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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중심은?
(역대하 5장)
1. 그림자와 실체
솔로몬의 성전을 글자 그대로 신약시대에 적용해서
예배당 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지으면서 '성전'이라고 한다면
그건 거의 이단에 가까운 짓이다.
신약 성경 곳곳에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성도 자신이요, 성도들의 모임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성전'은 그림자다.
그림자가 있다면 실체가 있어야 한다.
성전이라는 그림자가 보여주는 실체는 무엇일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다면 성전이 완공된 후에 성전 안에 들이는
구체적인 기물들은 무엇의 그림자일까?
2. 성전의 핵심 기물들
성전의 핵심 기물들은 무엇일까?
첫째, 언약궤
성전에 들어가는 수많은 기물들이 있지만
성전의 핵심 기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대하 5:7, 새번역) 제사장들은 주님의 언약궤를 제자리, 곧 성전 내실 지성소 안,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 가져다가 놓았다.
성전의 내실인 지성소의 안에 놓아두는
'언약궤'가 성전의 핵심 기물이다.
어쩌면 성전의 본질이 언약궤일 것이다.
둘째, 두 돌판
언약궤가 핵심 기물인데,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하 5:10, 새번역) 궤 속에는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두 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두 판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온 다음에 주님께서 호렙에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거기에 넣은 것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 두 돌판'이 있었다.
성전의 본질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십계명 두 돌판'이다.
그런데 언약궤 속에 원래 있었던 것들 중에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없어지고
십계명 두 돌판만 있었다.
십계명 돌판만 있어도 언약궤의 기능을 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의 중심은 언약궤요,
언약궤를 언약궤답게 하는 건 십계명 돌판이다.
언약궤는 이름대로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고,
십계명두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외의 것들이 있을 수는 있으나
성전의 중심은 오직 말씀 밖에 없다.
말씀이 말씀답게 살아있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해도 '성전'일 수는 없다.
3. 찬양
언약궤와 언약궤 안의 두 돌판이
성전의 핵심 기물이었는데,
이 두 가지가 제 자리를 잡자
나팔 부는 자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찬양한다.
(대하 5:13, 새번역) 나팔 부는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다. 나팔과 심벌즈와 그 밖의 악기가 한데 어우러지고, "주님은 선하시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고 소리를 높여 주님을 찬양할 때에,
찬양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무턱대로 노래한다고 해서 찬양일 수는 없다.
두 돌판을 담은 언약궤가 지성소에 자리를 잡고 나서 찬양을 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이고,
말씀이 주는 은혜를 누린 자의 마음과 입에서
참을 수 없어서 터져 나오는 것이 찬양이어야 한다.
말씀으로 인한 감사가 없는 찬양,
언약에 대한 감격이 없는 찬양이라면
그건 찬양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성전이라는 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지었기 때문에
찬양을 한 것이 아니라,
성전이 상징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고 언약궤와 두 돌판이 상징하는 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감사와 감격이 차고 넘치게 되는 것이 찬양의 핵심이다.
4.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영광을 보고 경험하고 누리는 것은
신자에게 생명과 같다.
그런데 주의 영광은 어떻게 임하는 것일까?
성전, 언약궤, 두 돌판의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
(대하 5:14, 새번역) 주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성전을 가득 채워서, 구름이 자욱하였으므로, 제사장들은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입으로만 "주님, 큰 영광 받으소서."라고
무조건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주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자리잡는
정상적인 성도의 내면이 되어야
그 곳에 주님의 영광이 임재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참된 주의 영광을
보고 경험하고 누리는 자가 참 성도다.
성도는 예수로 충만한 내면을 가졌는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내면을 가졌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성도의 내면이 성전이고,
성도의 모임이 성전이다.
그리고 그 성전의 중심은 말씀이다.
만약 말씀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삶에서 다른 것들을 뒤로 밀어두고서라도
가장 먼저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말씀으로 충만하지 않고,
예수로 충만하지 않은 내면이라면
다른 어떤 것에서 성공해도 부질없는 인생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5. 나는?
왜 자신은 말씀을 묵상하다가 멈추게 되는지,
왜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인지를
어떤 분이 물으신다.
사실 그 분만의 질문은 아니었고
이전에 여러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셨다.
내가 대답해드릴 수는 없는 문제지만,
그저 나의 이야기를 해드렸다.
나는 왜 30년이 넘도록 말씀을 계속 묵상할 수 있었을까?
왜 10년 이상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말씀을 묵상해왔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내 삶의 중심이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중심이 말씀이라는 말은 추상적이지 않다.
말씀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았고,
말씀이 있으면 충분했는데,
그건 어떻게 삶으로 드러났을까?
삶의 환경이 편해져도 매일 말씀을 묵상하길 멈추지 않았고
삶의 환경이 어려워져도 역시 말씀을 묵상했다.
삶이 어떻게 변해도 말씀을 묵상하는 것 한 가지만 했다.
삶이 분주해지면 다른 것을 줄이고 없애서라도
말씀은 묵상했다.
살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의 결심이 단호했던 것 같다.
'하루를 보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직 말씀만 묵상해도 된다.
그것 한 가지면 하루를 잘 보낸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말씀만 묵상하고 하루가 지나가는 경우도 있었고,
피곤에 쩔어서 쓰러져 버렸을 때에도
아침이면 일어나 말씀을 묵상했다.
나의 삶의 중심이 말씀묵상이 되었다.
그랬더니 내 삶이 서서히 말씀 중심으로 재편됨을 느꼈다.
말씀만 묵상했는데 말씀이 내 삶을 이끌어가서,
예전보다 상황은 힘든데
삶의 무게는 가벼워진 것 같은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말씀을 묵상한 내용이 일상에서 뜬금없이 생각났고
그 말씀의 가치대로 결정하고 선택하기도 했다.
이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놀랍다.
그저 말씀을 묵상했을 뿐인데,
교회가 세워졌고, 말씀묵상 세미나를 곳곳에서 진행했고,
코로나가 되면서 온라인으로 말씀묵상 세미나와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세미나를 진행했고
제법 많은 인원이 세미나를 들으셨다.
다음 주에 지방에 내려가는데
나의 묵상글을 통해 말씀 묵상으로 발을 들이신 분들,
또는 묵상글을 다른 분들에게 전달하면서
은혜를 함께 나누었던 분들과 교제하기 위해서다.
온라인 묵상 나눔 모임방은
여전히 엄청나게 활동적으로 묵상이 나누어지고 있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말씀 안에서 서로 은혜를 받고
서로 위로와 격려를 주고 받고 있고,
침체되었던 자신이 살아나고 있음을 고백하신다.
나는 사실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일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나의 이런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런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이 놀랍고 신기하다.
왜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내가 말씀을 묵상했기 때문이고,
그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 한 가지만 했을 뿐이고,
그것 한 가지에 대한 갈망이 컸을 뿐이고,
그것 한 가지에 삶을 걸었을 뿐인데 이런 일들이 일어났으니,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전혀 아니라 말씀이 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분명한 것 같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갈까?
목회는 어떻게 할까?
이런 고민이 나에겐 별로 없다.
그냥 말씀만 묵상하고 살아가려 한다.
묵상한 말씀을 나누고 살아가려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씀에 삶을 걸도록 돕는 일만 하려 한다.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1도 없다.
그냥 말씀을 묵상하는 것 한 가지만 하려 한다.
그러면 말씀이 나머지 모든 것을 하게 하는 것을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성전인 나의 내면과 삶의 중심은 오직 말씀이다.
말씀 외에 어떤 것도 나의 중심에 두지 않으려 한다.
돈이 필요하고 때론 돈이 모자라기도 하지만
그건 그러려니 하며 살다 보면
모자란대로 살아지고
어디선가 모자람이 채워지기도 함을 경험해왔다.
그저 말씀 하나에 삶을 걸고
말씀이면 충분한 것이 인생임을
그저 담담히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가려 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
한분 한분 생겨나고 있음에
깊이 감격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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