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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어리석음 또는 사악함
(역대하 3장)
1. 솔로몬 성전 건축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솔로몬이 짓는 성전의 규모가 묘사된다.
(대하 3:3-4, 새번역) [3] 솔로몬이 짓는 하나님의 성전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쓰던 자로, 성전의 길이가 예순 자, 너비가 스무 자이다. [4] 성전 앞 현관은 길이가 성전의 너비와 같이 스무 자이고, 높이는 백스무 자인데, 현관 안벽은 순금으로 입혔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재료들과 크기도 묘사된다.
(대하 3:5-10, 새번역) [5] 솔로몬은 또 본당 안벽에 잣나무 판자를 대고, 순금을 입히고, 그 위에 종려나무 가지와 사슬 모양을 새겼다. [6] 그는 보석으로 성전을 꾸며서 화려하게 하였는데, 그 금은 바르와임에서 들여온 금이다. [7] 그는 성전 안의 들보와 문지방과 벽과 문짝에 금박을 입히고, 벽에는 그룹들을 아로새겼다. [8] 그는 또 지성소를 지었다. 그 길이는 성전의 너비와 같이 스무 자이고, 너비도 스무 자이다. 육백 달란트의 순금 금박을 내부에 입혔다. [9] 못의 무게만 하여도 금 오십 세겔이 나갔다. 다락에 있는 방들도 금으로 입혔다. [10] 그는 지성소 안에 두 개의 그룹 형상을 만들어 놓고, 금으로 입혔다.
규모와 재료들만 봐도 크고 화려한 성전임에 틀림이 없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보고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성전'이라 부르고
무리하게 빚을 내면서까지 예배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다.
'솔로몬 성전을 봐라. 얼마나 화려하냐?
우리도 '성전'을 짓는 것이니 최선을 다해 헌금해서
크고 화려하게 '성전'을 지어야 한다.'
라는 것을 예배당 건축의 논리로 말한다.
2. 그 논리의 절정
솔로몬 성전 건축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면서
교회 건물을 짓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이는 논리는
이 지점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대하 3:17, 새번역) 이렇게 그는 성전 본관 앞에 두 기둥을 세웠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세웠다. 오른쪽에 세운 것은 ②야긴이라고 부르고, 왼쪽에 세운 것은 ③보아스라고 불렀다. / ②'그(하나님)가 세우다' ③'그(하나님)의 힘으로'
온갖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온갖 불법까지 저지르면서 지은 예배당 건물에 대해서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의 힘으로 지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복을 핑계로 헌금하게 하거나
심지어 은근히 협박까지 해서 헌금하게 해서
그 돈으로 화려한 건물을 짓고,
인간적인 타락한 수단을 사용해서 법망을 피하며 불법을 저질러 놓고서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거짓 논리를 만들어
무리한 예배당 건축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은 이제
'내가 모든 악한 수단을 다 동원해서 이루었다.'는 말을
고상하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죽도록 전도라는 것을 해서 사람을 모으고,
교회에 온 사람들을 교회 봉사하게 하고 일하게 하고 헌금하게 해서
그 돈으로 건물을 짓는 것이 교회의 전형적인 레파토리가 되면서
교회는 본질을 잃었고 가나안 교인들을 양산하고 말았다.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해서
크고 화려한 성전을 지으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그건 성경을 왜곡하는 죄악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건 탐욕에서 나오는 사악한 짓이다.
3.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예수를 믿는 것일까?
특히 이런 시대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의외로 성전을 지은 장소에서 힌트를 얻는다.
(대하 3:1, 새번역)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주님의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셨던 곳이다. 본래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으로 쓰던 곳인데 다윗이 그 곳을 성전 터로 잡아놓았다.
성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본질이다.
예배자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께만 삶과 죽음이 달려 있음을 고백하며
예배자 자신을 드리는 참된 예배에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던 곳이자,
다윗이 오르난에게서 타작마당을 구입해서 하나님께 드렸던 곳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터로 정해주셨다.
신자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크고 화려하게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것이다.
화려한 성전을 지어서 이 땅에서 영광을 받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짓이다.
삶과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 온전히 달려있음을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에 실현해가는 것만이
신자가 신경쓰고 노력하고 집중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세상의 어느 곳도 성전이다.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곳이 성전이다.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신자는 주님과 대면하는
참 예배자로 살아가야 한다.
4. 나는?
말씀 하나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목회는 무엇으로 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목회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일반신자로 살아가다가 신학공부를 했고
신학공부를 시작한지 1년 후에 교회를 개척했으니,
기존 목회자들이 어떻게 목회하는지를 전혀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존교회에서 부목사를 안 한 것이 다행이다 싶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몰라도
신앙에 있어서 목사가 위선을 행하는 것을 보았다면
나는 참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랬다면 나는 목회하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나는 말씀 하나 외에는 목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그냥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었을 뿐이고,
그 외의 어떤 프로그램도 사용하지 않았다.
말씀을 묵상하도록 돕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성도들이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에 삶을 걸어
말씀으로 인하여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이
목회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런데 목회자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목회자 세계에서 이상한 목사,
유별난 목사, 과격한 목사 등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소통이 되는
좋은 목사님들을 여기저기에서 만나오긴 했지만,
소위 한국 기독교의 주된 흐름에 있는 목사들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실 목회는 어렵다.
세상에서 여러 일을 해보았지만
목회만큼 어려운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사람과 끊임없이 상대해야 하고
사람이 변화되어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해야 하는데,
그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회보다 행복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너무 어렵지만,
내가 말씀 하나에 삶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고,
말씀 하나에 삶을 걸도록 돕는 것이 행복하고,
그런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말씀에 삶을 거는
신자들의 모습을 조금씩 보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항상 우울했던 내 삶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시작하면서 너무나 행복해졌고
교회를 개척한 후 6년이 가까워져 가지만
그 행복은 더 커져가고 있다.
왜 이렇게 행복할까?
소위 크고 화려한 '성전'을 가져서일까?
거액을 헌금하는 성도들이 많아서일까?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아서일까?
그런 것들이 행복의 이유라면
그 사람은 목사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감사하게도 그런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 것 같다.
나의 행복의 이유는,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이 성전임을 알아가고 있고,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세워져 가는 것을 보고 있고,
말씀 하나로만 사역하는데 교회가 망하지 않음을 보고 있어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전혀 틀리지 않음을 경험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씀이 있어서 행복하다.
말씀이 사람들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것을
조금씩 보고 있어서 행복하다.
말씀에 삶을 걸었을 뿐인데
껍데기 신앙만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없이 살았던
과거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말씀을 전하고 나누고 말씀으로 사람들을 섬길 수 있어서,
그것이 나의 사역의 전부여서 너무 행복하다.
이런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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