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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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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9.3.26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삶이 곧 그의 ‘영성’입니다.
눅4:18
지난 주일은 ‘교회 창립 60주년’이어서 하일교회 교우들과 함께 예배했고, 특별한 연보를 드려서 하일교회의 짐을 조금은 덜어주었습니다. 이 날 설교한 이 목사님은 교회를 건축 하면서 타일 부치는 일을 배워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공사장엘 다니면서 그 소득으로 건축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목회 정신입니다. 이는 이목사님 한 개인의 ‘영성’이라고 한다면,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은 과연 무슨 정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른바 ‘예수의 영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롬8:9). 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전2:16)고도 했습니다. 이는 교회 다니는, 아니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예수를 떠나서는 말이 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성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게 있어야 오늘 여기 앉아 있는 내가 ‘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성하면 기도, 명상, 금식, 성령의 은사, 겉으로 보이는 그 어떤 분위기 같은 것들로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에서는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기도를 하셨다는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제한되어 있습니다. 가끔 군중들을 떠나서 빈들이나 산에서 홀로 기도하신 것과,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날 기도한 정도가 거의 전부입니다. 그것도 이 세상 삶의 현장을 떠나서 영성의 삶으로 숨기 위해 기도를 하신 게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도요, 고난을 앞두고 그것과 맞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금식을 했다는 것도 마태복음에 한 번 나올 뿐 다른 복음서엔 나오지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왜 당신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막2:18)을 보면 제자들이나 예수님이 그다지 금식을 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묻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죠.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하느냐? 신랑을 자기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금식하지 못 한다”
예수 자신의 일을 금식과는 정반대의 정황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로 예수의 영성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행동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그들이야 말로 기도하고, 금식하는 영성의 사람들)은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11:19)”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삶은 금욕과 같은 그들의 말하는 ‘영적 분위기’와는 딴판인 것입니다. 만약 기도, 금식, 금욕, 율법준수, 이런 것들이 영성의 척도라면 바리새파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영성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눅18:12, 마23:23).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혹독하게 비판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의 정신, 영성을 말하려면 금식 다음에 오는 어떤 개인적인 희열 보다는 혼인 잔치에서 어깨동무하고 춤추는 왁자지껄한 기쁨을 말해야 합니다.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의 깨달음의 미소보다는 해방의 기쁨을 맛본 작은 사람들의 함박웃음 속에서 찾아야 옳습니다.
예수님은 영성의 삶과 해방의 실천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삶과는 분리된 초연한 어떤 영성을 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작은(힘없는. 깔봄을 당하는)사람들이 억눌리고 억압당하는 현장에서 그들을 풀어주고 해방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영성을 실행합니다. 이 점은 예수님이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밝히는 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눅4:18>
예수님에게 주의 영이 내리자마자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천명합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입니다. 예수님에게 주의 영에 사로잡히는 일 곧, 영성의 체험은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는 일은 동시적인 것이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연회에서 ‘영성형성위원회’를 한다고 오라는 겁니다. 이게 뭐냐꼬 내가 물었더니 five-day라는 영성프로그램과 엠마오가는 길을 좀 더 확산시키는 일을 하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1년에 며칠 수련하듯이 하는 그것이 영성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군인들이 1년에 한 번 유격 훈련 받듯이, 프로그램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그 분위기가 떨어질만 하면 다시 뭔가를 찾아야 하는 그런 것을 예수의 영성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오늘날의 어떤 영성 프로그램이나, 종교적인 행위, 세상과 분리된 즉, 정치적, 경제적, 상황적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영성은 당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정치, 경제, 종교, 사회 상황에서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성은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제도와,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 사회의 구조와 대결하는데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오염시키는 불순한 행동으로 매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처럼 사시는 것, 그것이 그의 영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비는 행위를 영성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안식일을 어기면서까지 병든 사람을 고치고, 정결법을 어기면서까지 죄인과 세리들과 같이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그런 행동을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정명으로 대결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영성 아니었습니까? 이런 그의 삶 외에 또 어떤 것을 예수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영성은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의 것을 흔쾌히 나누는데 있습니다(마19:21). 예수님은 영성이 충만하면 할수록 세상의 가난과, 억압과, 불의와 멀어진 게 아니라 점점 더 가까워졌습니다. 영성에 충실하면 할수록 더욱더 작은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에 헌신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는 영성과 사회적실천의 삶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영성이 곧 사회적인 삶이었단 말이죠.
그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뭘까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의 뜻을 그의 생애에서 실천하는 것이 그의 사명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겨 주셨다는 의식과,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주고자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는 의식이 투철합니다(마11:27).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냥 아버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바 아버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일심동체의 표현들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5:17, 10:30을 보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비난을 했던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너무 친근하고,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굴절되지 않고)자신의 뜻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빠의 한결같은 뜻은 뭡니까? 이 세상의 작은 사람들이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나님과 일치 되면 될수록 그 일을 예수님이 해야 하지 않았겠어요?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작은 사람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18:10).”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18:14)”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이랬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14:36).”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 위해 자신의 듯을 꺾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가 살았던 삶의 정신 곧 영성이었습니다.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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