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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1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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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20149 설교보기 :https://youtu.be/i_l-_0x3emM |
사랑과 계명
요 14:15-21,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20년 5월17일
1) 전체가 21장으로 구성된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읽어본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비교해 볼 때 요한복음은 사변적인 성격이 매우 강해서 읽기에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공관복음이 서사적으로 기록된 소설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은 관념적으로 기록된 철학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장르가 다르지만, 그 핵심 내용에서는 양쪽 모두 같습니다. 요한복음도 잘 따라갈 수만 있다면 공관복음 못지않게 영적으로 다이내믹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첫 구절인 15절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마지막 구절인 21절은 첫 구절을 좀 더 풀어서 쓴 내용입니다. 귀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두 구절에서 키워드를 꼽자면 사랑과 계명입니다. 15절에서는 사랑이 조건절로 먼저 나오고 계명이 이어지며, 21절에서는 계명이 먼저 나오고 사랑이 이어집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과 구조의 문장은 “나무와 열매” 비유를 다룬 마 7:15-21에도 나옵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고,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좋은 나무는 존재의 차원이고 열매는 행위의 차원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과 연결해서 본다면 좋은 나무는 사랑이고, 열매는 계명입니다.
여러분은 사랑과 계명에서 어느 쪽이 먼저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의 능력이 있어야만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지, 아니면 계명 실천이 사랑의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단순히 이론적인 게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에 직접 관계됩니다. 기독교인 중에서 믿음은 좋은데, 즉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데 실제 삶은 시원치 않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고 합니다. 거꾸로 매우 인격적이고 존경스럽게 살지만 믿음은 별로 돈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믿음 생활을 잘하면서 실제 삶에서도 모범적이라면 세상에서 칭찬을 많이 듣겠지요. 더 근본적으로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인생살이에서는 내놓을 게 없으면서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고지식하게 붙들고 사는 사람과 교회에 나오지 않은 채 세상에서 존경스럽게 사는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일까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도 이런 문제를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우리에게 어떤 대답을 제시할지 기대하면서 이 말씀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2) 사랑과 계명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마디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 관계가 아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관계가 있고, 부부나 연인 사이에도 관계가 있으며, 친구 사이도 관계입니다. 교우들 관계도 사랑과 계명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말하는 게 피부에 와 닿을 것 같습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으로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도와줍니다. 사랑이 있기에 자식을 위한 수고를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수고로운 실천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계명입니다. 자식의 처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기에 무언가를 실천하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천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랑은 거짓말이겠지요. 어떨 때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을 자식에게 투사하기도 합니다. 거꾸로 철이 없을 때의 자식들은 장난감과 군것질만으로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가장 간단한 예로, 아이가 편식할 때 부모는 자식이 허기가 져서 무엇이든지 먹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사랑일까요, 아니면 당장 아이가 원하는 걸 주는 게 사랑일까요? 이런 판단은 때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따끔하게 거절해야 할 때도 있고 먹이는 게 나을 때도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라거나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다.”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당한 명제이기는 하지만 실제 삶에서 늘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전반적인 삶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달에 걸쳐서 전 세계를 공황 상태로 몰고 간 ‘코로나19’ 사태의 원인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완전한 답을 알지는 못합니다. 귀를 기울일만한 의견의 하나는 기후변화입니다. 기후변화로 변종 바이러스가 창궐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의견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나 그럴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기후변화는 바이러스 문제만이 아니라 지구 생태계 전체를 위험에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진단은 모든 인류 학자들과 지구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기독교인들은 지구의 기후변화를 정상으로 돌려놓거나 아니면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라도 어떤 계명을 어떤 수준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켜야 할까요? 무조건 기도한다고 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개인 승용차를 줄이거나 육류 소비와 각종 에너지 소비를 크게 줄이는 일이 필요하겠지요. 이런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어디까지 실천에 옮겨야 하는지 구체적인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사랑과 계명 실천 사이에는 우리가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해야 할 골치 아픈 어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그런 어려움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하면 기독교 신앙은 공허하게 들리거나 아니면 부담으로 들릴 것입니다.
3) 요한복음 기자도 기독교인의 세상살이가 도식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오늘 본문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에서 사랑과 계명의 관계를 순서만 바꿔서 똑같이 전하면서도 그런 대답에 도달할 수 있는 중간 단계를 언급했습니다. 즉 사랑과 계명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입니다. 다리가 기독교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있어야만 사랑과 계명의 관계가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16절에서 예수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도록 아버지께 구하신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보혜사, 즉 위로자로 번역되는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의 영(17절)입니다.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의 도움으로 사랑과 계명의 관계 안에서 실제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몇 가지 다른 설명이 나옵니다. 그중에 20절이 핵심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런 표현은 현대인에게 피부로 와 닿지 않습니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성경 언어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이런 말을 주고받습니다. “당신 안에 내가 있고, 나는 당신 안에 있는 거, 당신 알지?” 연애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쓰면서 성경에 나오는 그런 말은 어떤 선입견이 있어서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20절 문장에는 아버지와 예수와 제자가 맺는 세 가지 관계가 나옵니다. 첫째, 예수는 아버지 안에 계십니다. 둘째, 제자들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셋째, 예수는 제자들 안에 존재합니다. ‘안’에 있다는 말은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주 진실한 연인관계나 사제관계로 봐도 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세 가지 연합 관계를 다시 들어보십시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은 연합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와 연합되었습니다. 예수는 제자와 연합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에 예수가 존재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아버지와 연합할 수 있는 중간 매개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해 있고, 동시에 제자들과 연합해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되었습니다.
4) 제자들이 예수와 연합했다는 말은 예수의 가르침과 운명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걸었다는 뜻입니다. 진실한 연인들 사이나 도반들 사이에 그런 관계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출가 수도승처럼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의 선택은 일종의 거룩한 모험입니다.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선택을, 다시 말하면 그런 소명에 응답해본 적이 없기에 제자들의 선택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위대한지를 잘 모릅니다. 얕은 물가에서 물장난만 치는 사람은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서 자유롭게 수영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거룩한 모험이 없으니 거룩한 생명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와 연합했다는 진술의 근거는 예수 부활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라는 문장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종말에 실현될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 사건입니다. 그 생명 사건이 예수에게서 발생했기에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였으니 예수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말이, 즉 예수가 하나님과 연합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이 우리의 일상에서는 별로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증거를 보이라는 요구에 그 어떤 객관적인 증거를 내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 부활은 티브이 화면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 있어야만 예수의 부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활만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뭔가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거나 죽음이 두려워서 교회에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전달이 안 됩니다. 절친이나 부부끼리도 이런 인식의 단절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알아두십시오. 예수 부활은 예수를 사랑한 제자들만 경험할 수 있는 생명 사건입니다.
5) 그래서 오늘 본문 21절은 사랑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도 느낄 것이며 예수의 사랑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던 예수가 그에게 살아있는 자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좋아한다거나 그에게 가까이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그와의 온전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20절에 표현된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 사랑은 아주 복합적인 사건입니다. 이해와 신뢰와 열정과 연민이 다 포함됩니다. 그걸 줄여서 믿음과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사랑하니 예수의 가르침인 계명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와 연합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예배할 때마다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대상인 예수가 교리로만 남아있을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숭배의 대상일 뿐이지 사랑의 대상은 아닙니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예수의 인간적 실존 전체를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무슨 말과 무슨 생각을 했으며, 무슨 희망으로 살았는지를, 즉 한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는 서른 살에 출가했다고 합니다. 그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눈에 당시 세상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조금만 세심히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는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는 세상이 매우 부조리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사로잡혀서 살았으나 이 세상 현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와 정치 권력에 지배당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친 예수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런 이를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라는 말이 가리키는 ‘나’는 십자가에 달린 자를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를 사랑하는 사람만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이에게서 사랑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정말 두렵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예수를 사랑한 적이 있나요? 없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 말하면 터무니없는 욕심이 아닐까요?
6) 예수를 사랑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예배에 빠지지 않고 기도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는다는 것일까요? 그런 경건 생활은 하나의 방법입니다. 모범적인 학생들이 학교 수업에 빠지지 않고 복습과 예습 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과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과정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내용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와 운명입니다. 일상이 우리를 과도하게 지배하기에 예수라는 이름에 들어있는 삶의 내용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불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세속적인 일상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기에 예수 사건을 삶의 현실(reality of life)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젊은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은 이런 상황을 다 느끼실 겁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교회에 잘 나오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면 멀어지거나, 대학교 때까지는 붙어 있어도 사회에 나가면 대부분 떨어져 나갑니다.
이건 젊은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 교회에 나오는 기성 기독교인들도 사실은 예수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의 영혼을 불태웠던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와 정의와 평화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셨나요? 여러분 자신의 궁극적인 미래와 죽음을 진정성 있게 대면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런 기독교인도 있고, 없는 분도 있을 겁니다. 살아가면서 예수 사랑이 더 깊어지는 사람도 있고, 메말라 가는 분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첫 구절인 요 14:15절 말씀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될 것이며, 생명을 신비로운 깊이에서 대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예수는 실질적인 삶의 내용이자 중심입니다. 예수를 사랑한 만큼 여러분은 삶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요한복음이 끝나는 대목인 요 21:15절 이하에서 부활의 예수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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