 느낌이 다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청하지 않더라도 아픔이 있는 곳,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 아닐까요?
바울은 이런 이들과 더불어 수고하는 이들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순종하다’라는 단어 속에 계급적 구별 혹은 차별이 담긴 것 같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실 그리스어 후포타소hypotasso가 군대 용어로 쓰일 때는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 이외의 곳에서는 ‘자발적으로 협력하다’ 혹은 ‘짐을 나르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바나와 같은 이들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그들을 계급적 상위자로 받들라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기꺼운 마음으로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스데바나는 브드나도(Fortunatos, happy)와 아가이고(Achaicus, 고대 그리스 남부의 땅인 아케아 사람이라는 뜻)와 함께 에베소에 있는 바울 사도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교회가 파견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교인들의 신임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보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채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썼던 첫 문장이 떠오릅니다. ‘아비 그리울 때 보거라.’ 아버지의 글씨 속에는 아버지의 얼굴과 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바울도 이 오랜 벗들을 그런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가 ‘나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이 사무치게 좋습니다. 생기를 불어 넣다(anapauo)는 단어는 ‘힘을 회복하도록 휴식을 주다’는 뜻인데, 신약에서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새롭게 되다‘, ‘기운을 차리게 하다‘, ‘용기를 북돋다‘ 등이 그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안식일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렛날에 숨을 돌리셨다고 말합니다(naphash, 출31:17).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사람이 숨을 돌리게 하는 사람,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 새롭게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 한 마디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잘 살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안식일이 되는 사람, 누군가에게 고향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이들을 알아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귀히 여기고 본을 삼아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거칠고 냉랭한 세상이지만 그 속에 온기를 가져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얼음을 녹이는 봄볕이 되어 다가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제 내일 모레면 입춘입니다. 겨울 한 복판에 우뚝 서는 봄처럼, 우리는 입춘의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오늘도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감당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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