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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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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28절: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귀신들린 사람이 이 말을 한다.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께 말을 하면 대화가 되는 거고, 예수님이 없이 예수님께 말을 하면 기도가 되는 거다. 그런데 지금 성육신 예수님은 우리 눈에 안 보여도 자기 앞에 부활하신 주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와서 계시는 거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부활하신 그 주님을 생각하며 그 주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을 하느냐, 눈에 안 보이는 것도 있느냐? 사람은 없어도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자기 앞에 두고 생각을 하면 마음과 마음이 된다. 그런 게 없다면 어떻게 기도를 할 것이냐?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그 귀신의 소리나 귀신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귀신들린 그 사람과는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 얻을 자로 생각을 하고 지으신 것이지 귀신을 구원 얻을 자로 짓지는 않았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 앞에 엎드리면서 큰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라고 한다. 주님 앞에 엎드린 자세만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인데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 귀신들린 자가 옷을 벗은 것을 보면 인간의 인격 면에 자신의 부끄러움 모르는 사람이다. 벗었어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까! 또 나를 괴롭게 말라는 소리를 들어보면 예수님의 선하고 의로운 소리는 듣기 싫다는 말이고, 말하자면 자기를 안 고치겠다는 말이다. 이걸 들으면서 자기의 예수 믿는 정신 사상이 느껴지느냐?
사실 성경에 나타난 군대귀신이 들린 것과 같은 정신을 가진 자들이 교회 안에 차고 넘친다. 예를 들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을 때 둘 다 엎드려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b라는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교회에 교인도 많이 보내주시고 헌금도 많이 내게 해서 예배당을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니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했고, a라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여, 나에게 향한 아버지의 뜻을 몰라서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뜻을 알게 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대로 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를 했다면 이 두 기도가 비교가 되느냐?
그러면 이 두 사람의 기도에서 어떤 기도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없는 기도이고, 어떤 기도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있는 기도인가? 전자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고, 후자는 있다.
a라는 사람의 기도와 b라는 사람의 기도의 내용은 다르다. 내용이 다르다는 것은 소원도 목적도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기도가 귀신들린 자의 기도와 같이 됐느냐? b라는 사람이다.
마지막 시대에 목사뿐만이 아니라 교인들이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할 텐데’ 하는 건 자기 주관 자기 계획이다. 예수님은 ‘그건 다 버리고 나를 따라오면 내가 알아서 이렇게 이렇게 하마’ 라고 하신다. 이게 더 영광스럽고 휠씬 빠른 건데 타락된 지식 그 주관성이 예수님의 말대로 고분고분 순종을 안 한다. 예수를 불러놓고 ‘내가 이런 이런 걸 원하니 이걸 이뤄주시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한다.
인간이 무슨 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돈을 가지고? 건물을 가지고? 그런 걸로는 영광이 안 된다. 영광 되는 것은 불에 안 타고 영원히 가는 것이다. 그러면 신령천국에서 제일 영광 되는 게 뭐냐? 보석 문이냐? 생명 강이냐? 하나님이다.
영광이라고 할 때는 인격자에게 쓰는 말이지 돈에 쓰는 게 아니다. 집에 쓰는 게 아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쓰는 거다. 금강산은 영광스러운 게 아니라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깨닫지를 못해서 알지를 못해서 뭘 만들어서, 자기가 뭘 큰 걸 어떻게 해서 영광을 돌리겠다고? 알고 보면 거기에는 자기 생각 자기 주관이 들어있다. 그걸 이뤄달라고 하나님 앞에 알랑거리고 있다. 이건 속이 못돼 먹었다.
사람 못된 거 어디에 쓰겠느냐? 자기가 무슨 목적을 위해서 예수를 믿고 공부를 하는 것이냐?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목적을 위해서 공부도 하고 장사도 하는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 것이냐? 자기 일 도와달라고 하고, 자기 좋게 해 달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는 신경도 안 쓰면서 잘 들어 주시겠다. 얻어맞지나 말지. 세상천지가 네 말을 듣고 돌아가는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것이다. 기도를 똑바르게 하라.
아무리 일이 안 되고 뭐가 안 돼도 주님을 향해서 내가 오죽 못났으면, 내가 오죽 지혜가 없고 미련했으면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께 욕 돌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느냐? 그러니 이 세상일도 지혜롭게 하려면 주님을 닮아야 된다. 지혜도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자기의 노력을 가지고 얼마만큼 세상에 올라가겠느냐? 정말 예수 개떡같이 믿고 세상목적으로 살 바에야 예수 믿지 말고 세상 1인자로 살아라. 그러면 세상 1인자로 살면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살겠느냐? 쓸데없는 욕심을 가지고 왜 고통을 당하고 왜 얻어맞고 왜 세상 근심 걱정 다 당하고 살 것이냐? 왜 얻어맞으며 살 것이냐?
주일을 지키는 것도 제 멋대로 지키고 있다. 성경에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라고 했느냐? 주기도문은 외우지만 말고 자기를 심사하라.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자기의 시간성 노력성 자기의 투자성 자기의 열심성 자기의 전 일생 전폭이 그 안에 다 들어있는 거다.
그냥 예수 믿는다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로 오는 발걸음의 그 정신, 신경 쓰는 거, 모든 게 그 안에 들어있는 거다. 예배를 위해서는 행여나 늦을까봐 미리 내뛰고. 신앙심을 가지고서 자기를 살펴볼 수 있지 성경도 모르면 이거는 비교할 줄도 모르고 안 되는 거다. 그러니까 떡이 되도록 얻어맞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인지 확실히 드러났다. 물질에 관하고 세상에 관하고 자기 욕심에 관한 것을 위해서는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예수를 안 믿어도 원하는 것이고, 이방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하는 거고,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하는 거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 성품에 맞추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세상 하는 일에도 지식도 나오고 지혜도 나오고 관계성도 바로 되어 들어가고 한다. 하나님과 관계성이 비뚤어져 있고 교인들과도 관계성이 비뚤어져 들어있고 그러면 세상에 나가서 관계성이 바로 될 것 같으냐? 속에 돈 욕심이 가득 들어있는데.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과의 진리본질로 자체화 된 신앙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갖지를 못한다. 그들은 일을 가지고 자꾸 말을 하기 때문에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짓지 못하는 거다. 인간 대 인간, 이웃과 이웃은 인격적 관계성이라야 된다. 이게 바로 돼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도 기쁘고 즐겁다. 인격적 관계가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 거기에 무슨 기쁨이 있겠느냐?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자꾸 들어간다. 사실 세상은 그것도 아니다. 전부는 하나같이 자기 쪽의 이익만을 위한다.
진리 사상화 된 신앙 인격적 옷을 입지 못하면 주님과의 관계성이 바로 안 된다.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은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으로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된 신앙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갖지 못한다. 아무리 종교사업을 크게 이뤄놓고 그 이력이 많다고 해도, 아무리 ‘영광 영광’ 해도 하나님의 본질적인 인격과 성품으로 만들어진 구원이 없다.
사람이 신앙 면에 성장이 안 되면 집사니 장로니 목사니 목사 아들이니 해도 세상에 살면서 인인관계도 볼 것 없다. 다 자기 욕심을 차리는 거다. 아무리 부모형제 간이라도 형제가 부자로 살아도 형제끼리 인격적 관계가 안 되면 어찌하든지 재산을 뺏어가려고 한다. 한 푼이라도 더 뺏어오려고 한다. 아들도 그러고, 며느리도 그러고, 딸도 그러고, 사위도 그러고. 이게 사람이겠느냐?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얼마나 큰일을 많이 해 놨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을 크게 많이 해 놓은 것처럼 인간이 그렇게 큰일을 해 놓은 것을 가지고 신앙 믿음이라고 다림질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가지고 따지지를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일 사역을 크게 해 놓은 것을 가지고 신앙 믿음을 따진다면 즉, 믿음이 있고 없고를 그런 것을 가지고 기준을 삼는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편견자가 되고 불의자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공의가 없어진다. 그런 하나님은 아니다.
사람을 바로 만들어지게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로,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한 자로 환경과 처소에 따라 시대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하나님 당신이 알아서 하신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 시대에 어느 가정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걸 자기가 할 수 있다면 어디로 태어나고 싶으냐? 제일 큰 나라 미국하고도 제일 갑부 집? 그러면 현재의 그 정신을 가지고 거기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자기가 믿음이 있겠느냐, 더 없어지겠느냐? 그러니까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이 시대 이곳에 태어난 게 감사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어느 부모든 부모들을 나무랄 수가 없다. 그 시대가 그렇고 그 환경이 그렇고 그 가정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그런 환경을 다 겪고 나오면서 만들어진 사람 됨됨이다. 우리가 그걸 신앙 면에서 신앙 됨됨이로 보면 부모들을 본받을 게 하나도 없다. 부모들이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아느냐?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부모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나는 바로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부모들의 그 길을 또 밟는다. 부모형제를 원망하지를 말아라. 구원은 자기 할 탓에 있다.
부모 형제 내가 자라나온 가정환경은 그렇다 해도 상대를 보고 시집 장가가고 한 것은 누가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이냐? 자기가 좋아서이다. 그러니 남 탓을 해서는 안 된다. 그 환경 그 처소에서 남 탓하지 말고 부지런히 영능의 실력을 키울 것뿐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그렇게 따질 것 같으면 하나님의 공의는 없어지고 만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똑같은 조건과 환경의 상태가 아니다. 산과 바다의 굴곡이 있는 거고, 어느 환경에서 태어나도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도 그 지역에 맞게끔 태어난 것이다. 북극에 사는 사람을 한 달간 아프리카에서 살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더워서 죽는다. 아프리카 사람을 북극에 한 달간 살게 한다면 얼어서 죽는다. 북극에서는 주로 고래나 물개 같은 기름기가 많은 걸 잡아먹고 산다는데 추운데 사는 사람은 기름이 져야 한다. 그래야 추위를 잘 못 느낀다.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이 그런 데로 가면 피가 얼어서 돌지를 못한다. 하나님께서 어련히 그렇게 해 놓은 것이다.
세상은 모두 개인마다 다 다르다.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그 지식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타락된 인간의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신앙을 따지거나 사람을 평가하면 너는 천상 얻어맞아야 한다. 학교에서 어느 애들이 선생님을 많이 평가하느냐? 주로 공부 못하는 애들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 멋대로 믿으면서 교회에 대해 평가는 왜 그렇게 잘 하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기준, 주님과의 의사단일의 기준이다. 본문의 귀신들린 사람은 이것이 없다.
학교든 교회든 사회든 사람이 많은 곳에는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성이 무난해야 하고, 그러면서 지혜가 있어야 한다. 별의 별 사람이 다 있기 때문에 자기 성격 성질대로 살면 부딪혀서 못 산다. 자기 마음과 같은 사람이 있느냐? 자기 혼자뿐이다. 쌍둥이도 겉만 비슷하지 숨 쉬는 속도와 밥을 한 술을 뜨는 알갱이나 머리카락의 개수가 다 다르다.
귀신들린 사람은 예언 방언이 많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떠든다. 그렇다면 생활에, 활동에, 교회생활에도, 모든 정신 활동 면에서도 규모가 있어야 하는 건데 그게 없다. 교회에 덕을 세우지도 못하고, 세상에서도 덕을 세우지 못하고. 이게 보통 교만한 게 아니다.
외식자들이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분별도 못하면서도. 귀신들린 말에는 분별이 없다. 귀신들린 말에는 원인 결과 목적이 없다. 두리뭉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두리뭉실이 안 된다. 흑백이 분명히 나와야 하고 열매가 분명히 나와야 한다. 예수 잘 믿느냐? 원인 동기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열매가 분명해야 한다. 신앙사상을 갖는 면에서 분명해야 한다.
예수님을 수 년 수십 년을 믿었다고 하면서 ‘이게 세상인지, 이게 교회인지’ 구별도 못하면서 세상 명절이 벌어지면 교회에 나오는 것도 제 멋대로고, 주일날도 까먹고 제 멋대로인 이건 그 신앙사상의 질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예수님과 자기와 인격적 관계가 없는 신앙의 질이다. 이런 신앙의 질은 ‘예수님은 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 말이다. 말로써 ‘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말씀을 안 듣는다거나 예수님의 의사성이 아닌 딴 걸 구하거나 딴 쪽으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인격적 관계가 없는 신앙의 질이란 ‘주여 주여’ 부르면서도 의와 인과 신은 버렸구나. 예수님이 당시의 유대 종교인들보고 한 말이다.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이 예수 믿은 사람은 한 마디로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었어도 하나님의 본질적 온전한 성품이 없다. 사람 된 구석이 없다. 예수 닮은 구석이 없다. 지식이 있나, 지혜가 있나, 도덕성이 있나? 아무 것도 없다.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누가 한 소리냐?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괴롭게 할 이유가 있느냐? 말하자면 예수님이 귀신과 인격적 애정적으로 관계할 이유가 있느냐? 이유가 있다면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오직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왜 귀신 자기를 예수님이 괴롭게 한다고 말을 할까?
첫 번째는 귀신이 하는 그 말을 들으면 그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가기 싫다는 말이다. 그 사람에게 계속 있게 되면 그 사람은 계속 옷을 입지 않을 것이고, 이게 남의 말이 아니다. 집에서 자꾸 뛰쳐나갈 것이고, 계속 무덤에서 살 것이고, 그렇게 살다가 병들어 죽는 것이다. 결과는 사람이 영원히 망하는 것이다. 구원을 입지 못하고 영원히 망하는 것이다. 귀신이 들리면 그렇다.
부모에게 야단을 맞는 자식 속에 부모의 사랑이 머물고 있으면 부모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살지만 부모의 말을 안 들으면 그 자식이 나중에 부모가 돼도 개망나니가 된다. 부모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개망나니 같은 사람이 참 많다.
두 번째는 그 말을 사람이 하는 말로 들으면 예수 당신의 말을 안 듣겠다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이치의 말씀을 안 듣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를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식이 나쁜 아이들과 휩쓸려 있을 때 부모가 좋은 말로 훈계를 하면 자식이 잘 듣느냐? 간섭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는 자식은 제 정신이 아닌 미친 정신이다. 그게 부모와 인격적 애정적 관계성이 잘 지어져 있는 것인가, 끊어져 있는 것인가? 끊어져 있는 것이다.
기독자가 세상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건 선악과 먹은 지식의 신앙이라서 예수님의 천국사상과는 완전히 반대다. 의사성이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주장하는데 인간 자기는 땅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 안 믿는 이방인들이 땅의 것을 주장하듯이 세상주의 인본주의로 예수 믿는 자들은 역시 땅의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외식주의요 독사의 자식이요 마귀의 자식이다. 더러운 정신이요 더러운 귀신이 들린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사상과 소원 목적을 닮은 구석이 없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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