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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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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200105 주일 설교 https://hopech.kr 희망의교회 |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10:23 하-33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언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 보았습니까? 하나님 만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언제일까요? 당신은 언제 하나님을 가장 잘 만납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가장 잘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가 중요하며, 설교를 잘 듣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씀 묵상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듣습니까? 어떤 분들은 너무나도 진지하고 경건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습니다.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이 뜨거운지 설교자의 가슴까지 뜨거워질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시큰둥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무엇 하러 교회에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설교를 듣는 자세가 곧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자세로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순종하는 베드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그의 이방인에 대한 민족적인 편견을 깨뜨리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으나, 베드로는 그 환상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말을 듣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은 이방인들을 부정하다 하지 말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가라는 뜻인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 즉 이방인들을 집으로 청하여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했으며, 그 이방인의 초청을 수락하여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심적인 변화를 우리는 28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가까이 하는 것과 교제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이렇게 고넬료의 집에 와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러한 편견을 버리고 고넬료에게 가라고 하시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기꺼이 고넬료의 집에 갔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철저한 순종을 보게 됩니다. 비록 그가 일생토록 몸담고 지켜온 율법과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할 만하면 순종하고, 그렇지 못하면 순종하지 않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면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외면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되 철저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고넬료의 순종
고넬료도 하나님의 지시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고넬료는 환상 중에 천사를 통하여 지시를 받고 즉시 종들을 베드로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올지 안 올지 아직 알 수도 없는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일가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24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수락하고 기꺼이 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넬료도 당시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민족적인 편견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에게 “내가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 베드로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청하였는데, 이 얼마나 엄청나고 중요한 일이냐? 그러니 다 와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라고 청하여 그들을 모두 모아 놓고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자세입니까? 그의 믿음과 순종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해 보면, 어떤 가정에서는 예배드릴 때 아이들은 물론 손님까지도 다 함께 불러 모아놓고 예배드리는 가정이 있습니다. 평소에 얼마나 훈련을 잘 시켜놨던지, 아이들도 조용히 예배를 잘 드립니다. 온 가족이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가정은 자녀들을 다 내보내거나 자기 방에 들어가게 해놓고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 들을 기회를 무산시켜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서운한지 모릅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온 집안은 물론 일가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다 모여서 말씀을 듣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면서 그 말씀을 듣기 위해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찬 그 방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주실 베드로에게서 나오는 말씀을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듣기 위해 준비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의 마음을 받으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을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셈이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인지는 당신이 얼마나 잘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고넬료의 사모하는 마음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자,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고넬료는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25절)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서 지금 점령 지구에 와 있는 백부장이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갈릴리의 초라한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이 베드로를 맞이하는 순간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고넬료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고넬료의 태도를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고넬료는 지금 베드로를 갈릴리의 한 어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가 종종 이처럼 송구스러운 대접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매우 불편했고, 또 잘못되고 지나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목사가 잘나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가 그 마음을 목사에게 표시한 것뿐입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주의 종들을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잘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목사가 대접받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만이 아니라 장로님이나 권사님, 목자들, 또는 성도들이 심방을 오셔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성도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베드로의 겸손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하자, 베드로가 송구스러운 나머지 고넬료를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26절) 베드로의 훌륭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모든 관심과 존귀와 영광이 자기에게로 집중될 때, 베드로는 단호하게 이것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러지 마시오. 나도 사람이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없소.’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목사들이 그렇다고 합니다. 아마도 늘 관심과 시선이 집중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매우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굳어져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 그때부터 그 목사는 타락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왕들이 자기를 신격화한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신이 사람으로 내려온 것으로 여겨졌으며, 로마 시대에는 황제 숭배가 강요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도 처음에는 잘 하다가 나중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가 절대 권력을 가진 자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그 모든 권력을 백성에게서 위임받은 것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특별 대우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에게 쏠리는 관심과 영광을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엄청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있는 순간에도 자기 본래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쓰시려고 하실 때, 그래서 우리가 존경을 받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될 때,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죄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당신의 종으로 쓰시고 계실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얼마나 황송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크고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 해도 자랑하거나 교만할 만한 여지는 사실 눈곱만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베드로와 고넬료가 피차 인사를 마친 후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자기가 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28-29절)
“사실 나는 유대인으로서 당신 같은 이방인과 교제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셨으므로 당신의 초청을 사양하지 않고 오게 되었다. 그런데 왜 나를 불렀느냐?” 이것은 베드로가 아직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고넬료에게 보내신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는 영문도 모른 채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자 무조건 순종하여 이렇게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넬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넬료도 베드로를 청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30-32절)
고넬료는 “나흘 전에 내가 기도하고 있는데 천사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 베드로를 청하라’고 해서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 당신을 청해오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고넬료도 자기가 왜 베드로를 청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사 지시하셨기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베드로를 불렀던 것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 이 두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 만나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귀한 것은 이 두 사람이 영문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했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개 이런 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속 시원하게 다 알려 주시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해 나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게 되고 보게 됩니다. 베드로도 고넬료를 만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셨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완전하며 가장 선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이해되어야만 순종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순종하다보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베드로를 청한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하) 고넬료의 이 말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인지 모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했으며, 지금 고넬료 앞에는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자기들이 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넬료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보면 베드로를 청하는 일은 귀찮고 불만스러운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하실 바에야 다 말씀해 주시지 왜 굳이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을까요?
오늘도 이런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를 주시지 왜 책읽기 싫어하는 나에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라 하실까? 공부라면 지긋지긋한데 교회에서는 왜 그렇게 성경 공부하라고 성화를 대는가? 왜 굳이 변변치 못한 목사를 통해 말씀을 들어야 하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은 불만을 가졌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불만스러웠습니다. 아론만 제사장이 되어 제사 드리는 것도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제사 드리겠다고 나갔다가 불에 살라져 죽고 말았습니다.
고넬료는 그런 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이 성경을 가르치고 전하게 하시려고 또 하나의 선물을 주셨는데, 바로 목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목사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지금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목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넬료는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베드로를 맞이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고넬료는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고넬료와 모인 사람들이 이런 자세로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4절)
오늘 우리도 고넬료와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와서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는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나와서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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