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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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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9.3.6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 믿는다.
고전1:23-24
몇 년 전 어느 기독교 신문의 발표에 의하면, 요즘 신앙인들이 원하는 책은 영성에 관한 서적이 56%, 신학에 관한 책이 7.5%, 기도에 관한 책이 6.9% 순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기독교 출판물 열 권 가운데 6권이 영성에 관한 서적이라는 겁니다. 아마도 이런 변화는 자본주의 폐해, 자연환경의 심각한 파괴와 맞물려 물질주의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에 눈을 돌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영성에 대해 말하고, 뭔가 고상하게 의미를 만들다보니 ‘영성’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고 폭이 넓어진 거 같습니다. 이를테면, 개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경지를 말하기도 하고, 어떤 현상에 사로잡힌 것을 영성이라고도 하고, 심지어는 신앙인이 아니라도 가질 수 있는, 초월적인 능력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영성이 다양하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삶)을 초월해야 한다고 보는 걸까요? 이 세상이 가장 완벽한 세상이라면 그러지 않겠죠. 그리고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부정적인 세상에서 초월하겠다는 영성은 곧 세속을 벗어난 삶, 기도와 수행, 초월적 실재와의 합일, 거기에서 오는 황홀경이나 마음의 평화 등등이겠죠. 이런 영성의 이해에는 영성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을 분리하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철학의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게 플라톤이죠.
그러나 성서의 인간은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에서처럼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고 육체(물질)는 일시적이고 비천한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인간의 몸은 영혼과 육체가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라는 말 대신에 ‘몸’이라는 언어를 씁니다(고전3:16-17, 6:19). ‘여러분’과 ‘여러분의 몸’이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몸이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몸은 성령의 전이고, 성전이며, 그리스도의 한 부분(고전6:15)입니다. 이만큼 바울은 몸에 대해 긍정을 합니다. 멈이라는 말로 바울은 그리스의 철학적 영향을 받은 로마의 사고체계를 부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플라톤 철학의 영향아래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신령한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등 열광적인 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영성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육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 아무렇게나(방종)굴렸습니다. 자기 몸은 자기 것이니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고전6:13에, “음식을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이다”는 말은 ‘몸은 쾌락을 위해 존재하고 쾌락은 몸을 위해 존재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고전6:13절은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몸의 부활과, 종말에 죽은 사람이 일으킴을 받는다는 종말적 소망을 부정하고, 지금 여기서 이미 영으로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는, 영의 부활을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유념해야 하는 사실이 있는데, 바울이 몸의 부활을 말할 때 그것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이 갖고 있었던 ‘영의 부활’, 즉 몸을 쓸데없는 소모품으로 여기는 풍조에 대한 반대의 개념으로 ‘영의 부활일뿐만 아니라 몸도 부활 한다’는 선언을 통해 ‘영과 몸의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열광주의자들의 영의 부활이해는 나중에 영지주의라는 이단으로 나타나고, 그 대표자는 마르시온이라는 이였습니다. 그는 육체를 천시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육체마저도 부인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을 때의 고통이나, 사망이나, 다시 살아나신 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걸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마치 건물을 지을 때 세웠다가 허물어 버리는 거푸집 같은 것이 몸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오로지 영이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신체는 잠깐 입었다가 벗는 껍데기라는 겁니다. 십자가에 고난당한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가장하고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바울의 ‘몸의 부활’은 그리스철학의 이원론과 이를 바탕으로 예수를 따르는 무리 안에 횡행하던 ‘몸을 하찮게 여기고 영혼이나 정신만을 인간존재의 본질’이라고 여기던 정신 사조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게 몸을 부정하는 것은 비정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을 긍정하고,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강조의 정점이 ‘몸의 부활’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부활은 영혼이 구원받는 게 아니라 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사고체계는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가치이념에 대한 저항이고 거부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몸을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요? 몸을 강조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고전1:23-24절을 보세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사람에게는 거리김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사람에게나 그리스도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거듭 2:2에서 다시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로써, 십자가에 위에 가짜 껍데기만 남겨두고 영만 부활했다는 열광주의자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그리스도가 몸으로 고난 받고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허공에 매달려 있지 않고 골고다라고 하는 땅속에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허공에 사라진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삶속 즉 땅속에 스며들었습니다. 갈릴리의 예수님이 온 땅을 밟고 다닌 것 같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도 그 땅위에 굳게 서 있었습니다. ‘땅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떠도는 어떤 영성도 사람들의 현재적 삶을 떠나 초월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수난의 현장성을 초월해서는 어떤 영성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영성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삶속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통의 목숨이 끊어진 것, 그것이 가장 빛나고 위대한 영성입니다. 이보다 더 고상한 영성은 없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말입니다.
미국에서 한 사이비 종파가 지구가까이 온 혜성을 보고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UFO라고 하면서 집단 자살을 했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으면 우주선에 탑승할 수 없으니 물질인 몸을 버려야 영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게 바로 영육의 이원론이 가져온 폐해입니다. 이런 위험성은 아니더라도 육체를 벗어나서 또는 지구를 벗어나서 어떤 초월적인 세계로 가려고 하는 상상은 허리우드 영화 같은데서 자주 다루는 주제입니다.
1997년에 나온 <콘텍트>라는 영화가 그것입니다. 이원론을 현대 과학과 잘 버무려 놓은 영화로서, 주인공 앨리라는 소녀(조디 포스터)는 지구 밖에 고도의 지능을 가진 생명체와 접촉을 합니다. 제가 아주 먼 옛날에 본 ‘코쿤’이라는 영화도 그렇습니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 구원은 분명히 지구를 벗어나서,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주 과학적으로 지구와 같은 행성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의 부활’이란 땅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현재적 삶을 기반 하지 않는 부활이나 영생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근래 등장하는 SF 영화는 종교적 요소들을 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기독교가 말하는 ‘영성’이 영화의 주제처럼 외계의 생명체를 믿고, 그와의 접촉을 시도하고, 그들의 메시지를 받고 해독하는 능력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도 달의 정령과 통신을 한다는 이도 있고, 미래세계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수신한다는 교수도 압니다. 그들은 그걸 영성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이들의 영성도 점차 그렇게 닮아가는 듯합니다.
이는 아마도 맨날 탁한 공기로 답답한 지구, 약하고 병들기 쉬운 인간의 몸을 벗어나려는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의 지구 현실과 삶의 악재들을 개선하려고 십자가를 지는 대신에 허물을 벗듯이 벗어버리고 멀리 달아나고 싶은 회피욕구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콘텍트>같은 영화가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이런 영화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아주 나쁜 가치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몸을 벗어나서 영으로 얻게 되는, 현실의 인간 삶을 부정하는 어떤 ‘영성’ 혹은 구원도 말하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세계나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얻게 되는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우리가 선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벧후3:13, 계21).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다음에 영혼이 가는 세계나, 차원 이동을(영화처럼)해서 도달하는 어떤 외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발로 밟고 다녔던 바로 이 땅, 그가 땅 위에 박힌 십자가에서 당했던 고난을 통해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또 완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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